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를 하다, <아비정전>에 눈이 머물렀다. 책 표지와 함께 짧게 뽑아 놓은 명문장 때문이었다. 한 사람에겐 '순간'이, 다른 사람에겐 '영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굵은 밑줄을 긋고 싶었다.
 
  -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아주 긴 것이더군요.
   그이는 전에 시계를 보며 말했죠.
   이 순간부터 영원히 나를 기억하겠노라고.
   그때 전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이제 난 시계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얘기를 하죠.
   그를 잊어야 한다고.  
 
  이 말을 읽고 가벼운 한숨을 쉬는 사람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이리라. 그리고 이별도 해본 사람이리라. 사랑과 이별을 해 본 사람은 이 말을 곱씹어 읽으며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리라.
  '영원히' 나를 기억하겠다는 달콤한 약속은 귀를 간지럽히고 또 그렇게 믿었던 자신을 떠올리겠지.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늘 흙이 묻는다'던가. 아스팔트를 깔고 흙을 덮어도, 어디선가 묻혀오는 흙. 그건 내부의 흙일 수도 있고 외부의 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원으로 이어질 것 같은 사랑은 순간으로 끝나고, 순간으로 끝날 것같은 그리움은 또 영원으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친어머니로부터 버림 받고 양어머니의 양육을 받은 아비. 양어머니마저 이 남자 저 남자와의 사랑을 찾아 나비처럼 하느적대는 걸 보며 그 역시 찰나적인 사랑을 하는 바람둥이가 된다. 언젠가는 맞닥뜨릴 이별의 불안감 때문이다. 바람둥이는 어찌 보면, 비난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정 받아야할 내면의 허약자인지도 모른다.
  실상,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로 유명하다. 그리고 영화 속에 아비로 나온 장국영은 빛나는 외모와 극적인 삶의 드라마로 더욱 유명하다. 영화 속에서 아비가 날리는 명대사는 백발백중 여인의 붉은 가슴을 찌르는 큐피터의 화살이다.
 
 -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아비가 1분만 기다려 달라며 수리에게 날린 사랑의 멘트다. 훗날, 아비에게 버림 받은 수리는 독백처럼 말한다.
 
 -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한 남자를 우주로 섬긴 여인이 여린 가슴에 조각칼로 새긴 이 말. 아비는 이 말이 지닌 아픔과 그리움의 무게를  알까. 아마 꿈에도 모르리라. 왜냐하면, 그는 이미 떠나고 없으니까. 그러나 사랑했던 여인에겐 그와의 추억을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과거'가 되었으니까. 아비가, 전문 댄서이자 천진난만한 루루와 하룻밤을 지새며 날린 사랑의 멘트 제 2탄.
 
  - 오늘 밤 꿈에 날 보게 될 거요.
   
  다음날, 눈을 뜬 그녀가 장난기 있게 말한다.
 
  - 어젯밤 꿈에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말에, 뒷통수 긁적이며 물러날 아비가 아니다. 능수능란한 꾼이 아닌가.

   - 물론이지! 한 숨도 못잤을 테니.
 
  귀에다 개울처럼 속살대는 이런 말에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행복한 미소를 이팝꽃처럼 날릴 뿐. 사랑을 찾아 부나비처럼 나르고, 사랑을 만나면 영원성을 믿지 못해 찰나적인 사랑만 나누고 떠나버리는 아비. 어느 한 곳에도 마음 붙이지 못한 아비는 다시 한 번 불멸의 명대사를 남긴다.
 
  -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영화 속 아비가 말한 '발 없는 새' 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지 못하는 뭇 사람이 아니었을까. 장국영도 끝내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땅에 내려 앉았다.'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영화 같고 소설 같은 이야기가 거짓말같이 만우절날 '참말로' 일어났다. 뭇여성들을 가슴 치며 통곡하게 한 장국영은 날개를 접었지만, 영화 속 아비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오늘도 부나비처럼 날고 있으리라. 문득, 영화의 마지막 자막처럼 생떽쥐베리 말이 떠오른다.
 
  - 고독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룻밤 풋사랑이든, 만고에 길이 남을 숭고한 사랑이든 사랑은 아름답다. 대나무가 아플 때마다 한 마디씩 자라듯,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아픔이나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멀리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같다.
  젊은 시절, 나도 이별을 감내하기 힘들어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일기장에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일체가 무가치하다!" 하며 굵게 새겨두기도 했다. 젊은 날의 어리석음이요 치기였다. 한 마디로 내면의 허약자였다. 누구보다 사랑 주고 받기를 갈망하는 여인이었음에도.
  이젠 이 갈망도 색 바랜 갈색편지가 되었고, 명대사를 날려 줄 아비도 없다. 그래도 문득문득 사랑을 추억하고 꿈 꾸는 내 맘 속의 소녀 여인. 불순하다고 비난 받기에는 너무도 투명한 그녀를, 나는 보물처럼 지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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