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우린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10년 전 그날, 우리 부부는 박항률 전시회의 한 작품 앞에서 발이 묶였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바짝 다가서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새벽>이란 작품,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우수가 깃든 소녀와 그녀의 머리 위에 한 마리의 새가 앉아 먼 곳을 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신비한 침묵 속에서 고요한 눈빛으로 고뇌하고 있는 듯한 소녀의 옆얼굴은 어쩌면 그리도 딸을 빼닮았을까.
아이는 어릴 때에도 항상 구도적인 고요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 곳을 응시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 아이의 어릴 적 옆얼굴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사색적으로 보여 슬프기까지 했다.
“저 아이의 옆모습은 왜 어린아이 같지 않은 사색의 냄새가 풍길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었다. 자주 다니던 가족 여행에서도 아빠와 오빠와 남동생, 세 남자가 장난치며 웃을 때 아이는 유독 먼 곳에서 생각 속에 하염없이 갇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날아갈 준비를 미리 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거짓말처럼 딸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중에 사고로 하늘로 날아갔다.
박항률의 전시회를 보고도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 황량한 겨울을 예감하는 가을의 끝자락, 40여 편의 시와 그림이 있는 박항률의 그림 시집 <<오후의 명상>>이 택배로 날아왔다. 그러나 뚜껑을 열지 않았다. 이런 날, 산속에 있는 고즈넉하고 적막한 장소에서 날것으로 그림을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마침내 작품집을 열었다. 화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는 오래 전에 보았던 <새벽>이란 작품을 찾아 빠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작품은 생생한 질감으로 음지의 별자리처럼 밝고 환하게 느껴졌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서서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만에 아이와 나의 가슴 따듯한 만남이었다. 그동안 나는 아마 먼 곳으로 날아간 딸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박항률의 작품을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딸은 독일에 있었다. 그러나 딸아이가 하늘로 날아가고 난 후 다시 보는 <새벽>이란 작품 속에서 소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새는 마치 하늘로 날아가려고 비상을 준비하는 듯했다. 작가는 내 딸이 새가 되어 먼 곳으로 날아갈 줄 어찌 알았을까.
박항률(1950~)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77년부터 16회의 개인전(서울, 일본, 미국)과 국내외에서 다수의 단체전 및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정오의 명상>, <낮꿈>, <저쪽>, <비어(秘語)>등의 많은 작품이 있다. 그것은 환상세계로 가는 길을 암시하는 듯했고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의 삶에 신화적 이미지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구도적이고 고요한 신비가 깃들어 있어 흡사 슬픔에 익숙해진 시인의 은유적 시어들과 같았다. 하필 그 많은 시인 중에 내면세계가 깊고 어둡고 치열했던 기형도가 떠올랐다. 그로테스크하나 아름다웠던 기형도의 시가.
박항률 그림 속 인물들은 주로 사색하는 옆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들에 신화적인 냄새가 짙어서인지, 그 그림들에 빠져들다 보면 왠지 서서히 불교적인 마음에 빠지곤 했다. 그는 깊은 관념의 적막감 속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0여 년 만에 다시 보는 그의 작품 속에는 어느새 빡빡 민머리와 단발머리와 꽁지머리의 수많은 딸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들에게서 수많은 딸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소녀의 단순한 머리는 어쩜 어릴 때 빡빡 민 우리 아이의 머리통을 그렇게나 빼닮았는지, 그리고 고요하고 깊은 표정까지도 너무나 딸을 닮아서 송곳에 찔린 듯 나도 모르게 신음을 깨물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10년 전에 우리가 말했던.”
가슴 가득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슬픔에 가까운 느낌이면서, 그러나 모순되게도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찾고 헤매던 것을 마침내 찾아낸 것 같은 감동이었다. 그동안 잘도 넘나들던 슬픔이 이번에는 명치에 걸려 꺽꺽대고 있었다.
“아!” 딸아이를 잃고 난 후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횡행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 그리고 끝 간 데 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들. 그것은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았던 나의 삶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이었다. 영화와 글이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그의 작품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새벽에 먼 길을 떠난 아이가 <새벽>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리고 색동저고리 섶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때 지오바니의 피아노 연주가 날아와 40여 편의 시와 그림들에 옷을 입히자,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많은 이미지의 딸이 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는 슬픈 몰입에 빠져 힘없이 탁자에 엎드렸다. 그의 그림 속에서 신비한 환상 속을 휘젓다 나오니 어느새 사람들은 저녁을 둘둘 말아서 가지고 나가고 없었다. 창밖엔 어둠이 페인트처럼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항률의 이미지들에 얼마나 물어 뜯겼는지 가슴께가 온통 아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