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깡을 보면 친구 유자가 생각난다. 안 불러본 지도 오래 되었고, 못 본 지도 아득한 벗이다. 그녀와 나는 대학 같은 과 친구로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처음 우리가 친분을 트게 된 건, 그녀가 다가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학보사 기자 시험에 합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봄날이었다. 그녀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학보사 기자 시험 합격을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저으기 놀랐다. 내가 학보사 기자 시험에 응한 건 어찌 아는가 싶었다. 알고 보니, 자기도 시험 쳤는데 불합격했단다. (나중에 들은 편집국장 말로는 글솜씨는 좋았지만, 같은 과에 두 명을 뽑을 수 없어 그렇게 됐다고 했다.) 약간 섭섭한 표정이라, 기뻐할 수도 없어 슬그머니 꼬리말을 흐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조그마하고 예뻤다. 특히, 그녀의 얇게 쌍꺼풀진 눈은 고요와 깊은 사색이 가라앉아 숲속 옹달샘 같았다. 훗날, 유자를 소개받은 남자 친구 호야는 그녀의 눈이 호수와 같이 깊고 맑아서 헤엄을 치고 싶을 정도라며 찬사를 늘어 놓았다. 보일듯 말듯한 그녀의 미소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했다.
그녀에 비해, 나는 작은 키에 눈썹은 짙고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이라 날카롭게 보였다. 지적으로 생겼다는 말은 들어도 예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새침떼기에 가까워, 지금처럼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는 건 상상불허다. 별명이 한 시 아니면 열 한시라 할 정도로 목을 외로 꼬고 생각이 많아 늘 심각하게 보였다. 이렇듯, 우리는 여러 모로 다르게 보였지만 책을 좋아하고 사색을 좋아하는 점에서는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는 방학 기간을 빼고는 점심을 따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교내 식당에서 먹는 우리 점심 메뉴는 늘 라면과 새우깡이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는 법이 없었다. 가을이 오면, 물이 많이 나오는 신고배를 곁들이기도 했으나 라면과 새우깡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유자와 나는 대화의 막힘이 없었고 주제의 폭에 한계가 없었다. 우리는 숨김 없는 마음을 주고 받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헤어지기 아쉬워 종점에서 종점으로 버스를 타고 몇 번이나 오르락 내리락 했다.
누군가 미팅 파트너로 가자고 나에게 부탁하면, 난 어김없이 유자를 소개해줬다. 누가 어디로 유자를 데려가도 그들은 자랑스러울 것이기에 소개해 주는 나도 뿌듯했다. 지적 대화의 벗이었던 호야한테도 크리스마스 파티 때 유자를 소개했으며 은근히 두 사람이 사귀길 바라기도 했다. 교회 친구 철이 형아도 소개했으나 몇 번 데이트로 끝나고 말았다.
왠지 연애하는 사이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마도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약간의 보수적 성향이 그녀를 한가롭게 연애나 즐기는 여대생으로 내버려두지 않은 듯했다.
그녀와의 우정에 정점을 찍은 건 언양으로 여름 하계 봉사를 갔을 때였다. 우리는 다른 과 학생 옥모, 영라와 함께 같은 4인조 그룹이 되었다. 자유명으로 클럽 이름을 짓는 시간이 되자, 우리는 약간의 건방과 교만을 떨며 역발상으로 팀명을 '쪼마이 클럽'으로 정했다. '그래, 너희들 다 잘난 척 하고 멋진 클럽 이름 지어라. 우린 풀쪼마이가 되어 죽어 줄게!' 뭐, 이런 식으로 거드럼을 피우며 지은 이름으로 우리는 대만족을 하며 박수까지 쳤다.
우리의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 무더운 여름 날, 우리는 정수리에 내리 쬐는 뙤약볕을 마다 않고 20리 길을 오가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맡은 바 임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나는 '여성 동무'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터였다. 그 해 여름, 성행하던 '아폴로 눈병'에 걸려 나는 길게 땋아내린 생머리에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어 영락 없는 '여성 동무'였다.‘새마을 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갔을 때도 몇 백 명이나 모인 마을 어르신께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선그라스를 낀 이유를 설명했어야 했다. 그 날 저녁, 우리 ‘쪼마이 클럽’ 친구들은 또박또박 말 하는 모습까지 북한에서 온 ‘여성 동무’였다며 놀려댔다.
마지막날, 부락 별 장기자랑 대회를 위해서도 우리는 다른 팀보다 두 배의 시간과 열정을 바쳐 결국 영예의 1등상을 타냈다. 이십대 초반의 예쁜 여대생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번질거렸으나 그 위엔 기쁨의 함박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이 파이브를 치며 깔깔대던 우리의 웃음 소리가 어제런듯 들려온다.
유자와는 그녀의 결혼과 함께 소식이 뜸해지다가 이사와 함께 끊겨 버렸다. 우리 동기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한 그녀는 지금도 어디선가 현모양처가 되어 이 땅에 온 제 소임을 다 하고 있으리라. 푸르디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며 고국을 향해 소리쳐 불러 본다.
"내 마음의 벗 유자야! 잊을 수 없는 친구 유자야! 결혼과 함께 이사를 거듭하며 소식이 끊겨버린 내 그리운 벗 유자야! 넌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날 생각하고 있는 거니? 보고 싶다! 친구야!!!"어디선가 그녀가 이 글을 읽으면, 한달음에 달려와 눈물 글썽이며 “얘,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니?” 하며 곱게 눈을 흘길 것만 같다. 오늘 따라, 그녀의 소곤대는 음성과 조용히 번지던 미소가 못견디게 그립다. 간식 거리로 마련해 간 새우깡을 보며 45년 전 친구를 못내 그리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