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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의 생활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집행 날짜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담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초월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들은 먹을 것 먹고, 운동할 것 운동하고, 편지 쓸 데 편지 쓰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를 전기 침대에 눕힐 간수와 담소를 나누며 껄껄대기도 했다. 아무리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지만 저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싶어 의아했다.
   사형수들은 집행 날짜가 되면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간수를 따라 나서고, 간수 역시 수갑만 채울 뿐 몸을 칭칭 감지도 않았다. 양쪽 다 이웃집에 나들이 가는 자세다. 동료 사형수들이 창살 틈으로 손을 내밀면, 집행될 사형수는 수갑 찬 손으로 가볍게 손끝을 잡아주며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데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는 그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떤 사형수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Peace' 싸인 까지 보냈다. 누가 누구에게 평화를 주고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가노라”던 예수도 죽음 직전에는 이런 여유를 보이지 못했다. 도인이라 해야 할지, 초자연인이라 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집행 시간은 오후 여섯 시에서 여섯 시 반으로 거의 정해져 있었다. 이때쯤이면 바깥세상은 어스름 저녁이다. 가지를 떠난 작은 새도 제 보금자리를 찾아들 시간이다. 하필이면 왜 이런 아늑한 시간, 사형수는 따스한 방 대신 전기 침대 방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동구 밖에서 가물대던 어머니의 호롱불을 향해 가듯 자연스레 빨려 들어갔다.
   충격을 준 것은 미국 사형수들의 태도만이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인권을 가장 존중한다는 나라가 무슨 마음으로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형 집행 장면을 보게 하는 것일까. 범죄자에게는 이미 인권도 없단 말인가. 아무리 한 쪽만 볼 수 있는 특수 창이라 하지만, 피해자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려는 배려치고는 너무 잔인했다. 사형수가 침대에 묶여 바둥거리고 있는 동안, 피해자 가족들은 창 밖에서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형수의 죽음이 확인되자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Yes!”하고 환호했다. 아무리 철천지 원수라지만, 맨 정신으로 한 인간의 죽음을 보며 환호하다니 놀랍기만 했다. 심지어 감옥 밖에서는 미처 참관하지 못한 피해자 친척들이 리듬에 맞춰 “Hurry, Hurry!"란 노래까지 부르며 사형수의 죽음을 독촉하고 있었다. 새삼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잔인성과 이기심에 전율을 느꼈다.
   오래 전에 신성일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 속의 우리 사형수 모습은 미국의 사형수와는 너무도 딴 판이었다. “면회요!” 하는 간수의 속임에 좋아라 하고 따라 나왔다가 저승사자 새끼줄에 대책 없이 목이 매달렸다. 오른 쪽과 왼 쪽으로 나뉘어진 죽음의 길목. 거기에 이르러 느닷없이 집행장 쪽으로 등짝이 밀리면, 검은 고무신도 팽개친 채  필사의 도주를 하던 사형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그 모습이 눈에 밟혀 몇 밤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집행 날짜를 미리 알려주는 미국의 제도와 부지불식간에 잡아가는 한국의 제도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제도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가 죽을 날짜를 달력에서 하루하루 지워나가는 그들의 초조감을 생각하면 그것도 못할 짓이지 싶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놓고도 손조차 못 댄 채, 마지막 길을 빈 속으로 가는 그들. 하기사, 겉으로는 담담하고 초월한 듯 보이지만 죽음 앞에서 태연할 사람이 몇몇이나 있겠는가. 태연한 듯 보이는 사형수들의 태도는 어쩌면 자조적인 자기 화장인지도 모른다. 빈 속으로 떠나는 미국 사형수나 마지막 까지 간수에 속아 대책 없이 떠나는 우리 사형수나 죽음 앞에서 메슥거리기는 마찬 가지가 아닐까.
   앞으로 ‘피해자의 환호’ 속에 죽어 가야할 사형수가 텍사스 주에는 400명,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320명이라고 한다. 나이도 열 아홉에서부터 칠십까지 다양했다. 사형 제도가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날이 갈수록 살인 범죄가 흉악해지는데다가 무기수 한 명 당 유지비도 만만찮은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선거 때마다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사형수 중에 ‘무전유죄’로 죽어간 사람은 몇몇이며, 권력이란 이름 아래 죽어간 사람은 또 몇몇인가. 인간의 심판으로 내려지는 죄의 경중도 의심스럽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는 ‘악의의’ 처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비록 살인자라 하더라도 사형만은 피해야 한다. 물론, 살인은 대죄요 생명은 중시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사형이란 악법으로 단죄를 해야만 할까. 울면서 아들에게 독을 타 먹였던 ‘어느 사형수 어머니’와는 또 다른 법의 단죄. 그 단죄는 사랑의 처벌이 아니라, 받은 대로 갚아주는 보복의 처벌이다. 보복 심리가 팽배한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 보복을 하려면 오히려 사랑으로 멋지게 보복할 일이다.
   사랑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은 기다려주는 것이라 한다.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켜야 할 죄인’이라도 무기수로 낮추어 주고 세월에 맡겨두면 어떨까.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유리되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그 고통이야말로 중벌 중에 중벌이다. 혹 아는가. 세월과 더불어 지은 죄를 반성하고 언젠가 뜻하지 않게 큰 그릇으로 쓰일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버젓이 살고 있는 권력자와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켜야 할 악인’과의 목숨 값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삶과 죽음처럼 ‘종이 한 장의 차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집행된 사형수 명단이 화면 위로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선한 이나 악한 이나 다 자고 가는 저 구름’이란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도 신 앞에서는 다 사형수들이 아닌가. 비록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이지만, 미국의 사형수들처럼 생활의 일부분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거기에 욕심을 덧붙이자면, 채 오 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으면 한다. 그러나 “Yes!”하는 환호 소리와 “Hurry, Hurry!" 하는 노래는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 (09-23-2007 개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