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렌샤와 윌셔길 코너에 있는 이 집.
우리 딸이 삼십 년 전에 다니던 유아원이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지하철 공사로 곧 헐리게 된다.
이 집이 헐리면 우리의 추억도 함께 헐리게 된다.
벨을 누르면, 자기 엄마가 왔나 싶어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왔다가 다시 우루루 몰려 제 자리로 돌아갔던 곳.
오후 세 시부터 벨이 울려 오후 여섯 시까지 마지막 벨이 울릴 때까지 아이들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야 했다.
엄마가 와서 선택된 아이는 떠나고, 나머지 아이들은 다시 벨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열 번도 더 넘게 파도가 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딸아이는 열 여덟 번, 혹은 열 아홉 번이나 선택되지 못한 채 제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기대에 차 달려왔다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제 자리에 다시 돌아가야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상할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러나 어쩌랴.
삶은 선택할 수도 있지만, 종종 선택할 수 없을 때도 있는 법.
다섯 시에 일을 끝내고 데리러 가면, 우리 딸아이와 한 두 명의 흑인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남은 애들을 차마 그냥 두고 올 수 없어서 마지막 아이의 엄마가 올 때까지 같이 놀아주곤 했다.
세 살, 네 살짜리였던 그 아이들.
지금은 다 서른 너 댓살이 되었겠지.
모두 어디서 어떤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그 아이들 중에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간 아이는 없을까.
삼 십 년이란 세월은 너그럽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것.
모든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 제 구실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기를 빌어본다.
집이란, 저마다 가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거기 걸맞는 추억이 있다.
'그 집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장의 사진으로 추억을 쟁여둔다.
딸에게 보내주었더니 슬피 우는 이모콘으로 제 마음을 전해왔다.
함께 걸어온 추억의 통로.
우리는 잠시 한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