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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더 깊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 하늘에 별이 뜨고/ 땅에 꽃이 피고/ 이웃에 문소리가 나고/ 창문에 불이 켜지고/ 하늘과 땅에 흐드러진 보석들을/ 시의 꽃바구니 속에 담아보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숭자 시인의 제2시집 ‘새벽하늘’ 서문에서) -

 

   시인 이숭자 선생이 떠나셨다. 기품있게 사시다가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으시더니 ‘산목련 이울듯’ 떠나셨다. 향년 97세.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없는 곳, 영원한 천국으로 ‘빛 따라 어둠 따라' 바람처럼 가셨다. 지금쯤 선생은, 시간의 유한성과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난 저 천국에서 시심을 불태우고 계시리라.

   선생을 마지막 만나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침상에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이 꼭 구도자 같았다.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함에 나의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그때는, 선생이 기억을 놓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때였다. 함께 간 C시인이 그 분 머리맡에 놓인 시집을 들어 한 수 낭송해 드렸다. 나는 목이 메어 읽어드리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함께 바쳐드렸다. 그리고 성호를 긋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이제까지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선생이 함께 성호를 그으려고 팔을 꿈쩍꿈쩍하는 게 아닌가. 노인성 치매로 오래전에 기억을 놓아버린 선생이 성호 긋는 걸 잊지 않으시다니! 왈칵 눈물이 났다. 실핏줄이 선연한 선생의 팔은 가볍게 떨기만 할 뿐, 끝내 선생의 이마를 짚어주지 못했다. 우리는 선생의 팔꿈치를 받들어 당신이 직접 성호를 긋도록 도와드렸다. 어쩌면 당신 손으로 그을 수 있는 마지막 성호가 아닐까 싶어 우리의 손도 함께 떨렸다. 선생은 온 마음을 모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노사제의 마지막 성찬식인들 이토록 경건할까. 나는 감히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신앙의 마침표, 아니 생의 마침표인 양 온 마음을 바쳐 긋던 성호.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호였다. 습관적으로 긋던 성호, 파리 쫓듯 재빨리 긋던 성호. 내가 수없이 그었던 성호 중에 이렇듯 경건한 마음을 담아 그은 성호는 과연 몇 번이나 될까. 나도 언젠가는 기억을 놓게 되고, 내 손이 이마를 짚어줄 기력마저 없어질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성호를 그을 수 있는 기억과 이마를 짚어줄 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여지껏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고마움이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선생의 영상이 떠올라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떠나신 선생이 그리워, 선생의 훈기가 담긴 시집들을 꺼내어 다시 읽어본다.

 

- 고국을 떠나 서른 해에/ 이미 그 땅에선/ ‘작고 시인’으로 나뉘었다는데/ 여기 죽음 없는 / 부활이 있어/ 돌멩이 같은 겨울무 하나/ 노오란 속잎 달고 나왔다/ 귀환을 반겨/ 푸른 나뭇가지마다/ 옐로우 리봉을 걸고 기다리는/ 이국 풍경은 아니라도/ 친구여/ 내 여기 살아 있소/ 돌멩이 같이 살아있소. (‘내 여기 살아있다’ 3연)

 

   시를 놓고 산 이민 생활 삼십 년. 급기야 ‘한국 여류 시인 101인집’에 선생은 작고 시인으로 분류되어 나온다. 큰 충격을 받은 선생은 '내 여기 살아있다'고 피 토하듯 시로 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살아있어도 결국 ‘작고 시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 느꼈다. 선생은 자리를 털고 분연히 일어섰다. 불후의 시집인 ‘새벽하늘’과 ‘국경의 제비’에 이어, ‘사랑의 땅’과 ‘빛 따라 어둠 따라’가 용트림을 하며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선생의 시는 마지막 둥지를 틀었던 베니스 비치의 팜츄리만큼이나 키가 높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숨 가쁜 고착은 거부했다/ 신.발 신발은/ 해 뜨면 지렛대로 날 세우고 나서고/ 해 지면 고요히 안식의 여백으로 남아/ 쪽배 하나 띄울 강물도 없는 다리 아래/ 좌우 이란성 쌍둥이 입 벌린 공간/ 일찍이 내 요람의 첫걸음발에서/ 다섯 발가락 가난처럼 한 방에 들어/ 오밀조밀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겼다/ 사랑과 미움으로/ 땀과 눈물로/오래도 왔다/ 멀리도 왔다/ 오늘 무릎뼈 사각이는 일모의 언덕에 서면/ 내 키는 어떤 징후로 0.5센치 줄어져도/ 너만은 줄곧 시퍼런 나의 20대/ 7문 반의 치수를 고수하나니/ 신.발 신발, 나의 시퍼런 수치/ 어느 날 구름 위에 띄울 내 불변의 수치여. (‘불변의 수치’) -

 

   '요람의 첫걸음발'에서 부터 친구였던 신발은 칠문 반이란 ‘불변의 수치’로 선생이 가는 마지막 길에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겨온’ 선생의 신.발. 선생이 걸어온 길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증언해줄 그 신발은 선생의 이민 50년사도 충실히 썼으리라. 팍팍한 이민 생활에 누군들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으랴. 맞지 않는 신발도 애써 제 발에 맞추어 가며 개펄같은 삶을 살아온 나날이 아니던가. 칠문 반 '불변의 수치'는 어쩌면 초심을 잃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온 마음의 수치가 아니었을까.

   선생이 직접 건네주신 작품집을 다시 읽어보니 생전의 육성이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본다’더니, 생전에는 빠트렸던 많은 말들이 의미를 가지고 행간 사이에서 되살아나온다. 언제나 성실하고 긍정적인 삶을 사셨던 선생의 시는 한마디로 ‘삶의 찬가’요 하늘에 올리는 경건한 기도였다. 한국 여류 문단사에도 한 획을 긋고, 미주 문단사에도 큰 주춧돌을 놓아주신 이숭자 메리 선생은 문단의 대선배요 신앙의 멘토다.

    이제, 육신의 옷은 벗고 떠났어도 그분의 영혼만은 맑은 시정신으로 부활하여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마지막 만나 뵈었을 때 함께 올렸던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선생도 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힘차게 성호를 그어주시리라 믿는다. (9-3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