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 초대
노동절 연휴를 맞이하여 콩국수를 해 주겠다는 초대를 받고 집을 나섰다. 며칠째 불볕더위에 시달린 터라 콩국수 초대란 말만 들어도 절반의 더위는 가신 듯했다.
살림솜씨 맵고 음식 잘한다는 칭송을 듣고 있는 둘째 동서는 같은 여자가 봐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정성을 더 한 듯 콩국수는 완전 예술품이었다. 콩과 검은 깨에 호두까지 갈아 넣은 국물은 고소하기 이를 데 없고, 정성스레 썰어 넣은 토마토의 붉은 색감은 동동 뜨는 얼음과 함께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영양을 생각해서 도토리 국수를 썼다는데 그 쫄깃쫄깃한 맛 또한 일품이다. 거기에 곁들여 나온 총각김치 역시 부지런히 젓가락을 오가게 한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한 그릇을 비웠다.
배도 부르고 바람도 쐴 겸 뒤뜰로 옮겼다. 거기엔 최근에 손수 지었다는 팔각정 정자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프로를 뺨칠 정도의 빼어난 솜씨다. 조각조각 잘라서 끼워 맞춘 나무 천정은 장인이란 말을 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평소의 꼼꼼한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두둥실 떠올라 유유히 유영하고 높이 솟은 팜트리는 이국의 풍경 한 점을 펼쳐 보인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풍경을 흔들며 맑은 노래를 들려주고 감나무 잎 사이를 빠져나간다. 멋진 팔각정 아래 풍경마저 낭만을 재촉하는데 부른 배만 쓰다듬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럴 때는 동동주나 막걸리가 어울림 직하나 마침 새 손님으로 합세한 L이 맥주 한 박스를 사 들고 오는 바람에 맥주로 입가심하기로 했다. 안주로 닭튀김이 곁들여 나왔다. 뒤이어 손님용 포도주까지 나왔다. 밥 배가 따로 있고 술 배가 따로 있다며 남자들은 부지런히 술잔을 비웠다. 배도 부르고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간간이 대화에 참여하며 풍경 속에 나를 맡기고 앉아 있었다. 차츰 얘기가 무르익어 가고 해도 슬슬 서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자기들만 술을 마시기 미안했던지 나에게 닭튀김이라도 들라며 권했다. 평소에 육류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총각김치까지 청해 닭튀김을 한 개 두 개 먹기 시작했다. 세 개째 먹자, 속이 거북하고 부대끼기 시작했다. 끝내 무리한 식탐이 사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좋은 분위기를 깬다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먼 길을 핑계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 에이에서 우리 집이 있는 리틀락까지는 장장 한 시간 반. 아득하게 느껴졌다. 배를 어루만지고 가슴을 쓸어내려도 답답증은 농도를 더 높여갔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고 빈혈 증세까지 일어났다. 사지 힘은 점점 빠지기 시작하고 눈앞도 흐려져 풍경은 시뮬레이션으로 변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배는 더부룩하고 허리는 끊어지도록 아팠다. 급체가 아니라, 이거 혹시 위암 아냐, 하는 의심도 순간적으로 스쳤다.
작년에 어머니를 위암으로 잃고, 임종을 지켜보며 나도 죽을 때는 어머니랑 같은 위암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고통에 마음뿐 아니라 육체적 고통까지도 동참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렇다면 이 정도 고통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이리 품위 없이 죽을상을 하고 고통을 호소하는가. 평소에 비타민 하나 안 먹고 주치의도 없다고 뻥뻥 자랑치던 나. 어디서 에너지가 그렇게 나오세요, 하고 물으면 “긍정적인 사고방식?” 하면서 생글거리던 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식과 건강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토할 것 같다. 아니, 토해야 살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빨리 토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달라고 재촉을 했다. 마침 성당 근처라 그곳으로 달렸다. 박정하기는. 오늘 따라 성당 화장실 문까지 다 잠겨있다. 마당을 빙빙 돌다가, 문짝이 떨어져 잠글 수 없는 남자 화장실 하나를 겨우 발견했다. 남편을 보초로 세워두고 토하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몇 번이고 토해냈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이제는 정말 죽을 것 같다. 특히, 오늘은 일요일에 연휴라 병원문도 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협심증까지 도져 심장이 옥죄어 왔다.
죽는 건 순간이다. 상상은 확대되어 갔다. 죽는 건 겁나지 않지만, 고통은 괴로웠다. 유난히 고통에 대한 인내심이 약한 나는 평소에도 순교로 총살은 당할 수 있는데 살을 태우거나 벗기는 고문은 당할 수 없다고 말해 왔었다. 하느님도 당신 자녀가 그의 이름으로 고통당하는 건 원하지 않을 거란 기대와 믿음도 변명 삼아 붙이곤 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계단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걸을 힘도 없다. 몸에 기력은 다 빠져나가고 가슴은 더욱 옥죄어 와 숨쉬기도 힘들었다. 손끝도 피가 통하지 않는지 뻣뻣해지며 움직일 수도 없다. 이거 중풍이라도 오는 거 아냐, 순간 방정맞은 생각마저 스쳐 간다. 아무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다시 동서 집으로 가자고 독촉을 했다. 마침 프리웨이에 오르기 전이라 동서 집은 십 분 거리였다.
불과 얼마 전에 깔깔대며 웃던 사람이 사색이 되어 돌아오니 맞이하는 사람들이 더 당황했다. 나는 부축을 받으며 맨발로 끌려 들어갔다. 온몸은 솜처럼 축 처졌다. 이젠 품위고 체면이고 아무것도 없다. 날 살려줍쇼 하고 무장 해제한 채 온몸을 그들에게 맡겼다. 한 명은 손끝을 따고, 한 명은 손을 주무르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남편은 올라서서 발바닥을 밟았다. 동서는 찬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연신 훔쳐낸다. 바늘로 손끝을 따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팔을 훑어내려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그냥 생짜로 따 버리니 피는 나오지 않고 아프기만 했다. 졸지에 ‘찔러도 피도 안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911을 부르면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빨리 왕진 의사를 불러달라고 호소했다. 연휴라 의사들은 대답이 없고, 한 한의사는 자기 집으로 오면 치료를 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가는 동안에 죽을 것만 같았다.
동서 남편은 안 되겠다며 부항을 뜨자며 엎드려 놓고 윗옷을 훌쩍 걷어 올린다. 능숙한 솜씨로 여기저기 부항을 뜨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부항을 떠보는 나는 이렇게 아픈 건 줄도 몰랐다. 여러 수십 개의 바늘로 찔러대는 것 같다. 어떤 곳은 생피가 나오고 어떤 곳은 검은 피가 나온다고 수군댔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부항을 뜨자 더부룩했던 속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도 죽을 것 같더니 이젠 살 것 같다. 고맙다는 생각도 잠시,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깊은 잠, 영원한 잠으로 빠지기에는 아직 일렀나 보다. 네 시간 동안 죽이기라도 할 듯이 덮쳤던 고통은 잠시 생과 사의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했다. 급체 정도 가지고 무슨 죽음까지나 하고 빈정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은 순간적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순간적으로 숨을 거두셨다. 예고 없이 오는 죽음이 오늘은 콩국수 초대를 통해 잠깐 맛을 보여준 채 떠나갔다. 그런 친절은 베풀지 않아도 좋으련만.
여름이 떠나는 자리에 조락의 계절 가을이 들어서려는가. 왁자했던 개구리 울음소리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가끔 귀뚜리 울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09-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