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띄우는 편지 / 지희선 동휘야! 좀체 비가 내리지 않는 L.A에 봄이라도 재촉하려는지 철늦은 겨울비가 내리고 있구나.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 평온한 슬픔을 주는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천국에 있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구나. 숨 가쁘게만 살아왔던 엄마, 그래서 더러는 널 잊고 살아왔던 엄마를 용서해 주렴. 동휘야! 그렇게도 튼튼하던 네가 급성 임파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엄마를 떠난 지도 어언 28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네가 살았으면 이제 서른두 살 노총각이 되었거나 아이들 아빠가 되었겠지? 그런데 내 마음 속엔 네가 떠났던 네 살 박이 귀염둥이 아들로만 머물러 있단다. 무슨 백만장자나 되듯이, 언제나 “엄마, 뭐 사 줄까?”하며 의젓하게 묻던 너! 그러면서도 넌 내게 단 한 번도 뭘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지. 뿐인가. 쥐만 보면 혼비백산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쥐야! 나오너라!”하며 장난감 총으로 부엌 바닥을 두드려 쥐를 쫓아주곤 했지. 넌 정말 천사 중에 천사였어. 그러던 네가 아파 누워있던 어느 날, 처음으로 목이 마르다며 나에게 우유를 사 달라고 했지. 그러나 너에게 우유를 사 줄 수는 없었어. 한방 의사 선생님이 우유나 요구르트는 안 좋다고 하셨기 때문이지. 곱게 눈을 흘기며 내가 고개를 흔들자, 너는 “아, 참! 엄마! 비가 와서 못 가겠제? 그럼 내일 사 줘, 응?” 하며 곧 ‘보물섬’ 프로로 눈길을 돌렸지. 그렇게 목이 타 들어가면서도 엄마의 눈짓 하나에 금방 포기해버리던 너! 조그만 주먹으로 이마를 통통 치며 “안 아프면 좋겠는데 왜 이리 아프지?”하면서 내게 미안해하던 너! 그럴 때마다 난 “그래, 엄마도 니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하며 네 이마를 쓰다듬어주곤 했지. 네가 죽음을 앞두고 누워있던 그 해 여름은 어쩌면 그리도 가물었는지. 그런데 네가 우유를 사 달라던 바로 그 날 처음으로 소낙비가 내렸지. 그때 창 밖 플라타나스 나뭇잎에 떨어지던 빗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동휘야!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내일 일을 알 수 있었겠니. 네가 우유를 사 달라던 바로 그 ‘내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소낙비가 쏟아지던 그 날 밤, 너는 내 곁을 떠나고 말았지. 밤 열 시 반. 시계는 똑딱이며 가는데 세상은 모든 게 정지되어 버렸지. 정적, 고요. 평화. 마치, 전 우주가 한 죽음을 위해 숨을 죽이는 듯 경건했어. 그런데 극도의 슬픔은 눈물조차 주지 않더구나. 네 눈을 쓸어내려줄 때에도 “잘 가”하며 입술만 잠시 달싹거렸을 뿐 도무지 친 엄마의 태도가 아니었어. 그냥 비현실적인 한 풍경 속에 나 혼자 버려진 듯했지. 너를 뿌리고 온 다음에야 비로소 ‘우유’, ‘소낙비’, ‘플라타나스’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면서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지더구나. ‘우유라도 먹이고 보낼 걸’ 싶어, 감정은 더욱 소용돌이 쳤지. 그런데 그때! 멀건 대낮 난데없이 주님이 찾아 오셨더구나! 육십 대 초반 할아버지 음성으로! “그래, 너가 그렇게 사랑하는 애가 지금 내 곁에 와 있다. 지금 그 애가 너를 보며 슬퍼하고 있다. 과연! 이 애가 어떤 엄마가 되기를 바라겠느냐! 우는 엄마? 밥 안 먹는 엄마? 잠 안 자는 엄마? 아니다! 잠 잘 자는 엄마! 밥 잘 먹는 엄마! 명랑한 엄마!” 그러고는 소리가 사라졌지. 동휘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벌떡 일어나 “어머, 이 소리 어디서 났지? 누가 말했지?”하며 나는 방을 빙글빙글 돌았지.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 네가 갖고 놀던 장난감, 네가 벗어 놓고 간 옷 위에 따스한 햇빛만 내리비치고 있었지. 그 순간, 나는 완전히 ‘꽝!’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맞아, 영혼불멸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지? 그래, 그래. 내가 우리 동휘를 슬프게 하면 안 되지.’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손끝 하나 까딱할 힘이 없던 내가 일어나서 찌지고, 볶고, 밥을 하고........ 그게 바로 ‘사랑의 힘’ 아니겠니? 할렐루야! 하느님! 지금 생각해도 그건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야. 그리고 그건 바로 네가 준 마지막 선물이며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기도 하지. 동휘야! 엄마는 지금 기쁘게 살고 있어. 네 동생 동미도 멋진 아가씨가 되어 잘 살고 있고. 동휘야! 할 말이 많은데 편지가 너무 빨리 끝났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 그때는 못 다한 이야기 많이 나누자꾸나.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