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저녁 여섯 시 오십 분. 학교에 갔더니 클래스 캔슬이란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캔슬된 이유도 모른 채, 모두 싱글벙글 흩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에겐 수업 없는 날이 제일 신나는 날이다. 마치 보너스 받은 샐러리맨 같다.
뜻하지 않은 시간의 보너스. 얼씨구나 하고 LA 팝스 코랄 연습 장소로 향했다. 올림픽과 윌톤 코너에 있는 루테리안 교회 친교실. 모두 화들짝 놀라 반긴다. 나 또한 친정에 온 듯 포근하다. 이번 가을 학기 수업이 월, 화, 목요일 이브닝 클래스라, 부득이 연습 시간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휘자님께 양해를 구한 터였다.
오늘 연습 곡목은 애틋함을 자아내는 Mother of Mine과 White Christmas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이슈가 된 이야기는 당연 탤런트 김자옥의 죽음이었다. 대장암이 퍼져 폐암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깜찍하고 귀여운 외모와 옥구슬 구르는 듯한 낭랑한 목소리하며 살살거리는 눈웃음 까지 한 마디씩 보태며 모두들 애석해 했다. 예순 셋은 죽기에 너무 이른 나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의 남편 오승근이 부른 히트송 ‘내 나이가 어때서’까지 이르렀다.
내친 김에 그 노래를 다 같이 불러보기로 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뽕짝을 부르니, 조금 전에 침울했던 분위기는 간 곳 없고 완전 반전 무드다.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리듬을 타더니 ‘딱’이란 가사에 와서는 딱딱이 같이 손뼉을 “딱!” 치며 맞춘다. 그러곤 모두 어린애처럼 까르르 웃는다. 지구 저 편에서 누군가 애통하며 울고 있는데, 이 편에서 우리는 박수까지 치며 깔깔대고 있다. 이게 인생이런가.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지휘자의 해박하고 유우머러스한 가수들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이어져 완전 노래방 무드다. 오늘 따라 우리의 천재 반주자 윤국형이 못 오는 바람에, 전자 기기를 틀어놓고 연습하던 터라 분위기는 한층 고조된다. 오늘은 완전히 ‘따따불’ 보너스다. 클래스 없지, 합창 연습 대신 뽕짝 부르지, 게다가 삼십 분이나 일찍 끝났다. 지휘자님이 희색만면한 얼굴로 돌아보며 ‘딱! 맥주 한 잔만 하고 가시죠, 하며 권한다. Why Not? 좋아라 따라 나선다.
생맥주 한 잔! 정말 오랜만이다. 보수파 중에서도 보수파인 장로교 고신파 교회에 다녔던 나는 술과 담배를 완전히 죄악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식 날, 장난기 많은 친구들 손에 끌려 처음으로 생맥주 집에 가게 됐다. 유리 항아리처럼 큰 맥주잔에 가득 찬 누르스름한 맥주가 거품을 이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안 되는데...’ 속에서 천사가 말린다. ‘에이, 오늘은 그래도 대학 졸업식이잖아? 자, 기념으로 한 잔만 딱! 오케이?’ 마귀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도 ‘딱!’ 맥주 한 잔이 나를 꼬드겼다. 500 cc 생맥주 한 잔이 내 앞에 놓이자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그래, 한 번 마셔보자. 그렇다고 날 지옥에 보내겠어?’
꿀떡꿀떡. 물같이 잘도 넘어가네. 맞아. 독일에서는 음료수라 했지. 전혜린이 그토록 사랑했던 몽환적 도시 슈바빙도 이런 분위기였겠지? 다시 쭈우욱! 벌써 삼분의 이나 마셨네? 친구들은 뱅글뱅글 웃으며 재미있어 한다. 촌스러웠던 나. 그래, 난 너무 심각한 아이였어. 그런데 화장실 가고 싶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이거 뭐지? 왜 나비같이 몸이 가볍지? 마치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발레리나 같네. 붕붕 뜨는 느낌이 하늘도 찌를 것 같았다. 품위 유지는 물 건너 간 일. 조심조심 옆의자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350cc. 그것이 내 최초의 생맥주 주량이었다.
오늘 다시, 큼지막한 생맥주 병을 보니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 마시자. 한 잔의 추억.’ 그 때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장희 노래까지 안주로 얹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