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결의안’의 마중물, 레인 에번스 의원.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옷깃을 여미고 불러야할 이름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마이크 혼다의 이름에 가려 그의 이름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어쩌면 조명 받는 주인공을 위한 조연 내지는 조명 기사였다고나 할까. 아니면, 400미터 계주 주자로 혼자 사분의 삼을 뛰어와서는 마지막 주자에게 바톤을 넘긴 비운의 선수라고나 할까.
위안부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리서치를 하던 중, ‘위안부 결의안’을 최초로 상정한 사람이 일리노이주 민주당 하원의원인 레인 에번스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초의 발의자로 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본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며 혼자 고군분투해 온 그.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금력 로비에 빠져 있는 공화당 의원과 맞서며 그는 매해 ‘위안부 결의안’을 상정했다고 한다. 한·일간의 문제를 왜 미국 워싱턴에 들고 와서 불편하게 하느냐는 빈정거림도 받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반인륜적인 인권유린의 문제라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9년 워싱턴 정신대 대책 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서옥자씨와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평소에도 인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약자의 편에 서 왔던 전직 변호사답게 그는 즉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9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최초로 미국 하원 의사록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이듬해 2000년도엔 ‘위안부 결의안’을 작성하여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원 의회에 상정하기 시작했다. 2006년 9월에는 하원 의원 외교위에서 통과했으나, 당시 하원 의장이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아 자동 폐기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 일은 그에게 상당한 절망감을 주었다. 투쟁은 길고 싸워야할 시간은 짧았다. 실지로 그는 1995년부터 앓아 온 파킨슨병에 알츠하이머 증세까지 겹쳐, 결국 두 달 뒤인 2006년 11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굼뜬 파킨슨 환자가 1982년 초선 의원이 된 이래 단 한 번도 낙선하지 않고 12선 의원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이라고 말 하는 것은 결례다. 노력 없이 얻어진 불로소득이 그의 사전에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불굴의 의지와 책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진작에 의정 활동을 끝내야 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998년도에 자신이 파킨슨병 환자라는 걸 공개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성실함과 약한 서민들의 대변자라는 사실을 높이 산 주민들은 그를 더욱 열렬히 지지하며 용기를 주었다. 그는 1982년부터 2006년까지 12선 의원으로서 건강한 사람 못지 않는 의정 활동을 펼쳐왔다. 미 해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월남전 고엽제의 피해를 최초로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한국 사람과 관계되는 법안만 해도,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위시해서 ‘영주권 신청자 비자 발급 문제’, ‘혼혈아 자동 시민권 부여 법안’, ‘주한 미군 주둔군 지휘 협정 개정 법안’등 어려운 일들을 앞장서서 해 주었다. 이 모든 일들이 쉽게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도 없었다.
그가 의정 생활을 끝냈을 때, 워싱턴 지역 한인 사회에서는 그를 위한 ‘감사의 밤’을 개최했다. 그리고 동료 주 하원의원인 수잔 리는 “레인 에번스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다”고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란 말은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이는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사랑의 본질이다.
레인 에번스는 말한다. “일본 군대가 저지른 일은 인류를 향한 범죄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범죄보다, 현재 보이고 있는 태도가 더욱 비인도적이고 위선적이다.”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핵심적인 말이다.
과거를 반성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일본은 진정 내 죄를 인정하는 용기가 없는 소인배인가, 겁쟁이인가. 이 문제는 알면서도 끝없이 변명하며 버팅겨야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혼다 의원의 얘기처럼, 그 누구도 일본을 무조건 성토하거나 굴욕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을 밝히는 일’이요, 그래야만 하는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레인 에번스가 정계를 떠난 일 년 뒤인 2007년,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면서 ‘위안부 결의안’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7월 30일, 드디어 긴 싸움이 끝나고 미 하원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위안부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성노예(Japaness Military Sexual Slavery)로까지 일컬어지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일본에게는 외교적으로 큰 압박을 주리라 한다.
이 일을 위해 선봉에 섰던 마이크 혼다 의원은 본회의 연설에서 누구보다 먼저 레인 에번스 의원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 결의안은 나의 스승이자, 동료 의원이었던 레인 에번스 전 의원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입니다. 그는 어렵고 힘이 없는 사람들, 차별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 사람이며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번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서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며 연금도 사양했다. 은퇴 후, 그는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 일리노이주 록 아일랜드에서 부모님이 물려주신 조그만 집에서 살며 무척 행복해 했다. 생애 최초로 자기 방을 가졌을 때의 추억이 있는 곳에서 살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며. 신경 세포가 파괴되고 몸이 굳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는 인근 이스트 몰린 요양소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채 반 년도 안 된 2014년 11월 6일이었다. 1951년생이니 그의 나이 겨우 63세. 가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고 없다. 제 소임을 다하고 지는 꽃처럼 열매 맺을 자리를 물려주고 간 사람, 레인 에번스. 마이크 혼다 의원의 이름에 앞서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의 동료의원 딕 더빈이 추모했듯이, 그는 도덕적 용기와 육체적 용기를 겸비했던 사람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호명하며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