3월 20일부터 4월 9일까지 '작가의 집' 아트홀에서 임이식 화백의 묵화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임이식 화백 이름은 내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런데, 신문 기사와 함께 나온 그림 사진을 보니, 묘한 매력이 있었다.
뭐랄까, 흑백의 수묵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 색감과 사실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기법이 조화를 이루며 내 마음에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마침, '작가의 집'을 운영하는 이가 잘 아는 김문희 시인이라 인사도 하고 격려도 할 겸 겸사겸사 오프닝 리셉션에 참석했다.
임이식 작가는 첫인상이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눈과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작품 설명을 해줄 때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친근미를 느꼈다. 그 분의 작품 역시, 품성에 걸맞게 마음에 평화를 주었다.
언젠가 고국 방문차 들렸던 해운대 '겨울 카페'에서 타르의 기타 명곡 '빗방울'을 듣던 기분이랄까. 쓸쓸함과 고요함, 그리고 평화로움과 알 수 없는 외로움. 그러면서도 연인이 마음말로 속삭여주는 무언의 밀어가 들려오는 듯해 오래도록 작품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덜렁 $1200 짜리 그림에 찜을 해 빨간 딱지를 붙이게 했다. 제목은 '흐린 날'. 우산을 쓰고 가는 뒷모습들로 봐서는 비가 오고 있음직한데, 왜 '비오는 날'이라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흐린 날' 작품을 보며 '비오는 풍경 속 이야기'를 들으련다.
뒷모습을 보인 채 빗속을 걸어가는 풍경 속 사람들의 얼굴을 나는 영원히 모르리라. 그 안타까움마저 아쉬워하며 즐기리. 유 정의 '램프의 시'에 나오는 싯귀처럼, '...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하고 한숨 쉴 때도 있겠지. 어제의 추억과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진, 그 그리운 것들의 애달픔을 느끼려고 '흐린 날' 작품을 주저없이 샀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작품을 넘겨주는 순간, 작품에 대한 사랑까지도 함께 주어야 한다. 누구의 가슴에 안겨 사랑의 꽃나무를 키워갈지는 모르지만, 이전보다 더욱 사랑 받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미련은 버려야 한다. 아마도, 애지중지하던 강아지를 분양할 때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 보니, 돈 내고 그림을 사기도 생전 처음이다. 주머니 사정 탓도 있고, 그걸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을 훔친 작품이 없었던 탓도 있으리라. 모든 만남이 인연에서 비롯되듯, 작품과의 만남도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문득,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해 지금까지도 못내 아쉬움을 주고 있는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1984년 봄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8가 '삼일당' 화랑에서 '이응찬 화백'의 그림 전시회가 있었다. 그림에 문외한이면서도 무엇에 끌리듯 화랑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작품은 실경을 세필로 그린 풍경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대자연 품에 안긴 듯 숨은 듯 아주 미소한 존재로 어딘가에 조그마한 사람을 그려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화룡점정과 같아, 그림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했다. 자연 앞에 서면, 사람이 얼마나 미소해지는지 그것을 화가는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그림을 구경하던 중, 딱 한 작품 앞에서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꿈에도 그리워하는 내 고향 마산의 진달래꽃 보랏빛 야산이 거기에 있었다.
꽃동산과 숲 사이로 계곡이 흘러 마치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지겟군이 바위에 지게를 세워둔 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점 점처럼 앉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지겟군 모습이 너무도 정겨워 나도 모르게 계곡에 마음을 첨벙 담궈 버렸다. 마음은 이미, 갈매기보다 먼저 수평선을 넘어 태평양을 건너갔다.
조금은 슬프고 또 조금은 아린 마산 요양소 산길. 매주 수요일이면, 늑막염에 걸린 남동생 진료를 받고 여동생과 함께 셋이서 넘어오던 길이다. 그 중간쯤에 진달래 야산이 있었다.
그때 남동생이 여섯 살, 여동생이 여덟 살, 내가 열 살로 우린 모두 고만고만한 꼬마였다. 몇 리인지도 모르는 먼 길을 꼬마 셋이 매주 수요일마다 삼 년간이나 오르내려야 했으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외국으로, 어머니는 포목점 가게로, 언니 오빠는 상급생으로 학교에서 늦게 오니 저학년인 내가 약 당번을 감당해야 했다. 병원에 오후 다섯 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니, 가방을 던지고는 동생들 챙겨 냅다 달렸다.
언젠가 호되게 추운 날, 정말 가기 싫어 안 갔다가 백인 원장 선생님께 엄청 혼났다. 그러다, 동생 죽일 거냐고 혼돌림을 시키는데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돈도 안 받으면서 우리 동생을 살려주려고 저렇게 애 쓰시는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 이후로는 삼 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비실거리던 녀석이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아 애 아버지가 되고, 조기 축구회 스트라이커에 감독까지 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겨울이면 칼바람 해풍에 날아갈세라 자라목을 하고 세 명이 손을 꼭 잡고 야윈 산을 넘었지만, 봄이 오면 천지가 진달래 꽃동산이라 우리는 활개 치며 달렸다. 마치, 나비처럼 여기 앉고 저기 앉으며 참꽃(진달래꽃)을 따 먹기도 했다. 그 꽃잎이 얼마나 야들야들한지, 혀에 올리면 바로 녹아 버렸다.
진달래꽃 동산은 멀리서 보면, 연한 보랏빛으로 보이는 게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아롱아롱 동화의 나라로 나를 끌고 가던 풍경은 고향을 떠나 전학을 오면서 더욱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추억의 풍경이 부른 듯이 한 폭의 그림으로 현신하여 내 앞에 와 있었으니-. 이민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던 시간과 맞물려 내 눈엔 어느 새 촉촉한 수분이 차오르고 있었다. 두고 온 고향,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이 세월과 함께 흑백 필름이 되어 돌아갔다.
그 그림을 꼭 사고 싶었다. 아니, 잃어버린 고향과 잊어버린 추억을 되찾고 싶었다. 가격은 $1500. 2Bed Room 아파트가 $650 할 때였다. 지금으로 치면 $3000 이상 되는 가격이다. 돈도 없을 뿐더러, 미국 온 지 얼마 안 된 촌닭이라 분할로 낼 수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내 목에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언니가 준 $3000 짜리 진주목걸이도 갖고 싶은 그림 앞에서는 그 값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3000짜리 진주 목걸이 드릴 테니, 저 그림 나 주세요”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삼십 대 초반의 수줍음과 형편도 안 되면서 그림을 탐내는 마음이 부끄러워, 하고 싶은 말은 목울대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결국, 혀끝까지 올라와 맴돌던 한 마디는 ‘끝내 마자하지 못하고’ 돌아서 나왔다. 빈손으로 화랑을 나온 아쉬움을 <내 마음 사계를 날아>란 수필로 조금은 상쇄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그림이 눈앞에 어른거리곤 한다.
오늘, 큰마음 먹고 '일을 저지르고 보자'고 한 것도 또 한 번의 아쉬움을 남기게 될까 봐 서둘러 결정한지도 모른다. 4월 9일, 전시회가 끝나면 우리 집으로 얼른 모셔 와야지.
조석간으로 내 벗이 되어줄 그림이 못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