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오래 전 내가 서울서 겪은 영락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나는 이것저것 모든 것으 로부터 쫓겨 작은 가방 하나 만을 들고 아스팔트 위를 헤매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날이 저물어 올 때쯤에는 나는 드디어 아무 데도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원래 그 거리에는 친구 들도 있고 인척도 더러 있었지만 그 때는 이미 그들이 모두 머리를 흔들 만큼 신세를 진 후였던 것입니다.
나는 별수없이 그 때만 해도 그 거리 어디에나 흔하던 무허가 여인숙을 찾아 들었습니다. 독방 이 300원, 합숙이 200원. 그런데도 제 주머니에 남은 것은 고작 500원뿐이었습니다. 내가 가방 속 에 든 일거리를 그 밤 안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돈과 바꾸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진 돈을 아껴야 하는 것이 그 때의 내 사정이었습니다.
합숙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그 밤의 잠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직 초저녁이어서 나와 합숙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은 혼자 차지하게 된 방 안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외국 수사물을 번역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어떤 대중 잡지에 근무하던 선배가 원고지 한 장에 50원 씩 사 주어서 나는 종종 위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일했을까요. 바깥이 약간 소란스럽더니 드디어 나와 합숙할 사람이 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기에 번역을 멈추고 쳐다보니 한심하게도 이제 나이 열 두셋이 될까말까 한 소년이었습니다. 이미 초가을인데도 반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 차림에, 밖으로 드러난 사지는 때와 먼지로 불결했습니다. 그가 방구석에 내려놓은 신문 뭉치는 아마도 못다 판 석간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따로 떨어져 자는 것이지만, 그런 녀석과 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야 한다는 것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내 눈길을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손발이라도 씻을 작정인 것 같았습니다. 소년이 방문을 나서자 나는 지금까지 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생각 - 전해 들은 도회지 불량 청소년들의 소행에 대한 불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비록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녀석보다는 더 많이 가졌으리라는 기분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슨 값나가는 것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계며 겨울 외투 등은 이미 두어 달 전에 전당포로 간 후였고, 입고 있는 옷가지도 상품이 되기에는 너무 낡아 있었습니다.
기껏해야 하숙비를 치르고 남은 300원과 어려움 속에서도 힘겹게 지켜온 몇 권의 책이 전부였 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들마저 불안했습니다. 나는 남은 300원을 꼬깃꼬깃 접어 속셔츠 주머니 속에 감추고, 책 몇 권은 타월을 말아 베개 대신 베었습니다.
내가 그쯤 준비를 끝냈을 때, 세수를 마친 소년이 되돌아왔습니다. 씻고 나니까 조금 전보다는 훨씬 귀염성 있고 깨꿋한 얼굴이었습니다. 녀석은 다시 일을 시작한 나에게 미안한 듯 조용한 동작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이불을 펴고 옷을 벗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줄곧 소년의 동태에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옷을 벗은 후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질 않고 주머니에서 동전이랑 백 원짜리를 모두 요 위에 쏟아 놓았습니다. 곁눈으로 보아도 천 원은 넘을 돈이었 습니다. 아마도 그 날 신문을 판 돈을 셈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일을 하면서도 이제 녀석이 그 돈을 어떻게 간수할까를 흥미있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셈을 마친 녀석은 돈을 웃옷 주머니에 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옷을 차곡차곡 개어 머리맡에 놓고는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녀석의 미련스러움이 한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인 모를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도대체 자기의 전 재산임에 분명한 돈을 저렇게 함부로 간수하는 녀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을 불렀습니다.
“이봐, 이봐”
소년은 대답 대신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돈, 그렇게 간수해도 될까?”
나는 연장자답게, 그러나 약간은 나무라는 투로 녀석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럼 엇다둬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녀석의 순진함이 측은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가 가져가면 어떡할래?”
“이 방에 나와 아저씨 외에 누가 있기에요?”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여인숙은 주인도 믿을 것이 못된다, 동숙자라 해도 한 번 내빼면 찾을 길이 없다, 따위 얘기들을 해 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녀석의 반문을 듣고 나니 더욱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한 지 얼마나 되니?”
“삼 년요. 고아원에서 나온 후 줄곧이에요”
삼 년이라! 나는 다시 말문이 막힐 뿐만 아니라 숨까지 가빠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삼 년의 거친 세파가 한 어리고 순진한 영혼을 얼마나 비뚤어지게 영악하게 만들 수 있는 지를... 나는 더 이상 녀석에게 뭐라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내 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다 아는 단어가 막히기도 하고 평범한 문장이 전혀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일을 멈추고 무엇 때문에 그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내 부끄러움 때문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나는 이미 소년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을 흔들어 깨웠습니 다.
“얘, 얘, 나는 말이다...”
내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떨리는 탓이었던지, 선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네가 의심스러워서 이 얼마 안 되는 돈을 감추고, 책은 이렇게 베개를 삼았단다...”
나는 감추었던 돈을 내보이고, 타월에 싼 책을 풀어 헤쳤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기분이 돼서 물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겠니?”
녀석은 이내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습니다. 곧 녀석의 얼굴에 지금까지 내가 본 꽃 중에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제가 아저씨를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
아아, 이 어린 놈.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의 자그마한 몸을 쓸어 안았습니다. 그 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줄기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걸 기억합니다. 그 어떤 육신의 영락보다는 내 정신의 처참한 영락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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