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끝내고 옥상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멀리 차가 보이자, 나는 습관적으로 알람키를 눌렀다. 그런데 차도 알람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웬일인가 싶어 의아해 하면서 계속 알람키를 누르며 차 가까이 갔다. 힘을 주며 눌러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열쇠로 열어보았다. 그런데 문은 열리지 않고 알람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혹 붙이는 격이 되었다. 알람 시스템을 해놓은 터라 열쇠로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알람 키를 고치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퇴근 시간이 임박하여 곧 주차장 철문을 내릴 시간인데다 열쇠 집들도 문을 닫을 시간이다.
몇 블럭을 돌아가 겨우 열쇠 집을 찾았더니, 알람 키는 차 액세서리나 카스트레오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또 거기서 몇 블럭을 뛰다시피 하여 겨우 카스트레오 집을 찾았다. 알람키를 건네받은 주인은 배터리가 다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나를 그렇게 난처하게 만들고 고생시켰던 알람키는 기술자 손에 들어가자마자 채 일 이 분도 지나지 않아 정상 작동을 했다. 좁쌀 보다 작은 배터리 하나가 그토록 고생을 시키다니. 작다고 얕잡아볼 일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느림의 미학’과 함께 화두가 되는 것이 ‘작은 것의 소중함’이라던가.
그런데 배터리가 다 된 줄은 어떻게 알지? 주차장을 향해 달리던 내게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겉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겨우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알람 키는 열어보기도 힘든데. 나는 다시 되돌아 가서 주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어떻게 알죠?”
“아, 네에. 가까이 가서 눌러도 반응이 없으면 배터리가 다 된 겁니다.”
젊은 주인은 일 하던 손을 멈추고 호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가까이 가서 눌러도 반응이 없으면 배터리가 다 된 줄 알라고? 순간, 그의 대답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아 가까이 가면서 계속 눌렀던 기억이 났다. 그 거리가 차와 점점 가까워져 엊그제는 차 문 앞까지 가서 눌러야만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오늘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정말 무디기는 어지간히 무디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배터리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과 반응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와도 흡사하지 않을까. 반응이 없는 관계는 죽은 관계다. 배터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갈아 끼우든지 재충전을 해야 한다. 왜 안 되나, 어떻게 해야만 되지 하고 애꿎은 알람 키만 눌러댄 나처럼 사랑에도 기계치가 된다면 두 사람 사이는 결국 끝나고 말 것이다. 에릭 프롬은 ‘사랑도 기술’이라고 했다. 아내와 남편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연인과 연인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 모든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공식은 한 가지다.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
언젠가 우리 청소년 센터에서 인간관계 훈련을 할 때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 양 편으로 나누어 한 사람씩 각각 3분간 자기가 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슬펐던 일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이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반드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음, 그래, 너무 마음이 아팠겠구나.” 하며 감정을 수용해 주는 긍정적 코멘트도 좋고,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는 무언의 위로도 좋다고 했다.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자 두 사람의 대화는 훨씬 생기를 이루었다. 서먹서먹했던 강의실 안도 웃음과 눈물이 범벅된 사랑의 화원으로 금방 변했다. 우리는 그때 그 조그만 반응이 상대방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배웠다. 마치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여는 것처럼, 고 작은 반응들이 굳게 닫혔던 마음문을 참으로 수월하게 열어 주었다. 나는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터지는 큰 사건들이 틀어진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걸 많이 본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시간이 없어지면서 불행한 사건이 연이어 생기곤 한다. 반응을 보인다는 건 결국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애정을 갖고 관심을 보인다면 그토록 많은 우울증 환자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열병처럼 번지는 자살 소동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 알람키를 만지작거리며 반성해 본다. 한번 충전한 배터리가 언제까지나 작동하리라 믿는 자만감은 없었는지. 혹은 다 되어가는 배터리를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누군가 가까이 와서 그토록 알람 키를 눌러재끼는데도 무반응으로 일관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오늘 퇴근 시간에 있었던 이 일련의 소동은 습관화된 나의 일상을 깨우기 위해 일어난 해프닝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사랑의 배터리도 한번 점검해 봐야겠다. 충전해서 쓰는 게 좋은지, 아니면 아예 갈아 끼우는 게 좋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