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토요일. 오늘은 딸의 서른 네번 째 생일이다. 회사로 꽃을 보냈다. 딸은 꽃을 받는 즉시, "너무나 예뿌네!" 하는 한글 멘트와 함께 꽃사진을 보내왔다.
해마다 딸아이 생일엔 꽃을 보내준다. 그리고 이왕이면 오랫동안 보고 즐기게 하고 싶어 난화분으로 보낸다. 딸은 꽃이 떨어질 때까지 회사 책상 앞에 두고 즐기다가, 꽃이 떨어지면 집으로 가져간다. 부엌 유리창 앞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즐긴다. 지난 봄엔 난 화분을 잘 길러 분갈이까지 한 사진을 보내왔다. 작은 선물 하나도 아끼며 즐기는 마음이 고마웠다.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선물 주고 받기를 좋아했다. 그 애가 다섯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책 편집 관계로 한국에 나가 있었다. 일이 늦어지면서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야 올 수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 애가 좋아하는 한국산 필통과 연필, 물감, 헬로 키티 제품 등을 잔뜩 사다 주었다. 딸아이는 유난히 문방구 용품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그리고 만들고 하는 걸 즐겼다.
한국에서 돌아와 첫외출을 하는 날, 블라우스를 챙겨 입는데 목 부분에 달려있던 장식용 브로치가 없어졌다. 그 블라우스는 장식용 브로치가 엑센트기 때문에 그게 없으면 허전해서 입을 수가 없다. 나는 야단법석을 떨며 찾았다.
그때, 여동생이 갑자기 생각난 듯 까르르 웃었다. "어머, 동미가 브로치 선물로 줬는데 언니 브라우스에서 뗀 건가 봐!" 하는 것이었다. 선물 포장종이에 싸서 준 건 바로 내 블라우스에 붙어있던 브로치였다.
딸아이는 이모한테 선물 줄 게 없어 그걸 떼서 줬다는 거였다. 아마 제 눈엔 그 장식용 브로치가 퍽 예뻐보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엄마 옷에 붙어있는 걸 떼어 이모한테 선물로 주다니. 하지만, 애들은 엉뚱한 짓을 해도 귀여운 법, 웃고 넘겼다.
그 다음 기억나는 선물로는 그 애가 4학년 때였다. 12월에 들어서자, 아이가 갑자기 바빠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프로젝트에 들어갔는데, 얼핏보니 베개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헌 헝겊을 속에 잔뜩 넣어 속과 겉감을 홈질로 꿰매가기 시작했다.
삼,사일이 지나자, 각기 다른 색깔 헝겊으로 알파벳을 오리더니 겉면에 한 자 한 자 테잎으로 붙여나간다. 지그재그로 나름 디자인을 하며 붙였다. 글자는 총 여덟 자 I, L, O, V, E, M ,O, M이었다.
다 끝났나 싶었는데, 글자를 한 자 한 자 바느질로 마감을 한다. 바느질이라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아이다. 그런데 아프리케수로 마감을 하지 않고 그냥 홈질로 엉성하게 해 나가고 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다. 따로 헝겊을 대어 마감을 할 때는, '홈질'이 아니라 '아프리케수'로 마감을 해야 한다. 그래야 끝마무리가 깔끔하다. 스페샬 프로젝트라면, 당연히 공을 들여 'A'를 받아야지. 나는 학교 가사 시간에 배웠던 실력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딸아이는 신기해 하더니, 서툰 솜씨로 다시 한 뜸 한 뜸 떠 나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다섯 자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곧 종강을 하고 겨울방학에 들어갈텐데 너무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M, O, M이 남아 있었다. 마감 기일에 신경이 쓰였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한 마디 했다.
- 까딱하면, 프로젝트 못 끝내겠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거 학교 프로젝트 아니야. 엄마한테 줄 크리스마스 핸드 메이드 선물이야."
-호오, 그래? 고마워. 그런데 이게 뭐지?
"으응, 엄마는 책을 많이 읽잖아. 그런데 팔꿈치 아플 것같아서 ' 엘보우 필로우 ' 만들고 있는 거야!"
- 뭐? 엘보우 필로우?
팔꿈치 베개라니! 아니, 팔꿈치 받침 방석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요, 특이한 발상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손가. 그 날도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프로젝트'를 찾았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으니 M.O.M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알고보니, 남동생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청소를 하면서 쓸 데 없는 잡동사니는 다 버렸단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남동생 한테는 아이의 프로젝트가 당연히 잡동사니로 보였으리라.
아이는 울면서 쓰레기통으로 뛰어 나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아파트 공동 쓰레기통이 나가는 날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쓰레기통을 보며 아이는 그야말로 섧게 울었다.
"난 이제 엄마한테 줄 게 없잖아, 줄 게 없잖아! 만들 시간도 없잖아! 엉엉!!"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의 어깨는 계속 들썩거렸다. 한 시간은 족히 울은 성싶다. 서러워 우는 딸아이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랴. 마음으론 벌써 받았다며, 딸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해, 딸아이는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에 제 용돈 $10을 담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오면, 미처 받지 못한 '딸의 미완성 엘보우 필로우 선물'이 생각난다. 그것은 내가 받지 못한 이 지상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 하면 흐뭇하고 마음이 따뜻해 온다.
저도 이제 엄마가 된 지금, 우리 모녀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간다. 하나밖에 없는 내 딸, 동미. 모쪼록 건강하고 하루하루 복된 삶을 이어가기를 두 손 모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