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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 세상에서 용서를 빌어야 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빠랍니다.

아마 오빠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시겠죠. 하지만 나는 오빠에게 너무나 많은 마음의 죄를 지었답니다.

오빠의 영혼이나마 이 글을 읽어주길 바래요.

 

오빠!
오빠가 모범생에서 불량아로 바뀐 건 전학을 오고난 뒤부터였죠.

아니,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로 갔다가 문이 닫혀있는 바람에 결석을 하게 된 것이 ‘땡땡이’를 치게 된 동기였다고 했나요.

아무튼 모범생이었던 저는 오빠가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동네 ‘껄렁패’랑 어울려 다니는 게 너무나 창피했어요.

그런 오빠가 있다는 자체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요. 길에서 오빠를 봐도 외면하기 일쑤였죠.

스쳐가는 풍경도 그런 대접을 받지 않았으련만, 오빠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죠.

 

어떤 때는  친구랑 지나갈 때 오빠가 먼저 다른 길로 빠져주곤 했죠. 저도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랑 오빠가 담배라도 피우고 있으면 눈을 내리깔며 “아이, 담배 냄새!” 이 말 한 마디면 상황은 금방 종료되었죠. 타올로 얼른 담배 연기를 흩여버리고 “우리 희선이 왔다. 빨리 나가자!”하며 친구들을 소몰이 하듯 밖으로 끌고 나가곤 했지요.
결국, 오빠는 그 명석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는커녕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하게 되었죠.

 

그 이후, 오빠는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게 되고 술이 과하면 동네 사람들과 시비까지 붙는 일이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부에 대한 미련때문에 종종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곤 했지요.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던 오빠는 대학생이 된 친구들 리포트를 대신 써 준 적도 많았잖아요.

그럴 때마다, 멀쩡하게 눈 뜬 사람들이 장님 앞에 머리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혼자 실소했지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영어를 가르쳐주던 오빠였는데 저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그 즈음, 의리파 오빠는 친구 따라 해병대에 입대해서 월남으로 가 버렸죠.

그때는 전쟁 막바지로 가면 거의 죽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흉흉한 때였지요.

만약 그때 우리 학교가 부둣가로 전송하러 나가지 않았고, 또 오빠가 만약 월남전에서 전사하셨다면 난 천추에 한이 맺혔을 거에요.

 

 

개미떼 같이 많은 장병들 속에 오빠가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뜨거운 여름 날.

월남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떠나려던 오빠는 우리 학교 교복을 보자마자 나를 발견하고는 전함 꼭대기에서 내 이름을 목메이게 불렀죠.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희선아! 희선아!!"하고 목메이게  내 이름을 부르는 오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 그때 처음으로 오빠를 위해서 많이 울었답니다. 

 

 

그때도 나는 주변 친구들과 남학생들 앞이라 소리쳐 오빠를 부르지도 못한 채 고개 숙여 그저 울기만 했지요.

'불쌍한 우리 오빠! 불쌍한 우리 오빠!!" 마음 속에서는 수 천 번도 더 이 말을 외쳤지요.

뱃고동을 울리며 서서히 배가 선회하고 그 곳에 온 사람들이 목놓아 울 때 갈매기는 또 왜 그리도 극성스럽게 울어대던지......

사지로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그 심정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할 수가 있겠어요. 

공항의 이별도 서럽지만, 빨리 사라지지도 않는 부두의 이별은 정말 애간장을 녹이는 이별이었지요.

 

다행히도 오빠는 무사히 돌아오고,  나중에야 목숨 값 대신 받은 돈의 일부가 내 학자금으로 쓰였다는 말을 들었지요.

저는 너무나 미안했지만, 고맙다는 말도  기어이 못하고 말았지요.

오랫동안 굳어져 온 내 마음의 장벽은 그토록 견고했나 봐요.

심지어, 오빠 같은 사람 있다고 시댁에 책 잡힐까봐 결혼도 ‘절대’ 안할 거라고 결심했지요.

그래서 연인 같은 사람을 친구로 돌려 세운 적도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때만 해도 자존심이 강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며 산 못난이였지요.

어머닌 그런 내 삶의 태도를 바꾸려 무척 노력하셨지만, 나는 그 벽을 뚫을 수가 없더군요.

지금처럼, 형제가 많다보면 '생인 손가락’하나쯤 있기 마련이란 사실만 인정했어도 좋았으련만.

 

근본이 나쁘지 않은 오빠였기에 오빠는 결혼과 더불어 안정을 찾아갔지요.

공부도 하고 자격증을 따 선박 회사에 취직까지 했죠. 그러다 위험수당과 함께 월급도 두 배로 준다는 얘기에 육상 근무 대신 해상 근무로 바꾸었죠. 몇 년 고생해서 빨리 자립해 보려는 소박한 꿈에 사랑하는 딸까지 얻었으니 마음이 급해진 거죠.

오빠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올케가 너무나 고마웠답니다.  

 

미국 와서 몇 년이 흘렀나요. 어느 날 저는 성가 41장을 부르다가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어요.

‘미소한 형제 중 하나에게 베푼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가사가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죠.

생각해 보면, 긴 세월 동안 오빠가 준 사랑에 비해 내가 해 준 게 너무 없더라구요.

 

 

그 길로 어머니께 말씀드려 한국에 있는 집을 오빠한테 주자고 떼를 썼죠. 그래도 장자 아니냐고.

처음엔 망설이던 어머니도 “니 마음이 고맙다!”하시면서 흔쾌히 허락하셨죠. 저는 너무나 기뻐 한국 올케에게 바로 전화를 해 주었죠.

맨날 “우리 희선이, 우리 희선이” 하더니 오빠가 정말 좋아할 거라며 올케도 울먹이더군요.

 

 아, 그러나 운명의 신은 왜 그리도 가혹한지요. 오빠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저에게 땡큐 전화를 했는데 전 받지 못했죠.

그리고 오빠는 한 번만 더 갔다 오겠다며 마지막 항차를 떠났죠.

그야말로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항차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배는 짙은 안개와 성난 파도 속에 휘말려 파선되고 선장으로서 다른 선원들을 살려준 채 오빠는 어이없게도  11월 겨울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지요.  해병대 물개였던 오빠, 오빠가 어떻게......

야속한 삼각 파도. 이왕 밀어줄 거면 뭍으로 밀어주지 왜 수궁 속으로 오빠를 데려 갔을까요.

 아, 그때의 비통함이란!

오빠 나이 겨우 서른일곱, 일곱 살짜리 딸을 둔 아빠로서 그렇게 가 버리기엔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었죠.

 

오빠! 늦게라도 제 마음을 알고 떠나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지 않았으면 저는 평생 한 맺힌 삶을 살았을 거에요.

오빠! 지난 날, 속 좁아 서운하게 했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너무 너무 미안해요.

 

어릴 때 새벽 기도 갈 때면 앞장서서 칼바람을 막아주던 오빠!  
오빠한테 받았던 그 큰 사랑, 조카 혜린이한테 다 돌려줄게요.

부디 편히 잠드세요.

 

(주님! 우리 오빠의 영혼을 받아 주시어 영원 복락 누리게 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