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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보러 가자!”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언니가 뜬금없이 오리를 보러가자고 했다. ‘도심에서 웬 오리를?’ 하고 의구심이 들었지만 흥미로웠다. 뜻밖에도, 식당에서 나와 채 십 분도 되기 전에 대로 옆으로 오리떼가 보였다. 백 마리, 아니 이 삼백 마리는 족히 돼 보였다. “와우!” 나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였다.

넓은 공원에서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다니는 놈이 있는가 하면, 나무 그늘 밑에서 오수를 즐기는 놈들도 있었다. 자는 놈도 귀여웠고, 뒤뚱거리며 노는 놈도 귀여웠다. 몸체는 다 같이 작은데 어떤 놈은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에메랄드 빛깔을 띠고 있었고, 다른 놈들은 수수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에메랄드 정수리를 가진 놈은 숫놈이고 수수한 갈색 몸을 가진 놈은 암놈이라 일러주었다. 우리 집 공작도 숫놈은 화려하고 멋있는데 비하여, 암놈은 볼품 없다할 정도로 초라하다. 공작부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모양새다. 그럼에도 ‘공작부인’ 쟁탈전은 피를 튀기며 전쟁을 방불케 한다. 오리도 싸우는 듯 몇 놈은 푸드득거리며 쫓고 쫓기고 있었다.

지상엔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와 연못을 오가며 노는 오리떼들이 있고, 하늘은 푸르러 흰구름 두둥실 떠가니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였다. 배 부르고 등 따시고 언니마저 내 곁에 있으니 나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서일까. ‘이 순간도 곧 지나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드니 갑자기 슬퍼졌다. 머물고 싶은 순간이 머물 수 없는 시간이 되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것.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언젠가는 추억을 남기고 멀어져 가는 것. 이런 생각들이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언니도 말없이 푸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언니에게 동시나 하나 써 보라고 했다. 여러 수백 수를 썼으니 동시쯤이야 금방 나올 것이라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동시를 읊었다.

“들어갈 때는 푸른 하늘이/ 나올 때는 까만 하늘이었습니다.”

단 두 줄이었다. 그런데 이 짧은 두 줄의 즉흥 동시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아, 언니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역시 장녀라 그런지 엄마를 잃은 슬픔이 나보다 크고 깊은 듯했다. 장례식을 치룬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언니는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연말이 되면, 이구동성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한다. 올 4월에 어머니를 잃은 일이야말로 내게는 2012년에 있었던 가장 큰 일이었다. 언니는 올해가 아니라 일생에서 가장 큰 일이라고 고쳐 말했다. 그러나 내겐 언니가 가는 날이 까만 하늘이 될 것 같다.

어머니야 나이 드셔서 가셨고, 위암말기라 해도 한 달 남짓 고생하시다 가셨으니 위로라면 위로였다. 하지만, 언니는 우리 집안 이민사에 파이오니어로 정신적 지주다. 언니가 없었으면 우리는 30여 년 전에 날씨 좋고 기회 많은 이민의 땅 이 캘리포니아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40여 년전 간호사로 와서 그야말로 남의 피고름 짜서 번 돈으로 우리 가족을 한 사람씩 불러주었다.

나는 언니의 기분도 전환시켜줄 겸, “색깔론 동시로 깨끗하게 끝내버렸네?”하며 농담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언니는 큰 나무 같은 존재라고. 나는 그 큰 나무 그늘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어린 오리에 불과하다고. 때로는, 해의 방향에 따라 그늘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겠지만 결코 없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나무가 사라지는 날, 그늘도 사라지고 우리도 함께 사라질 거라고. 생각이 이어지자, 평소에 잊고 있었던 언니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사실, 언니가 푸른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나는 공원 잔디 사이로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나무와 그늘을 보며 언니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얼마나 울적했으면 뜬금없이 나더러 오리를 보러가자고 했을까. 지척에 있으면서도 오리공원에는 처음이라니.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바쁘고 남편은 남편대로 바쁘니 누구랑 와서 오리를 보고 이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물며 오리도 저리 모여 사는데 너나없이 뚝뚝 떨어져 외로운 섬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 서글프기도 하다.

해도 기울고 어느 덧 일어나야할 시간, 갑자기 오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줄줄이 줄을 이어 찻길 쪽으로 걸어 나온다. 차 한 대가 설 때마다 뒤뚱거리며 몰려왔다가 다시 떼를 지어 돌아서 간다. 아마도 누군가 밥을 줄까봐 기다리는 눈치였다. 벌써 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가는 게 다섯 번 째다. 그제서야 빵조각 하나 들지 않고 있는 우리의 손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정말 누가 저들에게 밥을 주고 있는가.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여러 수 백 마리를. 몇몇 오리는 멋모르고 찻길까지 내려갔다. 언니는 놀라 벌떡 일어나서는 “올라가! 올라가! 내려오면 안돼!” 하며 허수아비 참새 쫓듯이 훠이 훠이 양팔을 벌려 오리들을 올려 보냈다.

그때였다. 낡은 차 한 대가 서더니 허리가 구부정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우체부 마냥 무거운 배낭 두 개를 매고 오리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리는 굽었어도 껑충한 키에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오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홍해가 갈라지듯 양 편으로 쫙 갈라져 뒤뚱걸음으로 바쁘게 따라갔다. 백인 할머니는 연못가 옆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짐을 부려놓고 농부가 씨를 뿌리듯 모이를 흩뿌려 주었다. 360도로 빙빙 돌며 멀리 뿌려주기도 하고 어린놈들을 위해 발밑 가까이 뿌려주기도 했다. 양도 많지만 영양을 생각해서인지 모이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그녀의 손짓 하나 행동 하나에서 오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는 걸로 봐서 시청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할머니는 수 년 간 자기 돈으로 떠도는 고양이 먹이를 대 주었는데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불어나자 몇 년 뒤에는 시에서 먹이 값을 대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는 그 고양이 군단이 실비치 명물이 되었단다. 혹시 이 백인 할머니도 처음에는 어디선가 물을 보고 날아온 몇몇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새 오리식구가 불어나 이 동네 명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백인 할머니가 모이를 뿌려주는 솜씨는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이를 뿌려주면서도 계속 못 먹는 놈이 없는지 병든 놈은 없는지 세세히 관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이는 거의 70 넘은 것 같은데 어디서 저런 활력이 솟나 싶을 정도로 활기찼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우리도 집에서 각종 동물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다 관심이 갔다.

나이 듦에 구애없이 봉사하며 사는 삶이 해 저문 하늘에 핀 노을과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기를 데리고 나온 부부들은 오리를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며 행복에 겨워하고, 한 쪽에서는 젊은 애들이 개와 장난을 치며 신나게 놀고 있다. 우리도 혼자 보기 아까워 언니 집 강아지 ‘미미’를 데리고 나와 함께 어울리게 했다. 사람도 개도 이 공원의 왕자 오리들도 모두 제 세상이다. 머물고 싶은 한 순간이 노을에 밀리고 어둠에 밀려 추억 속으로 잦아든다. 가는 사람 가고 산 사람은 살듯이 어머니 가신 2012년도 마지막 달력 속에서 조용히 지고 있다. (초고 10-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