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모처럼 바다를 마주 하고 섰다. 오빠가 해상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지 근 오 년만이다. 끝내 찾지 못한 오빠의 주검을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던 바다를 다시 찾은 건 다름 아니다. 연일 ‘코리언 패밀리 비치 훼스티벌’로 유혹하는 R방송사와 딸아이의 극성 때문이었다. 물론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아픔이 많이 삭여진 탓도 있으리라.
오랫만에 보는 산타 모니카 비치는 소식 끊겼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탁 트인 풍경 사이로 겹겹이 밀려오는 푸른 너울이 시원함을 더해준다. 한때는 선장이던 오빠를 배와 함께 삼켜버린 무정한 파도였지만, 오늘은 그 파도마저 유정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습관처럼 심호흡을 해 본다. 태평양 너머에 있는 고향바다가 금새 갯내음이라도 전해올 것만 같다.
하지만, 장장 3마일에 걸친 이 광활한 산타 모니카 비치도 갯내음에서만은 실망이다. 왠지 여긴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없다. 개펄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항구 도시에서만 자란 나의 후각이 유다른 것일까. 십 여 년이 넘도록 매 번 올 때마다 갖는 의문이다. 처음엔 이상하다 싶어 코를 벌렁거리거나 숨을 깊이 들여 마셔보기도 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마치 특수 약품으로 갯내음을 제거해 버렸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고향에 돌아와도 옛 고향은 아니라던 시인의 심경도 이와 유사했을까. 바다는 바다로되 고향 바다가 아니라는 이질감은 내가 이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곤 했다.
그러고 보면, 모래 역시 고향 바닷가에서 보던 그런 모래가 아니다. 모래라기보다는 오히려 맷돌로 갈아놓은 흙에 가깝다. 만약 이런 곳에 누워 모래찜질을 한다면 무덤에 들어가는 예행연습쯤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높은 봉분은 없지만, 흙을 덮고 누워 있는 모습이 그와 흡사할 테니 말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여느 묏자리처럼 비싼 값을 주고 미리 사 둘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 삼십 만 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넓은 모래밭이기에 급한 순서대로 누우면 될 일이다.
해운대보다 몇 배나 넓은 이 백사장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광활한 모래밭에 파도가 부딪칠만한 바위 하나 없는 것일까. 군데군데 쓰레기용으로 드럼통이 놓여 있기는 하나, 파도의 자존심이 있지 기껏 숨 가쁘게 달려와 쓰레기통이나 치고 갈 수는 없지 않는가. 뭐니 뭐니 해도 파도의 자랑은 바위에 부딪쳐 내는 굉음과 하늘로 치솟는 흰 포말이다. 그런데 이 산타 모니카 파도는 고작 쓰레기통 밑동만 적시고 물러서야 하니 그 허전함이 오죽할까.
이런 점에서 보면 고향 바다의 파도는 행운아다. 해변에는 늘 큼직한 바윗돌과 그 곁에 자갈밭이 있어 파도에겐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다. 마치 사백 미터 계주를 하듯 바톤을 넘겨받으며 푸른 너울 너울들이 줄지어 밀려온다. 그러다가 마지막 주자가 테이프를 끊듯 있는 힘을 다하여 바위를 철썩 치고선 자갈밭 위를 차르르 미끄러져 나간다. 이때의 파도 소리는 그 어느 오케스트라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대 심포니다. 철썩, 쏴아, 차르르- 계속 이어지는 이 소리는 나의 고막을 두드리고 심혼을 울리어 오랫동안 그 여운을 지닌다.
오늘도 산타 모니카 파도는 대단한 각오를 한 듯 입에 허연 거품을 물고 달려온다. 바위 하나 없이 휑한 모래밭 위로 달려와서는 물러서길 수십 번. 마치 시지프스의 영원한 형벌처럼 안타까운 몸짓만을 되풀이 한다. 마음 같아서는 큼직한 바위라도 하나 놓아주고 싶다. 부딪쳐서 흰 피를 쏟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들어야 할 목표물만 있다면 그토록 무의미하지는 않을 게다. 비단 파도뿐이겠는가. 우리네 삶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이 삶으로 뻗어가자 왠지 가슴 밑바닥에 회색 바람이 인다.
그러나 이런 허한 마음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몫인 모양이다. 아이들은 좋아라 깔깔대며 파도와 놀이를 즐긴다. 쫓고 쫓기는 모습. 아이들은 아직 경쟁을 모른다. 지금은 다만 파도와 더불어 함께 소리치고 즐길 뿐이다. 마치, 자연은 정복해야 되는 대상이 아니라, 즐기며 함께 놀아야 할 친구라는 것을 일러주는 듯하다.
덕분에 바다의 풍경은 단조롭지 않았다. 그 단조롭지 않은 풍경 사이로 갈매기도 끼룩거리며 날아오른다. 갈매기의 비상을 보자, 내 마음도 원래의 상쾌함으로 돌아갔다. 그 중 한 마리를 점찍고선 그의 날개짓에 시선을 모두었다. 그는 높이 치솟아 하늘을 쪼기도 하고 수직으로 급강하해서 용궁을 염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개를 쫙 펴더니 순식간에 수평선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도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날기 위해 떠나간 것일까. 갈매기가 사라지자, 내 사유의 바다를 나르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도 사라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눈썹을 모아보나, 그가 사라진 수평선에는 하얀 돛단배 하나가 미동도 없이 떠 있을 뿐이다. 해를 숨기고, 달을 숨기고, 먼 항해를 떠나는 오빠의 모습을 한 점 점으로 만들던 수평선. 그 수평선이 오늘은 나의 갈매기도 숨겨버렸나 보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줄곧 자란 이 갯가 여인은 그의 장난기를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는 암시를 주려고 잠시 숨긴 거겠지. 수평선은 일찍이 탐욕이 없었다. 동 터 오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태양을 돌려주듯이 그는 곧 나의 갈매기도 되돌려줄 게다. 그러면 갈매기는 내 젊은 날의 꿈을 부리에 물고 힘찬 날개짓으로 되돌아오리라.
모처럼 바다를 마주했던 하루, 오랜만에 나의 의식도 맑아진 느낌이다. 다시는 바다를 볼 수 없을 것 같던 답답함도 하나의 기우였다. 이제는 오빠의 주검도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신앙을 되찾지 못하고 간 오빠의 영혼 소재지를 물으며 더 이상 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건 신의 재량에 맡기고,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라던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본다. 어쩌면 ‘내 뺨의 얼룩’을 지우는 이 해풍 속에도 오빠의 숨결이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갯내음이 희미하고 세모래가 조금은 실망을 준다 해도 바다는 역시 바다였다.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청청함과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넉넉함이 있었다. 여전히 함께 해 줘야 할 파도가 있고, 그 속에 오빠의 숨결이 살아있는 한 이 산타 모니카 비치도 내가 사랑해야할 바다요 마음의 고향임을 안다. 파도도 이런 내 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 “쏴아-” 하고 열 두 폭 푸른 치마 너울대며 달려와 내 발등을 적신다.(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