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하임으로 이사 오자마자, 포레스트 러너스 클럽에 가입했다. 연습 장소는 부에나 팍의 Clack Park. 집에서 프리웨이로 달려 약 15분 거리다. 회원은 거의 100명에 가깝지만 나오는 사람들은 4-50명 정도다. 주 연습 시간은 토요일 오전 5시 30분과 초보자를 위한 7시 15분이다. 일요일 새벽 5시30분은 트레일을 달린단다.
  겨울 냉기가 몸을 파고 들고, 며칠 째 비가 내려 이불 속 유혹이 만만찮았다. 하지만, 오는 5월에 있을 OC 마라톤을 생각하면 마냥 빗소리의 낭만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는 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처음으로 일요 새벽 달리기 팀에 합류했다.
  평탄한 도로를 마일당 12분대로 워밍업하듯 달렸다. 3마일 정도는 그런대로 달릴 만했다. "잘 뛰십니다. 자세도 좋구요~" 아는 친구 하나 없이 앞 사람 뒷꼭지만 보고 달리는 나에게 누군가 덕담을 던졌다. 기린처럼 껑충 키가 큰 남자분이다. 비쩍 마른 사람이 몸도 가볍게 성큼성큼 잘도 뛴다. 숏다리 나는 종종뜀박질로 거리와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뛰었다.
  오늘 함께 뛰는 멤버들은 모두 풀 마라톤을 뛴 선수들이고 하프를 뛴 사람도 두 세 명 합류했다고 한다. 나는 그 두 세 명에 속한 하프 주자 중 한 명이고 연령으로는 제일 높은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달리기는 자기 관리만 잘 하면 90대도 뛸 수 있는 운동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초조하진 않다.
  많은 사람이 빠른 속도로 앞질러 갔다. 나랑 보조를 맞추어 주며 달리던 꺽다리 아저씨가 말했다. "자, 이제부터 트레일로 들어 섭니다~ 길이 울퉁불퉁하니 조심하세요~"
 아뿔사! 나는 트레일을 트랙으로 잘못 이해하고 오늘 나왔다. 육상 선수들처럼 잘 닦인 트랙을 몇 바퀴 도는 줄 알았다. 그래서 김총무란 분이 "트레일의 진수를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고 말할 때,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흙길에 언덕배기 길이라니! 발밑 챙기기 바쁘다.
  우아한 폼을 취하는 건 언감생심. 비에 젖은 질펀한 흙길은 눈을 들어 산을 보고 하늘을 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발밑에 채이는 돌부리와 빗물이 고인 진흙길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뛰어야 했다. 게다가, 가파른 언덕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 아연 실색케 했다. 엘 에이 러너스 클럽 소속으로 그리피스 팍을 뛸 때는 정말 양반이었다. 완만한 오르막 길도 언덕이라며 지레 겁을 먹던 내가 아닌가. 그야말로 엄살을 부린 셈이다.
  미안한 마음에, 독촉을 해서 꺽다리 선수를 먼저 가게 했다. 다시 혼자가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선수들은 길을 돌아가 버려 이미 보이지 않는다. 숲 속에 여러 갈래 길이 나 있어 은근히 겁이 났다. 길도 낯선데 전화기까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달려갔다.
  몇 마일이나 달려온 것일까. 꽤나 멀리 온 것 같은데 가늠할 수가 없다. 언덕을 벗어나니,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지?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힘드시죠?" 키가 작달막하고 다부지게 보이는 사람이 힘차게 달려 왔다. "어디로 가죠?" "아, 오늘은 첫날이니, 숏컷으로 갑시다! 약 7.5마일 정도 될 겁니다." 그는 내가 오늘 처음 합류한 걸 아는 모양이다. "먼저 뛰어간 저 분들도 처음엔 다 힘들어 하셨으니, 열심히 하시면 곧 따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자, 가시죠!"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몇 마일 왔죠? 힘들어서 이젠 걷고 싶어요!" 빨치산도 아니고 오르락내리락 이게 뭔가 싶다. 일요 새벽 달리기 팀에 합류한 게 슬쩍 후회가 된다. "5마일 정도 됩니다. 하지만, 트레일이라 훨씬 힘들었을 겁니다!"
   5마일? 힘이 탁 풀린다. 달리면서 내리막 쪽을 보니 도로가 보인다. '아이구, 살았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흙길을 뛰는 게 몸의 건강에 훨씬 좋습니다. 이리 오시죠!"하며 언덕 위 기찻길을 가리킨다. 기찻길 따라 뛰는 흙길은 겨우 한 사람씩 뛸 수 있는 너비다.
  피할 수도 없는 길. 슬슬 뛰면서 뒤에 따라 오는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써닌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저 채코칩니다." "채코치? 그러면 혹시 저널에 실렸던 바로 그 사람? " "저널이라뇨?" 아니, 이 사람 공지방도 안 보시나.
  며칠 전, 공지방에 올라온 감동적인 스토리를 떠올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거무티티한 얼굴에 의지가 굳게 보인다. 이 사람이 바로, 스키 사고로 다리 뼈가 으스러진 친구를 위하여 그토록 피나는 노력을 하여 마라토너로 만들어 준 사람인가! 꼭 한 번 뵙고 싶었던 분을 여기서 만나다니! 아니, 꼴찌로 뛰고 있는 나를 격려하며 몇 마일을 함께 뛰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 채코치라니! 동공이 확 열렸다.
  기찻길이 오른 쪽으로 돌아 제 갈길로 가 버리자, 우리는 왼쪽 동네 도로로 내려섰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집들도 반듯반듯하게 생겼다. "이젠 거의 다 와 가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몸을 좀 풀어 주세요. 저 사람들은 한 10마일 뛰고 올 거니까 우리가 걸어가도 얼추 시간이 맞을 겁니다." 채코치가 말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내가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어쩌면, 그렇게 뼈가 으스러져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친구를 풀 마라톤 완주자로 만드셨나요? 두 분 우정과 의지가 대단하세요. 완전, 인간 승리에요!"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이 팀은 정말 왜 이리 감동의 연속인지. 연습 첫날, 어느 동네를 지날 때 누군가 러너들을 위해 마실 물과 컵을 집 앞에 준비해 두었다. 코치 중 한 분의 집이라고 했다. 늘 그렇게 준비해 둔다고. 그 마음 씀씀이가 찡했다. 마른 목을 축이고 달리는 내내 흐뭇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첫날의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그보다 더 큰 감동적 스토리의 주인공을 가까이서 보니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정말 논픽션 감이다. 그러나 채코치는 대수롭잖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친구가 대단했죠! 본인의 의지가 없었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죠. 정말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사고였죠! 180도로 다리가 꺾이는 스키 사고로 뼈가 다 부서져 버렸으니까요. 몇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조금씩 발을 떼기 시작했죠."
  "그래도 정말 대단하세요!! 두 분 진한 우정도 대단하시구요!" 이야기의 주인공보다 내가 더 흥분한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인간 드라마가 수없이 많아요. 저도 15년 전에 건강상의 큰 위기를 겪고 나서야 마라톤을 시작했어요. 달리면서 건강도 되찾고 너무 좋으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알리는 거죠!"
  "그래요? 그런 인간 드라마를 사람들과 같이 나누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도 평소엔 너무도 건강하셨는데, 어느 날 위암 말기에 걸리자 침대에서 내려 와 한 걸음도 못 걸으시더라구요. 그때부터 전 <직립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직립의 행복?" "네! 직립의 행복요! 걷기도 뛰기도 바로 설 수 없다면 할 수 없으니까요. 가끔, 저는 앞서서 뛰어가는 제 그림자 사진을 찍기도 해요. 너무 감사해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제 그림자가 어떻게 앞서서 뛰어 주겠어요?"
  "그렇죠! 설 수만 있어도 행복인데 우린 뛸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도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 언젠가 인간 승리 스토리를 모아 책으로 엮어 보고 싶어요. 만약, 우리 팀도 그럴 기회가 있으면 제가 글 쓰고 편집해 본 경험이 있으니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거에요." "아, 저도 그런 걸 너무 좋아합니다. 우리 웹사이트에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요즘은 뜸하지만, 전엔 저도 글을 많이 올렸죠." "네. 들어가 볼 게요. 꼴찌하고 뛰어 주시고, 좋은 얘기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하며 오다 보니, 어느 새 처음 만났던 공원 입구다. 먼저 온 봉사자들이 간이 탁자를 펴고 간식을 내 놓는다. 정성스레 마련해 온 간식이 푸짐하다. 겨울의 새벽 공기는 차가우나, 커피향 향기롭고 김 나는 둥글레차의 색깔이 노란 단풍잎만큼이나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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