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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는 노란 민들레였을 나의 어머니. 이젠 하얀 민들레 되어 훌훌 날아가 버리셨으니.......

   

   허리 디스크 수술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을 자처한 것이 작년 이맘때이다. 일 년 동안 나는 어머니와 울고 웃으며 신혼부부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간병인이라기보다 추억의 통로를 함께 걸어 나온 동반자로서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으로 가득 찼던 노인 아파트 단칸방은 사랑의 훈기로 따스해졌다.

    처음에는 지팡이를 짚는 것조차 자존심 상해하더니, 나중에는 서둘러 챙길 정도로 지팡이와도 친숙해졌다. 채마밭에 재미를 붙이고, 보건센터에 나가서 ‘예쁜 할머니’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어머니 인생에 제2의 행복기가 온 듯싶었다. 어머니가 정성껏 가꾸시는 양란도 흰꽃 자주꽃 색색별로 앞 다투어 피워주고 어항에서는 금붕어 세 마리가 용궁인 양 놀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랴. 위암 말기라니. 그것도 간까지 전이되어 수술조차 불가하다니. 주치의조차 소화불량으로 알고 소화제만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통증을 이기지 못해 찾아간 전문의는 사진 판독 결과 위암말기라며 마치 일기예보처럼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듣는 우리 역시 ‘아, 오늘 날씨가 그렇구나.’하듯 표정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병원 문을 나서자 발걸음이 풀렸다. 내심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어머니도 “갈 때는 이름 하나 받고 간다더니.......”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세상의 봄날은 어머니로부터 사라졌다. 어머니의 봄날은 여든 셋 거기까지였다. 흐려진 눈빛 사이로 화사한 남가주의 봄날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포도를 굴리며 힘차게 달리는 차량조차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식다동하고 그토록 운동도 열심히 해 오신 어머니, 일일일선을 모토로 매사에 긍정적이고 명랑쾌활하게 사시는 어머니. 왜? 왜? 왜? 수없는 물음표가 어둔 밤하늘에 별이 돋듯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찍혔다.

    하지만 어쩌랴. 기어이 ‘그 날’은 오고 말았으니. 병은 죄의 결과도, 벌의 대가도 아니라 하지 않는가. 신의 계획이라니 우린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몇 걸음 발을 옮기자 몸의 이동과 함께 생각에도 변화가 왔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사의 처방과 식이요법, 신앙적 무장으로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 것 세 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숙제 잘 해오는 모범생’으로 그 날 그 날 열심히 살자는 원칙이 정해지자 다시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절대로 혼자 맞게 하진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어머닌 암에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특히 생생한 체험기로 연일 텔레비전이다 신문이다 떠드는 H 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전화를 해보니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더욱이 그 약은 점차 줄여갈 뿐 평생 먹어줘야 한다고 했다. 나도 효과야 어쨌든, 한번만이라도 드시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반대했다. 마음이 약해져 경제적 개념이 희박해진 암환자들을 악용한 상술인데다가 효용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만큼 좋은 제품이고 암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주는데 보람을 느낀다면 한 달에 몇 천불씩 받을 게 아니라 부담 없이 꾸준히 먹을 수 있도록 가격조정을 해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우리는 영지버섯과 상황버섯을 사고 요일별로 먹을 영양죽 재료도 샀다. 수술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늘 수술도 항암치료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해오신 터라 식이요법에 의지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하지만, 식이요법과 정신무장만으로 위암과 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리는 의사선생님의 최후 처방에 따라 항암주사를 맞으면서 경과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암주사를 맞으며 투병하는 사람들도 누구 하나 휠체어를 타고 오는 사람 없이 모두 멀쩡해 보였다. “그냥 당뇨병 환자처럼 주사 맞으면서 암과 평생 동행한다고 생각하세요” 하는 외래 환자들의 말에 어머니도 고무되신 듯했다. 그러나 1차 주사를 맞고 원기 왕성해진 어머니는 채마밭에서 상추를 심고 고추 모종도 하며 찬바람을 마신 게 화근이 되었는지 그만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주사 맞은 지 3, 4일이 되면 약간의 부작용이 생긴다더니 어머니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오고 말았다.

    결국 어머니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나도 어머니 침대 옆에 자리를 깔았다. 담당 간호사가 있다 해도 시시각각 목이 타오고 혀가 말려오는 폐렴 환자한테는 가족이 꼭 붙어있어야 한다. 더욱이 영어도 못하는 할머니임에랴. 위암도 위암이지만, 폐렴은 병 쓰나미로 환자의 가슴을 초토화 시켜버리는 무서운 병이다. 나중엔 숨쉬기조차 힘들어진다.

    어머니는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하신 채 먼 길을 떠나셨다. 밭에 물주는 일 하며 붕어 밥 주는 일 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그토록 애착을 갖던 어머니였지만, 당신 스스로는 더 살게 해달라는 기도 한번 하지 않으신 채 떠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이승에서의 숙제를 차근차근 풀고 가신 어머니. 수의 선택에서부터 장례식 방법까지 마음을 열고 함께 의논해주신 어머니가 새삼 고맙다. 육남매 중에 하필이면 둘째딸인 내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곁을 지킬 수 있었던 일도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이젠 내게도 어머니가 없다. 내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이 세상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걸 절감하며 살아가리라. 언니는 어머니 수의에 마지막 동정을 달며 평생 울 것 다 울었고, 나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며 앞으로 울 것까지 다 울어버렸다. 이제 우리들의 숙제는 남은 삶을 기쁘게 사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봄날은 여든 셋으로 멈추어 버렸지만 내게 있어 어머니의 봄날은 끝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봄과 함께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다.    (초고;04-25-12/ 완성;07-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