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을을 일러 조락의 계절이라 하기도 하고 결실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생각도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생각마저 삶의 환경이 바뀌면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모양이다. 마치, 정상적으로 흐르던 강줄기가 어떤 인의에 의해 방향을 틀듯, 삶의 환경이 신의 계획에 의해 바뀌어지면 생각도 풍상을 겪고 살아온 소나무처럼 방향전환이 된다고나 할까.
나의 가을은 오랫동안 조락의 가을로 남아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열매도 익어 떨어지고, 여명의 기간도 한 해 한 해 줄어가는 걸 보면서 가을은 참 서글픈 계절이구나 하고 느꼈다. 가끔은 홀로 쓰는 일기장에서 얼룩진 잉크 자국을 보는가 하면, 먼 산을 보며 서글픈 가을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서글픈 가을병은 고개를 모로 꼬고 사색에 잠겨 걷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 첫결혼 생활의 6년 동안 그 절정에 달했다. 그 때 내 18번 노래는 ‘해는 져서 어두운데...’로 시작하는 ‘고향 생각’이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내 동무 어디 두고...나 홀로 앉아서...이 일 저 일만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한 소절 부르고 주르륵 눈물 한 줄기 흘리고, 또 한 소절 부르고 주르륵 눈물 한 줄기 흘리다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로 생각되면서도 묘한 위로를 받았다. 직장 생활을 3개월 이상 넘기지 못하고 걸핏하면 집을 나가 2박 3일 안 들어오는 남편에다, 주홍글씨 주인공 헤스터처럼 동네와 뚝 떨어진 외딴집에 살던 외로움이 겹쳐 나의 가을은 더욱 서글픈 길로 치달았다. 층층시하, 시누이 다섯 명은 왜 멀리 살지 않고 가까이 살아 그리도 자주 와서 감 내 와라 콩 내 와라 주문이 많은지. 어린 나이로 손 위 시누이들과 싸울 수도 없고 가을이 깊어가면서 마음병도 더욱 깊어져 갔다.
호사다마가 아니라 다마호사라고나 할까. 삶의 대전환이 왔다. 멀쩡하게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가 버렸다. 놀다가 머리를 벽에 부딪쳐 온 과실밖에 없는데, 몸에 콩알만한 반점이 생기고 자꾸만 배가 아프다 하길래 병원에 갔더니 백혈병이라고 했다. 아니, 백혈병이라니, 그것도 급성 백혈병이라니. 머릿속만 하얘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다 뿌얘졌다. 그 와중에 제일 큰 시누이는 위로랍시고 모진 말을 뱉고 갔다. “애도 희안한 병에 걸렸다. 우째 죽을 병에 다 걸리노. 여자가 받을 복이 있어야 애도 죽을 병에 안 걸리지...”
혹시 네 살 생일도 못 지내고 갈까 봐 며칠 전에 생일도 앞당겨 차려준 아들이다. 그 애가 지금 누워 죽어가는 마당에 그 앞에서 꼭 그런 대못을 박아야만 했을까. 죽어가는 아이도 귀는 열려 있다. 아니, 죽은 뒤에도 귀는 한동안 열려 있다지 않는가. 아이는 결국 이틀 뒤에 눈을 감았다. 4년 20일. 참 짧기도 한 삶이었다. “안 아프면 좋겠는데, 왜 이리 아프지?” 머리가 아프면 고 작은 주먹으로 제 머리를 콩콩 치던 아이. 엄마를 깨우는 게 미안해서 “엄마, 미안해...”를 연발하던 아이. 엄마에게 주고 가는 마지막 선물인 양, 그 애는 따뜻한 사랑의 말로 모진 말을 덮어주고 떠나갔다. 내 나이 서른 살, 그 해 유월 초여름의 일이었다.
긴 가뭄 끝에 한 줄기 빗줄기가 플라타너스 잎을 씻고 간 뒤, 또 한 번의 굵은 소낙비가 가슴에 홈을 파고 지나가자 곧 가을이 왔다. 더할 수 없는 조락의 계절, 그 가을은 이혼과 더불어 식구 네 명을 둘로 싹둑 잘라버렸다. 아직 기저귀도 빼지 않은 한 살 반 딸아이만 덩그러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H 시인은 어느 글에서 이혼은 용기 있는 여자가 한다고 했다. 용기 있는 여자?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여자는, 그것도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식을 살릴 때만 용기가 나온다. 단언컨데, 용기가 있어서 이혼하는 여자는 없다. 견딜 힘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인내심이 없어서라는 표현이 맞다. 그랬다. 나는 그로키 상태로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혼을 결심했고, 그런 가족들 속에서 계속 자아가 억제되면서 살아야 하는 그 굴욕감이 내 남은 삶을 되짚어 보게 했다.
굴욕적이었던 6년을 뒤로 하고, 나는 60년이란 긴 삶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새로운 시작이다.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나의 눈앞에는 쌍무지개가 뜨고 광채를 잃었던 눈은 삶의 의지로 형형히 빛났다. 아이가 죽은 지 사흘만에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유품을 정리하다 오래된 수첩에서 발견한 후배의 전화 한 통이 인연이 되어 좋은 직장도 얻게 되었다. 기적의 연속은 죽은 아이 한 명 대신에 180명의 불쌍한 아이들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외국 신부님을 모시고 근로 청소년 센터에서 교육부장으로 일하던 나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미국에서 어머니가 울며불며 들어오라고 전화를 해 와도 귓등으로 흘렸다. 부쳐온 비자 신청 서류는 일 년 넘게 서랍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미국으로 오기까지 내 삶은 ‘Born Again' 그 자체였다.
그 이후 가을은 서른 세 번이나 다녀갔다. 그러나 나의 가을은 더 이상 조락의 계절이 아니다. 우리가 돌봐주고 키워낸 아이들 중 신부님 한 분과 아홉 분의 수녀님이 나왔으니 결실의 계절이요, 기저귀를 차고 뒤뚱거렸던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제 앞길 잘 가고 있으니 그 또한 결실의 계절이다. 뿐인가. 딸아이와 손녀 뒷바라지로 이민 생활을 다 바쳐온 나의 삶도 이제사 내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온전히 메꿀 수 있으니 얼마나 풍성한 삶의 결실인가. 떠날 때에 다음 만날 것을 약속하듯, 조락의 계절 가을도 결국은 결실의 계절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간다.
이제 남은 일은 조락의 계절 가을도 결실의 계절 가을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할 일이다. 지나간 삶은 하나도 헛된 날이 아니었다. 낙엽이 떨어져 거름이 되듯, 한 잎 한 잎의 나날들이 오늘의 거름이 되어 또 하나의 역사를 쓰며 내일이란 준엄한 강물로 도도히 흘러갈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내 삶도 깊어간다. 온갖 풍상으로 겪은 소나무도 멋들어지게 휘어진 등걸로 아름다운 동양화 한 폭을 선사해주고 있다. (10-2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