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는 초등 학교 일학년 때  쓰기 시작한 '그림 일기'가 최초였다. 담임 선생님의 숙제였는지, 교육열 높은 어머니의 강압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고 몇 줄의 문장을 써서 마감하는 '그림 일기'는 단 하루도 빠지고 않고 써야 하는 의무조항이었다.
   다음 해, 이학년에 올라가자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오숙자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오숙자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나와 첫 부임지로 온 탓인지, 우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다.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고 글읽기를 강조하셨다.
   나는 선생님 자체가 좋아, 그 분이 담당하는 특별 활동 문예반에 바로 조인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문예반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그 분은 누가 뭐래도 내 글쓰기 커리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선생님이 유명한 여류 수필가라는 것은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수백 명이 모인 영남 여성 백일장에서 우린 용케도 서로를 알아보고 감격에 겨웠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교에서도 계속 문예반 활동을 하고 대학 가서도 학보사 기자를 하며 글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작가가 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당연히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 와서, 문화부 기자 활동을 하면서도 수필가가 되겠다는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서적에 들려 책을 뒤적이던 중에 수필 한 편을 만나게 되었다. 아니, 이럴 수가! 그 순간, 짜르르 하고 온 몸에 전류가  흘렀다.
   '도대체, 이 잡기같은 수필 한 편이 이토록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가!' 싶어 몸이 떨렸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수필의 작가도, 작품명도, 내용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치, 내가 신기루를 봤거나 환상에 빠졌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냥 '수필의 맛'에 취해 어쩔 줄 몰랐다.

   그때가 이민 온 지, 십 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연히 수필 전문지를 파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수필이란 열병에 빠진 나는 바로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했다. 수필 공부 좀 해야 겠다고. 수필 전문 잡지 몇 권만 샘플로 구해 달라고. 그 분은 평소 나를 아껴주던 분이라, 아예 문공부에 등록된 모든 수필 전문지를 구해서 보내 주셨다. 정기구독 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신청해 주겠다는 편지와 함께.
   모두 열 두 권의 책이었다. 몇 날 며칠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밤샘하다시피 탐독했다. 문제는, 제 각기 특성이 있고 배울 게 있어 버릴 게 없었다. 난, 모든 책을 다 정기구독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은, 이러다 수필가 한 명 나오겠다는 농을 하며, 내 돈을 물리치고 모든 책을 다 신청해 주셨다. 

   행복, 행복... 책 읽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제 각기 사는 삶을 엿보는 즐거움이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리얼 스토리가 아닌가. 난 꾸미는 이야기를 싫어한다.아무리 소설이 재미있다해도 '지어내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면 흥미를 잃어 버린다.
   수필은 그 수필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직접 만날 수 있고, 주인공이 간 장소에 나도 가 볼 수 있다. 수필 속엔 모든 '실체'가 들어 있다. 그토록 작가와 독자가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르는 수필 외에 어느 장르도 없다. 난, 수필과 순수 연애에 빠졌다.
   1995년이 되었다. 라디오 코리아에서 '정'이란 주제로 공모를 했다. 수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정'이다. 이름하여,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살아 오면서 정 주고 받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다.
나는 응모해서 입선을 했고, 그걸 계기로 시상식에서 만난 이용우씨를 통해 '글마루'와 '미주문협'을 소개 받았다.
   이제 나는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비교문학 교수요 시인인 고원 교수에게 본격적 문학수업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논하고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문우들을 만났다. 밤 열 시, 수업이 끝나도 우린 헤어질 줄 몰랐다.
   이차 프리 토킹 장소는 웨스턴에 있는 '파이퍼스 레스토랑.' 스무 네 시간 오픈하는 우리들의 아방궁. 우리는 서둘러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는 잠시 '망각'된다. 하지만, 신데렐라도 아니건만 우린 밤 열 두 시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섰다. 물주가 있는 날은 예외로 노래방에 가서 '딱' 한 시 반까지 놀고 일어섰다. 그때의 명입담가는 김동찬과 이용우. 즐겁고도 또 즐거웠던 시간.  우리는 그때 호기롭고 젊었었다.
   글마루에 들어간 지 육개월만에 난 준비도 없이 '수필가'란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글마루 수업 육개월만에 <문학 세계>를 통해 입적하고, 2년 뒤 <수필과 비평>을 통해 정식 수필가로 등단을 했다.
   애숭이 작가로 이름표를 달게 되자, 열심히 써야 한다는 책무도 뒤따랐다. 나는 더욱 수필 공부에 매진했다. 마침, 본격적으로 수필 공부를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기에 한국 김태길 교수에게 국제 전화를 넣었다.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분에게 직접 사사 받고 싶어서였다.

   그 분은 마침 <계간 수필> 발간으로 좀 바쁠 때라며 윤모촌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윤모촌 선생님은 이국에서도 수필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우리가 가상했는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2주간 쓴 원고를  모아 보내면, 눈병을 앓고 있던 선생님께서는 11 바이 14 용지로 크게 카피하시어 붉은 언더라인을 수없이 그어 설명과 함께 보내 주셨다. 가끔, 고전적인  200자 원고지에 친필 편지도 적어 보내 주셨다. 그 분의 수필 사랑, 사람 사랑, 겸손됨을 배운 건 덤으로 얻은 보너스였다.

   그러던 중, 나는 <미주문학>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수필 한 편을 발견했다. 변완수 선생의 <여백의 예술>.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문장에 깊이 있는 내용. 가까이 있으면 뵙고 수필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 분은 버지니아주에 계셨다. 두 달을 망설인 끝에, 좋은 작품 읽게 해 주셔서 고마웠다는 전화를 올렸다.

   꼬장꼬장한 그 분 목소리와 글에 대한 엄격한 생각은 이 시대 마지막 선비를 연상케 했다. 옷깃을 여며야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근접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다음날, 같은 작품집에 실렸던 <대지의 조각가>란 내 수필을 읽으신 후, 정식으로 문우로 받아 주시겠다는 전화를 주셨다.

   턱없이 황송한 말씀이라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후, 선생님께서는 소장하고 있는 책도 보내 주시고 좋은 작가들을 많이 소개해 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이태준의 <무서록>도 알게 되었고  박문하의 <잃어버린 동화>도 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지금도 허명을 얻기 위해 글을 쓰거나, 공부하지 않는 문인에 대해서는 매서운 죽비를 내려치신다. 한문도 우리 글이라며 꼭 공부할  것을 권하시고, 제자리 걸음하고 있는 내 작품에 대한 고민을 여쭈면 읽는 책 선택이 잘못될 수도 있다며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충고해 주시곤 한다. 사실, 등단은 초등 학생이 자기 가슴에 이름표 하나 다는 것일 뿐, 공부는 끝없이 해야하는 도정이다.

   이렇듯, 나는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아 책읽기와 함께 수필을 열심히 써 왔다. 사람에 대해서, 사물에 대해서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들의 벗이요 그들 삶의 증인이었다. 그들과 나의 삶은 과일에 과즙이 스미듯 육화했고 발효되었다. 그들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눈물이 되어 주었다.

   수필 쓰기의 즐거움을 나는 만끽했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 혼자만의 놀이라도 외롭지 않았다. 갈갈이 찢겨진 마음 위에 아침 햇살이 얹히고 바람 한줄기 팜트리를  훑고 가면 부서지던 금빛 햇살!정말 눈물겨운 아름다움이 아닌가. 수필가의 애정어린 시선이 아니면 무심히 지나갈 그 모든 것이 내게 와 조약돌처럼 조잘대니 난들 어쩌랴. 수필 쓰기란 이렇듯 나에겐 힐링이요, 누군가에게 보내는 연서였다.
   두 살 짜리 딸아이 손을 잡고 건너온 태평양. 글을 쓰면서부터 태평양과 산타 모니카 바다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사색의 보고가 되어 주었다. 마산, 부산, 충무....내 삶의 터전엔 늘 바다가 있었고 파도가 넘실댔다. 삼십 분만 달려가면, 고향 같은 바다 산타 모니카 비치가 날 품에 안아 주니 이 무슨 청복인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난 산타 모니카 비치로 달려간다.
   눈길 위에 삐툴삐툴한 발자욱처럼 나의 글은 여전히 부족하고 서툴다. 그러나 부족하기에 완성을 향하여 가는 즐거움이 있다. 즐거운 천로역정. 무릎으로 걸으며 피 철철 흘리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내 수필 여정은 소요학파가 거니는 한가로운 소풍길이다. 그야말로 '펀 런(Fun Run)이다. 글쓰기 '습작'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이젠 내면을 드려다 봐야 할 시간이다.

   올 1월부터 동생 부부랑 신구약 통독을 목적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기로 했다. 아침에는 <생명의 삶>이란 책을 통해 큐티를 한다. 언제까지나 흙만 다독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열매를 거두어 주님께 따올려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쓰기 재능을 내게 주시고 내 전 삶의 과정을 인도해 주신 그 분께 나도 선물을 드리고 싶다.
   산이니, 들이니, 강이니, 구름이니, 바다니 ...난 자연을 즐겼고 그 속에서 일어난 희노애락을 많이 썼다. 그리고 나는 행복했다. 공짜로 받은 이 모든 축복을 감사하며 난 주님께 올리는 첫열매로 <신앙 에세이집>을 써서 바치고 싶다. 어떻게 주님을 만났으며, 굴곡진 삶의 여울목에서 어떤 은혜로 그 물살을 감돌아 나왔는지 이제는 주님의 역사를 증거해 드리고 싶다.
   수십 년간 글을 써 오면서도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아직도 내 자신의 저서 한 권 없다. 부끄럽진 않다.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이제 살아갈 날이 적은 강 하류에 다다른 나이. 슬슬 마무리를 해야할 시간이다. 바다로 합류되기 전에, 이 작업부터 해 나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의 글쓰기 첫 열매는 아마도 주님께 올리는 <신앙 에세이집>이 될 것 같다.
   '내 비록/유명한 인명록에 끼일 순 없으나 /하느님께서 앉혀주신/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어서/ 선한 일을 해 보오.' 주님의 마지막 부르심인가. 요즘따라 자꾸만 '그대 있는 모퉁이에서 불을 밝히오'란 시가 가슴을 둥둥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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