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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집 키를 받아가라는 전화를 받고, LA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실버 레이크 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첫 눈에 반한 뒤, 에스크로가 끝날 때까지 두 달 동안 설레며 기다려온 집이다. 첫눈 오는 날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해도 이토록 설레지는 않을 것 같다. 산자락을 따라, 숨었다간 보이고 보였다간 숨어버리는 프리웨이도 흐르는 강물인 양 정겹다. 길이 강으로 보이니, 내가 꼭 산수화 속에 나오는 사공 같기도 하다. 힘든 고갯길에서는 더욱 힘차게 노를 저었다. '너는 나의 나룻배, 나는 너를 젓는 사공이어라.' 표절인지 창작인지 이런 싯귀가 떠오르는 것도 순전히 내 기분 탓이리라. 마른 풀 몇 포기와 큰 바위를 품고 누운 삭막한 산들도, 젖을 물리고 있는 순한 어미소 같아 미소짓게 했다. 실물과 상상이 엮어내는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달려왔더니, 한 시간 반 거리도 짧기만 하다.      

   "자, 이제 우리 집이 되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 봅시다." 호쾌한 부동산 업자 P의 말을 따라 조심스레 문을 따고 들어갔다. 무언가 발에 툭 차여 내려보니, 뜻밖에도 가루 비누와 부엌 세제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먼저 살던 주인이 두고 간 선물이라고 했다. 거품처럼 부글부글 일어나 잘 살라는 뜻이겠지. 전 주인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다음에 이사오는 사람을 위해서 이토록 선물까지 두고 갈 줄은 몰랐다. 우리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찡한 정서다. 이렇게 정 많은 분이 살고 간 집이니, 나에게도 행운을 안겨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구석구석 깨끗이 쓸고 닦아 놓은 탓인지, 마치 애완견을 건네 받은 심정이다.
   다시 봐도 너무나 마음에 든다. 탁 트인 거실과 높은 천장, 사방 좌우로 병풍처럼 펼쳐진 크고 작은 유리창, 그 너머로 꿈꾸듯 펼쳐져 있는 먼 산들...... 완전히 꿈의 소 궁전이다. P도 입이 벙실벙실한 나를 보며 한 마디 거든다. "사실, 이 집은 참 잘 사신 겁니다. 척 들어오면 마음이 탁 놓이고 푸근해지지 않습니까? 집은 이렇게 마음에 푹 안겨야 하는 겁니다. 그게 좋은 집이지요. 사시기 전에 제가 너무 떠벌리면 꼭 사시라고 'Push'하는 것 같아 말씀을 많이 드리지 않았습니다만......디자이너가 지은 집이라 인물도 보통 인물이 아니지요. 'View'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여사님이 좋아하시니 저도 참 기쁩니다, 허허허." '척' '탁' '푹' '참', 무슨 장풍을 날리듯 외자 부사를 섞어가며, P도 연신 "허허허" 하고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그치지 않는다.  
   P의 말처럼 이 집은 처음부터 마음에 '푹' 안겨들었다. 스무 개 남짓한 리스팅 중에서 P의 예심을 거친 집들을 대 여섯 채 더 보고도, 이 집이 제일 인상에 남았다. 골프장이나 강변 집은 4-5만 불 더 비싸기도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강변이 더 운치 있을 것 같아 이 집을 택했다. 골프장은 일 분 거리에 있고, 길 하나 건너 강이 있으니 뭘 더 바라랴. '언덕 위'에 있는 이 '길모퉁이 집'은 위치상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가곡과 가요 한 구절을 꿰고 있어 더욱 정감이 어린다. 노루 한 마리쯤 뛰어들 것 같고, 길모퉁이 찻집을 찾아 반가운 손님이 우산을 접으며 금방이라도 들어설 것 같은 낭만을 불러일으킨다.
   3베드룸, 2베쓰 짜리의 아담한 이층집이지만, 천장이 높고 사방 좌우 유리창이라 2100스퀘어 피트 보다 훨씬 넓게 보인다. 거실은 답답했던 마음을 일시에 날려버릴 듯 훵하니 뚫려있다. 연블루 카펫도 다시 보니, 밤색 오크 마루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은근한 멋으로 비친다. 적재적소에 초록색 타일로 엑센트를 주면서 공간분할을 한 디자이너의 안목이 크게 돋보인다. 오른 쪽에 있는 부엌과 다이닝룸과 페밀리룸은 열린 공간으로 처리되어, 동선이 짧으면서도 유기적인 흐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파이어 플레이스는 오른 쪽 귀퉁이에 따로 처리함으로써 아늑함을 더해준다.
   특히, 부엌 왼쪽에는 사방 창으로 둘러싸인 작은 티 룸이 있어, 따스한 차 한잔 감싸쥐고 먼 산을 바라보면 흐르는 구름처럼 몸도 마음도 자연 속에 풀릴 것 같다. 수채화처럼 사는 여인이 따로 있나. 알프스 산장이 아니라, 사막 속의 오아시스인 이 곳에서도 얼마든지 수채화처럼 살 수 있다. 다만, 아래층에 있는 방 두 개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리빙룸을 넓게 쓰라는 배려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어차피 우리 부부는 이층 메스터룸 하나로도 족하니 욕심 낼 일은 아닌 성싶다.  
  가만 있자, 이 아래층 두 방은 한 살림하기 딱 좋은 구조로 되어 있으니, 누구 친구라도 불러 같이 살면 어떨까. 환경으로 따져도 노후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27홀 짜리 골프 코오스에, 낚시, 승마, 테니스 코트, 사우나, 회, 전시회, 각종 파티가 줄지어 있으니 이 보다 좋은 낙원이 없다. 딱 3000 가구만 살도록 계획된 리조트 타운인 만치 번잡하지도 않고, 모두 카스텀 하우스라 강을 끼고 있는 집들이 한결 같이 예쁘다.    
   타운 안에는 교회가 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있어 때로는 왁자한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워지기도 한다. 때문에, 노인들만 살아 적막한 실버타운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오히려 아이들이 고등 학교까지 같이 다니면서 자라는 통에 서로 고향 친구가 되고, 이 실버 레이크도 고향 마을이 된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마음의 고향이 아니라, 실지로 살 비비며 향유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한국적인 '외갓집 풍경'도 가능하다. 방학 때가 되면 손자 손녀를 불러들여 강물에서 고기도 잡고 물장구치게 하면 얼마나 멋질까. 나는 일곱 살 짜리 외손녀에게 그렇게 해 줄 생각이다. 삼십 년 전, 이 리조트 타운을 건설하면서 특수 공법으로 모하비 강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물이 맑고 고기떼가 줄지어 헤엄쳐 다닌다. 첫날 여기 왔을 때, 동네 아이들이 강에 들어가 멱을 감고 노는 걸 보고, 사십 년 전 고향 강가로 되돌아간 듯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강가에서 노는 아이들'. 타고르가 봤으면 이런 제목으로 멋진 시 한 수 지어 올렸을 지도 모른다.
   "그 먼 데 가서 어찌 살라고...... " 하는 친구들의 걱정 어린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려도 좋다. 왜냐하면, 여기도 한국 사람이 70여 가구에 100명 넘게 산다. 두 달 전,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흑돼지 파티를 열어 우리도 상추쌈에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얻어먹고 왔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금방 친구가 되는 그런 동네다. 집도 한 눈에 마음에 들었지만, 선듯 이 동네로 이사오고자 결심한 것도 어찌 보면 이런 인정에 끌렸음인지도 모른다. 뭐니뭐니 해도, 인생살이 주제는 '사람'이 아니던가.
    LA에서 100마일 거리라고 하니 한 시간 반이면 올 수 있고, 교통이 혼잡해도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너 댓 시간 걸리는 라스베가스보다는 훨씬 가까운 거리다. 두 시간 반만 더 가면 라스베가스가 있고, 30분 길 안에 소금온천까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온갖 잡기(?)를 즐길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막 기후가 좋다는데, 이 모하비 사막의 맑은 공기를 무상으로 마시며 살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즐기고 누리면서 사는 웰빙 시대에 우린들 마다할까. 특히, 골프광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올 것 같다.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이층 계단으로 발길을 옮긴다.  
   천국으로 이르는 길인 양, 유연한 곡선으로 휘돌아간 오크 계단을 따라 이층에 오르면, 또 하나의 소궁전이 펼쳐진다. 들어가는 입구 문만 닫으면 아래층과 이층은 완전 별채가 된다. 여기 메스터룸도 사방 크고 작은 유리창으로 싸여 낮에는 햇님이, 밤에는 달님이 놀다가기 좋다. 시샘 없는 달님은 종종 별님도 동반하리라. 동쪽으로 난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면, 아래층에서 보던 산과는 또 다른 맛의 먼 산들이 파스텔화 풍경처럼 포근히 안겨든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봐도 좋고, 난간에 팔을 기대고 봐도 좋을 풍경들이 촉촉히 가슴에 젖어든다. 가끔 뜨거운 열풍이 불어온대도, '바람은 절대 머물지 않는다'는 진리를 안다면 대수로울 것도 없다. 오히려 지나가는 것에 목매고 살아온 날들을 부끄러워할 일이다. 어둠이 깃들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면 다시 돌아서 방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눈앞에 펼쳐지는 또 하나의 풍경. 방과 목욕탕 사이에 있는 프렌치 스타일의 유리문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열림과 닫힘의 묵상 자료를 준다. 유리문을 열고 서창 가까이 다가서면, 어느새 저녁 노을은 서녘 하늘을 물들이고 저문 강도 몸을 풀어 어둠 속에 서서히 잦아든다. 밤마다 노을을 불러들여 은밀한 정사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창마다 불이 꺼지면, 또 하나 밝혀드는 사랑의 촛불들. 불 꺼진 창안에서 일어나는 이후의 일은 역사의 비밀로 묻어두자. 다만, 이곳에서는 다툼보다 사랑의 역사가 조용히 흘러가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이 실버 레이크는 그런 믿음을 가능케 하는 곳이다. 옛사람들은 '글 읽는 소리'와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를 행복한 집의 세 요소로 꼽았다. 비록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세탁기 돌리는 소리로 대신 해도, 웃음소리만 잃지 않는다면 행복이 가득한 집이 되지 않겠는가.  
   기분 좋게 팔고, 기분 좋게 산 집, 이제는 이 꿈의 소궁전에서 사랑하며 살아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