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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베를린 올림픽에서 미국 육상계의 영웅이 된 ‘제시 오웬스’의 이야기를 TV로 보았다. 최초의 흑인 선수로서 게르만 민족의 우월 사상에 젖어있던 히틀러의 자존심을 보기 좋게 꺾어버리고 조국인 미국에 네 개의 금메달을 안겨준 제시 오웬스. 그는 지금까지도 미국 육상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몹시도 가난했다. 게다가 인종차별의 굴욕 속에 살아야 했다. 그의 흑인 코치 또한 같은 처지였다. 하지만, 제시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코치는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걸핏하면 시동이 꺼져버리는 고물차에 발길질을 하면서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와 함께 땀을 흘렸다. 때로는, 육상 코치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기도 했던 사람. 그가 없었더라면, 미국 육상계의 영웅이며 흑인의 자존심이었던 제시 오웬스도 없었으리라.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제시 오웬스가 오직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선수 생활을 접으려 했을 때 코치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대학에 가면 선수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코치의 설득과  당장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제시의 갈등은 연습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제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선수 생활을 접고 일자리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드디어, 연습 마지막 날이 왔다. 이날따라 코치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제시는 몇 배나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연습을 끝낸 코치는 제시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뒤, 말없이 차에 올랐다. 이 날도 고물차는 어김없이 ‘부릉 부릉’ 소리를 내다가 제 풀에 푸르르 꺼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한참 차와 씨름한 끝에, 겨우 시동이 걸리자 코치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내가 대학을 나왔으면 이런 차를 타고 다니진 않는다.”
   제시는 코치의 고물차가 일으키고 간 흙먼지 속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순간, 제시의 마음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 대학을 가고 좋은 차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부의 과시나 편안함만을 의미하진 않을 게다. 그건 하나의 은유요 메타포가 아닌가. 제시는 비로소 코치가 던지고 간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제시는 그 메타포로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는 인생의 대서사시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코치의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꿈. 그는 그 꿈을 꼭 이루어내고 말리라고 결심했다. 제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 후, 1936년에 열렸던 베를린 올림픽에서 심판들의 현저한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네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 멀리 뛰기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따 냄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100미터 달리기에서 이 때 세운 10초 20이란 기록은 25년간이나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금자탑이 되었다. 더 통쾌한 것은, 애초부터 유태인과 흑인의 참가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종 차별주의자 히틀러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은 것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거리의 시민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으며, 어떤 이는 꽃송이 대신 돈을 종이에 싸서 제시 차에  던져주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꿈이 있다. 그러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두려운 결심, 헌신, 훈련,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망설이고 얼마나 두려웠던 결심이었던가.
   상금과 함께 평생 처음 쥐어 본 돈으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코치에게 새 차를 사 준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코치는 여전히 고물차를 몰고 있었고, 냉대와 멸시 속에 이어가던 흑인의 삶도 고물차처럼 털털거리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이런 휴먼 스토리를 보고 나니 숨통이 좀 트여진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를 지녔기 때문이라던가. 인종 차별과 가난을 딛고 일어선 제시 오웬스 이야기를 보며 나는 이번 올림픽 게임에 나올 선수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제2, 제 3의 제시 오웬스가 나와 또 얼마나 많은 감동 드라마를 써 줄지 자못 기대된다.  
   제시 오웬스 이후 70여 년이 지났건만, 인종 차별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양 남아 있고,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게 소원이라는 부모들의 간절한 바램도 마다하고 가난은 친한 동무인 양 늘 따라다닌다. 가난으로 치면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선수들도 눈물로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많으리라.
   1984년, 여기 LA에서 열렸던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안겨준 김원기 레슬링 선수도 얼마나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했던가. 편모슬하의 빈농 가정에 3남 3녀 중 막내라고 하니 가히 그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를 길러준 고교 코치 최경수씨의 말을 들으며 연신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김원기 선수는 출전비가 없어 양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한 게임 한 게임 출전하여 드디어 태극 마크를 달았고, 내 노라 하는 세계 선수들을 제치고 우리에게 첫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제대로 된 연습실 하나 없어도 뒹굴고 또 뒹굴며 꿈을 키워왔던 김원기 선수. 가난 속에서 피어난 꽃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손기정 선수도, 양정모 선수도 모두가 가난했다. ‘헝그리’ 스포츠라는 권투 선수들은 또 어떠한가. 맷짐 하나는 자신 있다는 오기 하나로 입문하여 코가 일그러지고 턱뼈가 내리 앉고,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제 코너를 못찾아 비틀거리면서도 피를 닦으며 또 일어섰다. 그리하여 얻어준 금메달들이다.
하지만, 어찌 금메달만 귀하겠는가. 금메달에 가린 은메달도 동메달도 다 귀한 것들이다. 아니, 메달만 귀하겠는가. 메달을 따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 모든 선수들이 다 귀한 사람들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올 때마다 선수들은 피 철철 흘리며 무릎으로 기어 올라온 계단이다. 고행하는 순례자처럼 올라온 그들에게 우리가 어찌 그리 쉽게 질타를 하고 박수에 인색하겠는가.
   승부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는 법. 비록 진 선수들에게도 마음을 다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모두가 가난이란 눈물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이기 때문이다. (20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