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언덕길로 해서 한 바퀴 도는 6 마일 코스를 택해 뛰기 시작했다. 3 마일 지점에서 목을 축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저만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캄캄해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거리가 있어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가까이 달려갔더니 최영호씨와 임정숙씨가 있었다. 두 분은 모두 마라톤 완주 경험이 있는 고수급이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더러 오늘은 '바람'쪽으로 뛰잔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길인데 10 마일 코스다.
지난 4월 5일, 런클팀에 조인한 이후로 처음 가는 길이다. 6마일도 힘들어 헐떡이는데 10마일이라니. 누구도 청하지 않았고, 나 역시 엄두를 내 본 적이 없는 코스다. 하지만, 하프 마라톤이 13마일이라 하니, 한 두 번은 뛰어봐야 하는 길이다. 생전 처음 청해준 것도 신기하고 흔쾌히 따라나선 나도 신기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바람' 코스로 내달으기 시작했다. 두 분이 속도를 맞추어주니 뛰기가 편했다. 새벽부터 몸이 좀 가뿐하다 싶더니, 언덕보다 힘이 덜 들었다. 돌아오는 길엔 주변을 보면서 뛰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나무는 누가 말 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옷을 벗고 새 옷으로 챙겨입는다. 산들도 푸릇푸릇한 잔디를 덮고선 느긋하게 누워 있다. 부드러운 능선 위로 희부염한 새벽이 어둠을 밀어 내며 서서히 열기를 내뿜는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지만 매운 기운은 제법 빠졌다.
내 앞으로 쭉 뻗은 길이 고마웠다. 나는 달리기만 하면 된다. 굽은 길이 있으면 돌아가고 차가 따라오면 옆으로 좀 비껴 달리면 된다. 서로가 함께 가는 길. 지금, 이 시간, 말 그대로 시공간을 함께 하는 우리이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지애도 생긴다. 신발 속으로 돌 부스러기가 들어와 다시 신발을 고쳐 신는 사이, 최영호씨와 임정숙씨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걷는 것과 뛰는 것의 차이, 잠시 멈추는 것과 계속 뛰는 것과의 차이가 시간상으로는 얼마 안 나는 것같아도,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걸 본다.
"자, 빨리 갑시다. 저 정도 거리면 따라잡을 수 있어요. 한꺼번에 잡는 게 아니라 조금씩 속도를 올려가면 됩니다!" 속도를 늦추며 기다려준 최영호씨가 용기를 북돋아 준다. 힘도 안 들이고 동동거리며 뛰는데도 임정숙씨는 엄청 빨리 뛴다. 첫 하프 마라톤을 두 시간 십 칠분인가 뛰었다고 한다. 다시 한 바퀴 더 돌자는 말을 거절하고 벤치에 가서 앉았다.
'와아- 십 마일을 뛰고 왔네?' 혼자 속으로 대견해 하며 쉬고 있는데, 언덕 코스 쪽에서 김대광씨가 뛰어내려 왔다. 반가웠다. 마라톤 마니아가 부상으로 몇 달 동안 뛰지 못하다가 다시 뛰게 되니 그 감동은 오죽할까. 수영에, 달리기에, 여포창날같이 빠르고 날렵하던 어머니가 위암 말기로 눕게 되자, 한걸음 떼는 것도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 자체를 제대로 밟을 수만 있어도 고맙겠다는 생각에 눈물을 훔치곤 했다. 설 수 있는 건 선물이요, 걸을 수 있는 건 축복이며, 뛸 수 있는 건 특권이다.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대광씨가 자기도 발이 아파서 못 뛰니 천천히 1마일만 같이 뛰잔다. 반가움과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같이 1마일을 뛰었다. 뛰다 보니, 로스 펠리츠 입구까지 1.5마일을 뛰게 되었다. 김대광씨를 만나면 걷는 게 '죄악'처럼 느껴진다. "절대로 걷지 마세요. 우리가 런닝 클럽이지 워킹 클럽이 아니잖아요?" 지당하신 말씀. 그러나 이제는 정말 걷고 싶소. 물 마셔야 된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오는 1.5마일은 거의 걷다시피 했다. "네! 오늘은 13마일 다 채우신 겁니다. 훌륭하십니다!" 대광씨가 박수까지 쳐주며 흐뭇해 한다.
오늘은 내 마라톤 역사에 새 장을 연 날이다. 뜻하지 않는 초대로 이루어낸 결과다. 고맙다. 희부염했던 새벽 하늘도 붉은 열기를 뿜으며 힘찬 아침을 열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