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일요일 낮 12시, 시어머님과 시동생이 영면하고 있는 로즈 힐 묘지를 다녀왔다. 올해는 막내 시동생 가족과 함께 조촐하게 모였다. 어머님 돌아가신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다. 자식들을 위해 매일 두 시간씩 기도를 바쳐주신 시어머니. 청춘을 돌려다오를 구성지게 부르시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던 생전의 시어머니. 그러던 어머님이 어느 날부터 한 말 또 하고 묻고 또 물으시더니 기어이 치매에 걸리셨다.
치매는 슬픈 병이다. 한국에서 한 달음에 달려온 두 딸을 보고도 "뉘시우?" 하고 물어 울음을 터뜨리게 하는 병. 하지만,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너무나 곱고 평온했다. 어쩌면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지. 목련꽃 한 송이 똑 떨어진 듯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장의사 침대로 옮겨드릴 때도 잠깐 잠자리 봐 드린다는 생각뿐, 시체를 옮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노인이 되면 바라는 소원은 딱 한 가지, '자는 잠에 데려가 달라는 것'이란다. 어머님은 그야말로 자는 잠에 선종하셨다.
그에 비해, 어머님보다 훨씬 이른 서른 아홉의 나이에 떠난 셋째 시동생의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다. 위암으로 죽는 순간까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 아장아장 걷던 아들이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세월은 물살 센 강물에 떠내려간 고무신인가. 참 빠르게도 흘러갔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제 몫의 삶을 견뎌내야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인가 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묘지 두 기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누가 저 묘지 속에 먼저 들어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음에는 남녀노소도 없고 장유유서도 없다. 그러고 보면, 죽음이야 말로 도대체 법도를 모르는 상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신의 재량이요 특권인 것을. 묘지에 오면, 인생무상과 함께 유한한 삶도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하루 하루의 삶이 더 귀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일 년 사이에 여기저기 새 묘지가 들어섰다. 예쁘게 장식하고 꽃빛도 생생하다. 그러나 오래된 묘지는 꽃은커녕, 잔디가 엉켜 묘판 절반을 덮어버린 것도 있다. 잊혀진 사람들. 이름 그대로 망자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라던가.
여기 로즈 힐 묘지 입구 왼쪽 편엔 오래전에 잊혀진 아기묘들이 있다. 비문에 있는 삶의 햇수를 보면 이젠 다 중년이 되었을 나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방문객이 끊겼는지, 세월의 더께에 묻혀 비문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나도 고만한 또래의 아들을 가슴에 묻었기에, 흙에 묻혀 지워진 이름들을 보며 먹먹해 왔다. 곁에는, 로즈 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갖가지 색깔로 장미꽃이 만발하여 향내가 진동하건만 그게 자식 잃은 어미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랴. 이젠 묘비를 쓸며 울던 부모도 간 지 오래. 오직 바람에 불려온 낙엽만이 묘비와 함께 할 뿐, 꽃 한 송이 꽂혀있지 않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뼈를 훑고 간다. 한 쪽에서는 가슴이 무너지는데, 저 멀리 묘지 언덕엔 바람개비만 신나게 돌아가고 있다. 생전에 함박 웃음 터뜨리며 신나게 놀던 아이처럼. 라이프 이즈 서클. 계절은 오고가고 흔들리는 나무 잎새, 다시 봄날을 차비한다. 잊혀진 모든 망자를 기억하며 졸시를 바친다.
< 로즈 힐에서>
산 자도 죽은 자와 함께 가는 로즈 힐
생각은 짚을 모아 매운 연기 피운다
스치는 풍경마다 꼭 꿈만 같아 꿈만 같아
네 얼굴 언제 보며 네 목소리 다시 듣나
보랏빛 자카란타 바람결에 흩날리고
가슴엔 회한의 편편 기억 만장되어 나부낀다
눈 감고 흙 덮으면 모든 게 꿈이런가
네가 갖지 못한 오늘 너 없이 내가 살며
가끔은 네 무덤 찾아와 공원처럼 놀다 가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