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내린다. 비를  더 즐기고 싶어 우산을 펼쳐들고 산책을 나갔다. 하늘도 땅도 온통 회색빛이다. 거리는 고요하고 차분하다. 모두 비에 젖고 있다. 
  길도, 나무도 말 잘 듣는 아이 같다. 세례를 받듯 겸손되이 고개 숙인 가로등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를 보는 내 마음도 한없이 평화롭다. 
  크렌샤에서 원저까지 한 바퀴 돌았다.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아끼며 걸었다. 개 한 마리 짖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잠 들고 오직 빗소리만 제 세상을 만난 듯 주룩거린다. 
  나뭇잎 위로 방울져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자, 문득 해운대 바닷가에서 만난 카페 <겨울 바다>가 떠올랐다. 여름날 바닷가에서 소나기를 피하려고 뛰어든 곳이 뜻밖에도 <겨울 바다>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실내엔 타르의 '빗방울'이 기타 선율로 흐르고 작은 체구의 까만 원피스를 입은 마담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말을 아낀 채, 창밖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생각은 깊어지고 말문은 닫힌다.
  그 때, 비껴간 시선 너머로  창문을 타고 흘러 내리는 빗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흘러내린 빗방울에 한 방울이 겹치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형체를 허물며 함께 미끄러져 내려갔다. 
  쏴아 쏴. 창밖엔  대숲 바람 소리를 내며  계속 소나기가 쏟아지고, 창문엔 두 빗방울이 합쳐  창틈으로 사라져 갔다. 두 빗방울의 결합. 그리고 그 무게의 가중이 무슨 은유처럼 다가왔다. 나는 미국과 한국의 강폭을 가늠해야 했고, 무엇을 이루기에는 남은 시간도 턱없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 음악은 모짤트의 <미뉴엣>으로 바뀌었다. 쏴아-  쏴- 빗소리는 창문을 두드리고 여름 바닷가 파도는 <겨울 바다>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빗소리가 주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겨울 바다>라는 카페 이름이 주는 뉘앙스 때문이었을까. 조금 더 빠른 모짤트의 '미뉴엣'으로 실내 음악이 바뀌었지만, 쓸쓸함만 더해 주었다. 그 해 여름,< 겨울 바다> 카페의 추억은 소낙비와 함께 그렇게 멀어져 갔다. 
   비에 젖어 번들대는 길 위로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발은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어도 상념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그러다간, 다시 날개를 접고 깊어진다. 어제는 지나 갔고 내일은 아직 오직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산 아래 호젓이 걷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본다. 먼 길을 걸어온 100 파운드 남짓한 작은 체구의 여인. 그녀의 신발 사이즈는 파이프 앤 하프. 채 식스도 되지 않는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홀로 헤쳐오기에는 역부족인 사이즈다. 하지만, 십자가를 '버리고'가 아니라 '지고' 오라고 말씀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다. 이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나의 현실체며 실존이다. 
  내 몸 속에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다. 그리고 내 속에 절망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눈물과 웃음도 있다.  너그러움과 조급함도 공존한다. 뿐인가. 상처 주고 상처 받은 영혼도 웅크리고 있다. 동전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나. 누군가에게는 사랑 받고 누군가에게는 거부 되었겠지. 
  한 인간이 이토록 불가사의할 수 있을까. 때로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 같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찌 알랴, 하는 자조적인 노랫말도 생각난다.
  그래도 나는 내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해야 한다. 날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할 수 있겠지. 내 피는 여전히 붉고 뜨겁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언젠가는 비가 그치듯, 나의 길도 끝나리라. 황동규의 싯귀처럼, 그때 나는 내 삶의 자세를 되돌아 보겠지. 
 < 겨울 바다> 카페의 추억을 털어내며 발걸음이 빨라진다. "뚜 루루 루루루, 뚜루 루루루, 뚜 루루 루루루, 루루 루루루..." 모짤트의 미뉴엣을 허밍으로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늙으면 추억을 반추하며 산다더니, 감성의 촉수를 건드리는 이런 날엔 영락없이 나이를 들키고 만다.  어쩌랴. 아직도 달팽이 더듬이 같은 감성의 촉수가 살아 있어 이 길 저 길 옛길을 더듬고 있는 것을. 내친 김에 영어 오행시를 모티브로  < 비 오는 날은...> 이란 시 한 수를 읊어 본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은
퍽도 낭만적이지
팔은 이미
연인을 위해 열려 있고
가까이 
좀더 가까이 
두 심장은 붙으려 하네 
 
날마다
삐걱이던 사랑도
비 오는 날은
간절해지지
저 혼자 
떠돌던 구름도
사랑이 고픈 날
떠나보낸 님 
다시 불러 와
포옹을 하네 
 
님이여!
비 오는 날은
안녕이란 말 
하기 없기 
이별은
머언 먼 훗날
어느 
화창한 날에 해도
늦지 않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