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사시는 노인 아파트에는 자그마한 채마밭이 있다. 칸칸이 나누어진 채마밭은 주인의 개성에 따라 꾸밈새가 다르고 심은 채소 종류도 조금씩 다르다. 어머니는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쑥갓, 오이, 호박 등을 주로 심으셨다. 다 한국산이다. 땅만 미국땅이지 변한 건 하나도 없다. 고향밭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넓은 땅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드시고도 딸 셋 가족과 친구 할머니들에게 나누어주실 정도로 수확량도 넉넉하다.
원래 꽃 가꾸기가 취미인 어머니는 틈만 있으면 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밭에서 돌아오실 때면 어머니는 이야기거리도 풍성하여 수다스럽다할 정도로 보고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도시의 한 귀퉁이를 떼내어 무료한 할머니들을 위하여 채마밭을 만들어준 건물주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주가 바뀌고 아파트는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노인 아파트가 시나 정부 소유가 아니고 개인 소유인 것을 처음 알았다. 새 건물주는 한국 사람으로 부동산 업자라고 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했고 많은 돈을 들여 멋있게 수리를 해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차장 부족으로 이제는 채마밭을 가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설날이나 추석 그리고 어머니날 등 일 년 중 이 세 날만 빼면 주차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차는 몇 대 되지 않고 자식들이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들은 웅성웅성했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가꾸어오던 채마밭이었다. 어디 먹기 위해서 가꾸어 오던 밭이던가. 그야말로 소일거리로 가꾸었고, 가꾸다보니 내 새끼 같이 애착이 갔을 뿐이었다. 자식이 찾아오지 않으면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말 할 벗이 없으면 말동무로 마음을 주고받던 채마밭이었다. 그러나 법이 그렇다 하니 따를 수밖에. 새 주인은 수도에 연결된 호스도 빼버렸다. 아직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채소들은 시들시들 말라서 죽어갔다. 손길을 놓아버린 채마밭은 어느새 잡초로 뒤덮여 흉물스런 공터로 변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며 먼 길로 돌아다니셨다. 주인은 금방이라도 주차장을 만들듯 하더니, 몇 달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은 물값 아낄려고 밭을 없앴나보다며 짐작할 뿐이었다.
여름과 가을이 다녀가고 겨울마저 다녀가더니 어느새 봄기운이 대지를 적셨다. 춘풍이 불자, 채마밭이 어머니의 마음을 스물스물 동하게 했다. 에둘러 다녔던 길을 가지 않고 오랫만에 채마밭 쪽으로 갔던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잡초로 흉물스럽게 변한 어머니의 채마밭 한 귀퉁이에서 여린 떡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호박잎이었다. 물도 주지 않은 그 메마른 땅에서 모진 겨울까지 이겨내고 고개를 내민 호박잎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호박잎에 물을 주기 시작하셨다. 허리 디스크로 수술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세지만 산 생명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호스를 빼버려, 1갤런 짜리 빈 우유통에 물을 받아 적셔주었다. 그것도 물 나오는 수도꼭지는 멀리 있어 절뚝거리며 그 길을 몇 번이나 오고가야만 했다. 한번 갔다 와서 쉬고 또 한 번 갔다 와서 쉬면서도 물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시샘인지 뭔지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 말라는 것 한다고. 주인이 알면 큰일 난다고. 잔디를 깎던 멕시칸 정원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 밭을 밀어버린다고 엄포를 주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오케이!” 하면서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주말마다 방문을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영상을 펼치듯 호박의 성장과정과 이웃들의 시샘어린 한마디를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 끝에는 항상 이런 말을 덧붙이시곤 했다.
“희선아, 도산 안창호 선생 말마따나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끼데이.”
도산 안창호 선생 이름만 틀렸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신 어머니가 훌륭한 말씀은 골라가면서 잘도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삶의 자세가 좋았다.
호박은 무럭무럭 자라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머니와 나는 호박쌈도 먹고 호박나물, 호박전도 해먹으며 한 여름을 잘 보냈다. 한마디씩 거들던 사람들도 애호박 하나씩을 건네받고는 빈정대던 말들을 싹 거두었다. 가을로 접어들자, 호박잎은 누렇게 시들어가고 마지막 열매도 다 땄다. 호박은 봄부터 가을까지 그토록 큰 기쁨을 주고 자기소임을 다 한 듯 마지막 목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비록 누렇게 죽은 호박넝쿨이지만 당신 손으로 차마 거두지 못하시겠다며 그대로 두셨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호박이 시들어 죽은 어머니의 채마밭도 서서히 다른 채마밭처럼 잡초로 덮혀갔다. 어머니는 다시 그 채마밭을 둘러 먼 길로 다니기 시작하셨다.
호박 가꾸던 낙이 없어지자 어머니의 얼굴은 생기가 없어지고 신나게 보고할 거리도 없어졌다. 나 역시, 계절따라 영상처럼 펼쳐주었던 호박 이야기가 끝나니 못내 아쉬웠다. 어머니는 마지막 호박을 어루만지며 이리 굴려보고 저리 굴려보며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았다. 나는 어머니께 호박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부추겼다. 글이라도 남기면 어머니의 아쉬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줄 것 같아서였다.
여든 셋의 할머니, 그것도 일제시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어머니가 선뜻 글 쓸 마음을 내기는 어려울 터. 나는 또 문법타령과 맞춤법타령을 할 줄 알면서도 딸 앞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냐며 계속 졸랐다. 그런데 하루는 조용해서 방안을 들여다보니 상을 갖다놓고 무언가 열심히 쓰고 계셨다. 결국, 어머니는 ‘고마운 나의 호박나무’라는 제목으로 난생 처음 ‘시’를 쓰셨다. ‘나의 그리움을 흘려버릴 수 없어 글로 표현해 본다’라는 부제까지 붙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봄에 예쁘게 자란 호박나무/여름에는 열매를 매저준 호박/ 예쁜 호박을 친한 친구들에게/나누어 먹게 한 고마운 호박/가을에는 더문더문 매저준 호박/그러나 줄기마는 싱싱한 호박나무/지금은 초겨울인데도/아침 저녁 즐겁게 바라본 귀여운 호박/세월은 거슬리 수 없는 듯 군대군대/시들어 가는 호박잎/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아마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할 거야. -
글 끝에는 11-9-2011 향년 팔십셋 지수연이라고 적혀있었다. 향년이라니.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하는 마음이 잠깐 스쳐갔지만 솔직 담백한 내용은 그 어느 명작보다 나를 감동시켰다. 군데군데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어머니가 육필로 쓴 마음의 글이 아닌가. 특히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라는 표현에서는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라 침을 삼켜야 했다. 어머니가 유독 채마밭 가꾸기를 즐기시고, 잡초더미에서 발견한 호박잎에 그토록 연연했던 것은 기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 당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호박을 동일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호박이 떠나고 그 빈 잡초더미 위에 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도 주차장 공사는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봄이 되자, 어머니는 땅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본격적으로 채마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오이, 호박 등 남은 씨앗을 골고루 뿌리셨다.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며 1갤런짜리 빈 우유통에 물을 담아 부지런히 날랐다. 좀 피곤하다 싶어도 자라나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올 3월, 어머니는 유난히 피곤하고 배가 더부룩하니 아프다며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간까지 전이된 위암말기였다. 수술은 불가하다고 했다. 주치의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께 소화제 처방만 해준 주치의가 잠시 원망스러웠지만 어머니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 죽을 때는 이름 하나 받아가는 거라고. 이제 암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1차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날에도 밭에 물을 주러 가셨다. 쑥갓을 못 심었다며 쑥갓씨를 사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 찬바람을 쐰 탓이었을까. 결국 이틀 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폐렴이라고 했다. 십 여 년간 정들었던 채마밭과도 그 날로 영이별이었다. 이제 야들야들 잎이 돋아나, 어루고 달래던 채마밭. 정녕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어머니의 놀이터였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밭에 물 줄 걱정만 하고 계셨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밭에 물을 주러 갔다. 1갤런 우유통 두 개를 들고도 내 성한 걸음으로 열 번을 왕래해야하는 거리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즐기시는 일이라는 생각만 하고 방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었지, 같이 밭에 내려가 볼 생각은 못했다. 성치 못한 다리를 끌며 3층에서 1층까지 오르내리셨던 어머니.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날이면 걸어서라도 내려가셨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결국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당신이 시 말미에 쓰신대로 ‘향년 팔십 셋'이었다. 시를 쓰신 지 꼭 6개월만이었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차마 당신 손으로 버리지 못한 호박줄기처럼 어머니도 수목장을 원하셨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밭에 지금은 내가 물을 주러 간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은 가야하는 거리인데도 시간만 나면 꼭 물을 주고 온다. 내가 못 갈 때에는 어머니와 가장 친했던 친구 할머니가 주신다. 심은 사람은 가고, 상추니 고추니 따 먹는 사람은 다 다른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말씀을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도 잘 따르고 가셨다. 어머니의 채마밭에서는 각종 채소들이 오늘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저희들을 그토록 사랑해 준 주인이 떠난 줄도 모르고. 마치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다 잘 살아가듯이. 이번 채소농사가 끝나면 나도 어머니의 채마밭을 돌아 먼 길로 다닐 것만 같다. 어머니와는 또 다른 이유로.
주인 잃은 채마밭. 그 엄마의 채마밭에 내년에는 누가 씨를 뿌려줄는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