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도 가을을 타는가. 오늘 따라 목청을 돋우고 애달피 운다. 귀뚜라미 높이 울고 달도 더 밝은 이런 밤이면, 내 마음도 날개를 달고 태평양을 날아간다. 소리 없이 내려선 고향집엔 밤 깊어 기척이 없고 우물가 감나무만 수우우 잎을 흔들며 아는 체 한다. 잎이 온통 하늘을 뒤덮는 감나무 밑에 열 살짜리 내가 서 있다. 족히 백 살은 된 듯 커 보이는 감나무. 그때도 우물가 감나무는 계절마다 가진 것을 내보이며 자꾸만 나를 우물가로 불러 세웠다.
나는 봄날의 감꽃을 퍽 좋아했다. 싱싱하게 이슬 머금은 연미색 감꽃은 좋은 먹거리였고, 친구랑 목걸이를 만들어 놀기에는 멋진 장난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을의 감나무를 더 기다렸다. 장독엔 독마다 물이 가득하고, 손바닥이 발갛도록 ‘사구’에다 빡빡 문질러 씻어놓은 보리쌀엔 말간 물을 부어 놓았건만 나는 일거리를 찾아 다시 우물가로 달려가곤 했다. 그런 나를 두고 어른들은 어린 것이 참 부지런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속셈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어른들의 아름다운 오해였다. 나를 우물가로 불러내는 것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실상은 단감이 떨어져 있을 거라는 하나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루에 한 개 아니면 두 개 떨어져 있던 단감이 어쩌면 그리도 내 마음을 붙잡던지. 단감을 발견할 때면 세상의 행운을 다 잡은 듯 흐뭇하고 기쁨으로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가을이 깊어가고 푸르던 단감에 황금빛이 번질 때면 내 눈은 더 자주 벽시계를 향하곤 했다. 몇 번째 허탕을 치고 돌아왔어도, 내가 오는 사이에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다.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다시 우물가로 달려간다. 빈 물동이는 기본으로 들고 나선다. 우물가까지 가는 거리가 제법 멀어, 감도 못 줍고 올 때면 물이라도 길어 와야 덜 억울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감나무 주위를 몇 번이고 눈으로 훑는다. 그러나 떨어진 단감이 하나도 없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자꾸만 감나무를 올려다본다. 그러다 나는 가끔 옆집 친구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레박질을 한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바람은 잠잠하고 감은 떨어질 생각이 없는데도 꼭 떨어져줄 것만 같은 예감. 정말, 발길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제 나는 감나무를 아예 잊기로 했다. 그러면 시간까지 잊혀져 기다리는 마음도 옅어질 거라 생각됐다. 그러나 단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거려진다. 시침은 분침이 되고, 분침은 초침이 되어 내 가슴을 계속 콕콕 찌르는 것이다. ‘이제는’ 하며 일어서는 내 마음엔 굳은 확신이 선다. 나는 단발머리를 날리며 우물가로 바람같이 달려간다.
아, 그때 떨어져 있던 단감 한 알!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의 선물이었다. 싱싱한 단감을 옷에 쓱쓱 문질러 한 입 베어 물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기대감이 어긋나지 않았을 때의 희열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는 그때 배웠다. 이렇듯, 나는 실망하고, 기대하고, 다시 충족되는 가을의 수레바퀴를 감나무와 함께 뒹굴었다. 어쩌면 나와 감나무는 사랑 놀음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내밀한 기쁨을 오래도록 혼자 지녔다.
살아오는 동안, 황금빛 어른대던 푸른 단감 한 알은 내게 감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때로는 실망을 주고 더러는 희열감을 주던 푸른 단감 한 알. 그것은 타자와 맺는 특별한 교감이요,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 느낌은 훗날 손수건 놀이할 때도 있었고, 우체통을 열어볼 때도 있었다. 친한 친구는 내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잊지 않고 내 등 뒤에 손수건을 놓아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나를 스쳐가 다른 친구 등 뒤에 놓는 경우도 있었다. 우체통을 열어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뻐 화들짝 놀랄 때도 있었고 실망할 때도 있었다. 사랑놀이도 마찬가지였다. 함박꽃 웃음을 줄 때도 있었고, 달빛 긴 그림자를 끌며 가던 뒷모습이 눈물을 머금게 할 때도 있었다.
여러 번 가을이 다녀가면서 계절은 감나무만 스쳐간 게 아니다. 나의 얼굴에도 세월은 흔적을 남기며 스쳐갔다. 연미색 감꽃 같던 봄날의 소녀가 이제는 가을 여자를 지나 겨울 초입에 들어섰다. 이 나이 쯤 되면, 한두 번 생에 절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에게도 한줄기 빛조차 들지 않던 긴 날들이 있었다. 이제 앞으로 또 몇 개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야할 지 알 수 없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시인은 타이른다. 하지만, 그 시인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고 살기에는 인생이 그리 녹녹치 않았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먼 옛날로 돌아가 우물가 감나무 밑을 서성였다. 고향이 있고, 우물이 있고, 그 곁에 한 그루 감나무가 있어 내 가슴 훈훈했던 그때처럼 어디선가 단감 하나 툭 떨어져 줬으면 싶었다. 까치밥으로 남겨둔다는 꼭대기 감마저, 신이 나를 위해 남겨둔 마지막 행운의 단감이 아닌가 싶어 종종 눈독을 들였다. 어린 날 감나무와 사랑 놀음을 했던 나는, 다시 인생과 사랑 놀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조바심치다가 다시 기대하며 텀블링 인생을 구르고 있는 자신을 본다.
오늘도 나는 고단한 삶의 우물에 두레박을 드리운다. 맑은 샘물이 찰랑대는 희망의 두레박이 올라올 지, 구멍이 숭숭 뚫려 물이 다 새버린 빈 두레박이 올라올 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눈길은 여전히 서치라이트가 되어 감나무 밑을 훑고 있다. 단감을 찾지 못해 발길을 떼지 못하던 것이 ‘미련’이란 것도 알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희망’이란 예쁜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오늘밤 귀뚜라미는 가을이 온다고 이토록 울음 우는 것일까, 가을이 간다고 저토록 울어 새는 것일까. 나의 가슴에 또 한 번의 가을은 오고, 단감 한 알 화두로 던져준 채 또 하나의 가을이 깊어만 간다. (1996년도 10월 초고. 2008년도 12월 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