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jpg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L 시인에게 그 치유책으로 동시집 발간을 권했다. 습작 십 년 만에 시조와 동시를 합해 작품도 6백 여 편이 넘는데다가, 우울증 치료차 한국에 한 두어 달 쉬러간다니 그녀에게 이 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책은 무슨 책!”하며 펄쩍 뛰었다. 나는, 남편과 사별 후 생긴 우울증을 동화집 발간준비로 이겨낸 문우의 예까지 들어가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녀는 여전히 망설였고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 수화기 저 편의 침묵을 통해 나는 그녀의 응답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한 달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명한 사람들 글로 화려하게 치장하느니, 자기를 아는 몇몇 사람들 글을 축사삼아 받고 싶다고. 그러면서 나에게도 한 달 간 여유를 줄 테니 글을 좀 써달라고 했다. 그러마고 대답이야 했지만, 한 달이 다 되도록 나는 첫 줄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축사나 덕담을 써 본 적도 없고, 또 무언가 위로나 힘이 될 말을 줘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글이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한국으로 떠나는 그녀에게 곧 e-mail로 보내주겠다며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그러고도 이삼일이 흘러갔다. 마음이 급했다. 급한 만큼 평정을 찾아야 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방법으로 나는 곧잘 청소를 한다. 대청소를 한답시고 온갖 잡동사니를 다 끌어냈다. 침대 주변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책도 정리하고, 스크랩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달 묵은 신문지도 뒤적였다.  이 것 저 것 정리해서 버리던 중, 언젠가 내가 신문지 위에 급히 휘갈겨 써 놓은 시 한 편이 눈에 띄었다. 내용에 매료되어서인지, 출처도 원작자 이름도 미처 써 두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그 시를 보는 순간, “바로 이거야!”하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한 달 동안 낑낑대던 글의 첫 줄이 바로 잡혔다. 그 시인이야말로 내가 L 시인에게 해 주고 싶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단 석 줄의 시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첫 동시집을 내기로 결정한 L시인에게 이보다 더 큰 격려도 없을 것 같았다. 종은 울려야 하고, 노래는 불려야 하고, 사랑은 누군가에게 쥐어줘야 비로소 제 값을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빨리 전해주고 싶어 나는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종은 종이 아니다/당신이 그것을 울리기 전까지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당신이 그것을 노래할 때까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당신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기 전까지는

   - 종은 종이 아니다. 당신이 그것을 울리기 전까지는 -
   그렇다. 종은 제 스스로 울지 못한다. 당신이 타종해주지 않으면 그 역시 울 수가 없다. 울지 않는 종은 그림 속의 정물일 뿐, 종일 수 없다. 종은 종소리를 냄으로써 비로소 종이 된다. 무생물인 종을 생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오직 당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오늘 비로소 종은 당신에 의해 천 년 울음을 운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새벽 종달새처럼 귓가에 와 앉는다고.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울음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오히려 길고 나지막한 울음인 것을. 그래서 함께 울고 싶어지는 마음이 되는 것을.
  

 -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당신이 그것을 노래할 때까지는 -
   그렇다. 세상의 노래란 노래는 제 스스로 노래가 될 수 없다. 꽃이 이름을 얻듯이, 노래도 누군가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노래가 된다. 노래가 되지 못한 악보는 다만 한 장의 종이일 뿐. 모든 자연이, 사람이 그리고 사물 하나하나가 다 노래를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조약돌처럼 동그마니 눈 뜨고 있는 이유는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비로소 당신은 그들을 위한 ‘생명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안다. 서툰 목소리에 겁먹으면서도, 마음을 담아 불러준 노래란 것을.
  

-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당신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기 전까지는 -
   그렇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아니, 주고는 제게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생각나는가. 탈무드에 나오는 삼형제 이야기를 . 그리고 기억하는가. 결국 부마가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천리안 망원경을 가지고 방을 발견한 큰 형이었던가? 아니다. 그러면, 양탄자를 가지고 날아온 둘째 형이었던가? 그도 아니었다. 병든 공주에게 사과를 먹어버려, 이젠 제 손에 사과를 가지고 있지 않던 막내였다. 왕은 말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사랑은 완전히 주는 것이고, 주고 난 뒤에는 제 손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라고.  아직도 당신 손에 망원경이 남아 있고, 양탄자가 남아 있는가? 그건 당신이 나누어 줄 여분의 사랑이 있다는 얘기다.

  

   눈 여겨 보면, 사랑에 허기진 것이 비단 사람뿐이랴.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까지도 사랑에 목말라 있다. 슬픔이 시작 되고, 슬픔이 치유되는 사랑의 아이러니. 그러나 당신은 안다. 사랑만이 우리네 삶에 위안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당신은 사랑의 시를 쓰고 슬픔의 시를 쓴다. 하지만, ‘서러움/이기지 못해/아롱아롱 피는 꽃’은 되지 마시길. 세상을 향한 작은 노래가 당신 자신에게도 큰 선물이 되기를.

                                          (첫 동시집 발간에 왁자한 개구리 울음 같은 박수를 보내며.)

    e-mail을 보내고 나니, 미루던 숙제를 단번에 해치운 학생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시간상, 교정을 보낼 수 없는데도 버릇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다보니, 한 달 동안 낑낑대던 내 글의 첫 줄에 불씨를 당겨준 이 시인의 메시지는 L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문우들에게도 해당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아무리 많은 소재가 흩어져 있어도 그들을 위해 노래 불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인이 아닐 터. 그리고 썼다한들 그걸 세상에 내 보내지 않는다면 일기나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글이 부끄럽지 않고, 세상에 선보이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게다.

   고쳐 쓰고 또 고쳐 써도 ‘작품’이랄 수도 없는 글이 어디 한 둘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되면 묵은 땅을 갈아 씨를 뿌리는 농부 처럼 우리도 마음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계속 쓰다 보면, 그래도 쓸 만한 종자가 나올지 누가 아는가. 물론 태풍이 불어와 한 해 농사를 망치기도 하고, 가뭄이 연이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날이 온대도 어쩌랴. 문학의 농부가 되기로 자초한 것을. 혹 아는가. 때로는 단비가 내려 이빨 드러내 놓고 웃을 일도 있을지. 하다못해 여우비라도 내리면 하회탈 같은 웃음으로 친구랑 막걸리 한 잔 나누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내 자신에게는 선물이 되고 읽는 이에게는 위로가 되는 글. 이제 봄도 되었으니 그런 꿈의 씨, 한 번 품어봄 직하지 않는가. 종은 힘차게 쳐주고, 노래는 목청껏 불러주자. 사랑은? 까짓 것. 사랑도 듬뿍 줘 보자. 그러면 그 사랑 부메랑처럼 되돌아 와 우울증쯤이야 “저만치 물러가라!”하고 소리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분 좋은 꿈을 꾸며, 오늘도 나는 씨를 뿌리듯 한 자 한 자 파종을 한다.
   봄이 오고 메마른 가지에 망울망울 움이 돋는다. 복숭아 가지도 불긋불긋 물들었고, 매실 꽃들도 어느 새 활짝 펴 하얗게 웃고 있다. 겨울나무는 봄을 ‘기다려온’ 것이 아니라, 봄을 ‘키워오고’ 있었나 보다.   (01-31-09 미주문학 200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