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저녁엔 막내 여동생이 사는 풀러톤에 나들이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

웹 디벨로퍼인 제부한테 컴퓨터도 배우고, 일주일간의 생활보고와 비즈니스 혹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앙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우유부단한 나는 진취적이고 매사에 분명한 동생을 만나면 결단력이 생기고 힘을 얻게 된다.

사람은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리더형과 그의 협조자인 참모형이다.

소심증 A형인 나는 늘 참모형을 자청한다.

나는 즐겨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대가 꽃이라면, 난 그대를 받쳐주는 꽃받침이지요."

이건 시도 아니고, 수필의 한 문장도 아니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말하는 진실된 언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큰 꽃에 가려 비록 보이지 않는 꽃받침이라도 나는 마냥  행복하다.

잎이나 줄기면 또 어떤가.

나를 알고, 내 역할에 충실하고, 그것을 즐기면 그 뿐.

오늘 새벽, 동생과 제부랑 새벽 기도를 다녀왔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개신교 골수파 신앙인인 동생을 따라 새벽 기도를 가는 것이다.

그게 무슨 대수랴.

내 신앙의 시발은 교회였고, 내 신앙의 성장 텃밭도 교회다.

불교 집안의 사람과 결혼해서 6년간의 거리감을 두긴 했지만, 난 늘 주일학교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지니고 있다.

꺾이는 인생의 길목에서, 메리놀 회 노동사목 신부와 함께 일을 하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뿐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에, 이는 분명 '주님의 계획하심'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앙은 주님과 나의 독대로 일 대 일의 직접적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런 연유로, 성직자의 인간적 결함이나 교회 운영의 행정적 미숙함 때문에 주님에 대한 내 믿음이 뿌리째 흔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늘따라, 주님을 향하는 내 새벽 발걸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은 한없이 행복하다.

    "주여!"

    "주여!!"

    "주여!!!"

설교에 이어 "주여!"를 세 번 외치고 일제히 통성 기도를 시작한다.

        첫 번째 외침은 "주여! 들으소서!",

       두 번째 외침은 "주여! 용서하소서!",

       세 번째 외침은 "주여! 속히 행하소서!"라는 뜻이라고 동생이 설명해 준다.

다니엘서 919절에 근거한 말씀이란다.

뜻은 좋고 바램은 간절하지만, 몇 번을 가도 난 아직 거기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조용히 침묵 속에 주님을 만나고, 한 두 마디 속삭이듯 간구하고, 다시 긴 묵상에 들어갈 뿐이다.

소리치지 않고 부르짖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 해 주실까, 하는 믿음 때문이랄까.

아니면, 신앙에서만은 야단스럽지 못한 내 수줍은 성격 탓일까.

하지만, 난 분명히 믿는 무엇이 있다.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머리카락까지 헤고 계시는 하느님이 내 심중을 모르고 계실까 보냐, 하고 생각하는 거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기분이 상쾌하다.

언젠가부터 신앙의 기쁨을 잃어 허전했는데, 오늘은 내적 기쁨이 차오른다.

"교회가 참 평화롭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간증이다.

아마도 내 마음이 평화롭겠지.

언젠가, 배운 것 없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깡패들이 모처럼 큰 맘 먹고 붙였다는 표어가 생각난다.

아마 그 중에서도 '큰 행님'이 붙였겠지.

'차카게 살자!'

맞춤법 틀리게 쓴 '차카게'가 왜 그리 정겨운지.

얼마나 순진한 표현인가.

그 벽보 표어를 볼 때만큼은 깡패도 천진무구한 소년으로 돌아가 엄마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었겠지.

그래, 나도 중한 결심이나 한 듯 마음 벽에 오늘의 표어를 붙여본다.

'차카게 살자!'

혼자 미소 짓는다.

오늘 하루만은 누군가를 향한 섭섭함이나 원망, 그리고 불만의 볼멘소리 없이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늘을 이고 조용히 서 있는 쟈카란타 가로수가 아름답다.

가슴에, 온천지에 보랏빛 꽃물이 든다.

파스텔 톤 평화다. (06-0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