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족한 언어로 [2019 한경 신춘문예 당선작] 

박하림

 

  엄마는 내게 부러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엄마, 친구들이 나더러 자기 이름도 못 쓰는 바보래.” 어느 소설에도 써먹었던 대사는 허구의 문장이 아니라 유치원에서 돌아온 내가 실제로 엄마에게 건넨 말이었다. 엄마는 넌 바보가 아니라며 날 다독였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내 이름을 쓰는 법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엄마, ‘바보’는 어떻게 쓰는 거야?” 태어나 처음 쓴 단어는 내 이름 석 자가 아닌 ‘바보’였다.

  물론 그날의 이야기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엄마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내가 한 질문도, 그 질문에 담겨 있던 마음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웃으며 옛 추억을 얘기하는 엄마의 표정만 보자면 아주 어릴 적의 나는, 혹은 글을 몰랐을 때의 나는, 이름도 못 쓰는 바보라고 놀림당해도 울지도 괘념치도 않는 아이였던 듯했다. 글을 알고 난 후의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초등학생 때 바닷가 마을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울 아이들은 사투리를 쓰는 내 말투를 가지고 놀렸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이 틀렸다는 지적과 비웃음을 내 책상에서, 교실 앞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음악실에서도 몇 번씩 들어야 했다. 부모님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처럼 ‘친구들이 내가 하는 말이 틀렸대’라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을뿐더러, 넌 틀리지 않았다는 부모님의 대답에 아무렇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였다. 엄마가 갑작스레 이모가 있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막 이민을 한 우리는 이모네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때껏 본 집 중에 가장 넓었던 그곳에서 우리 네 가족은 방 한 칸을 빌려 지냈다. 정사각형 모양의 방에는 창문이 없는 대신 문이 두 개 달려 있었다. 거실 화장실로 통하는 문과 사촌 오빠와 언니의 방과도 이어진 복도로 통하는 문이었다. 난 첫 번째 문을 주로 사용했다. 오후 네 시 이후에는 저녁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네 시엔 사촌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언니는 내게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되어 거실 창밖으로 사촌 언니가 차를 몰고 오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내게 방으로 들어가라 일러줬다. 방에서는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곤 했다. 독서가 단순히 재미있어서도 아니었고 다른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사촌 언니 오빠가 한국어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쓰는 이름을 쓰고 그 나라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만 대화하던 두 사람은 한국어가 서툴렀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위안이었다.

 

  이모네 식구와 우리 식구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촌 언니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에 관한 얘기를 했다. “쟤네들이 우리 집 방 한 칸에서 얹혀살아.” 언니가 스페인어로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보다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언니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내가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나나 내 옆의 동생이 바로 앞에서 무슨 말을 한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기는 언니의 당당하고도 당연한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청바지를 엄마가 잘못 세탁했다며 따지던 사촌 오빠의 말이나.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나도 죽고 싶어요”라며 흐느끼던 엄마의 말이나. 저 뚱뚱하고 못생긴 애가 너처럼 생겼다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아이와 날 가리키던 사촌 언니의 말이나. 누군가 내게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다. 내겐 말이 그랬다. 말이 늘수록 상처가 늘었다.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서야 아빠가 내게 물었다. 우리끼리만 사는 게 좋겠냐고. 여기 이 방보다 훨씬 좁은 집이어도 괜찮겠냐고. 나는 일 년 전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생이 되었을 땐 스페인어를 제법 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없었지만, 어눌한 억양에 또 한 번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은 내가 욕을 할 때 가장 크게 웃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말투가 아닌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 가짜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화가 치밀어도 욕을 함부로 뱉지 못했다. 나보다 성적이 낮은 아이는 많았지만 나보다 장학금이 적은 아이는 거의 없었다. 언젠가 아빠와 함께 행정실을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물었다. 외국인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직원의 설명이 변명처럼 돌아왔다. 나는 옆에서 나와 직원 사이의 대화를 번역해 주길 기다리는 아빠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Extranjero. 엑스뜨랑헤로. 외국인. 이방인. 넌 이방인이니 우리보다 우리말을 못하는 게 당연해. 나는 그 당연함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나라가, 그곳의 사람들이 미워 스페인어를 더 공부했다. 사촌 언니와 오빠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언어는 가장 갖고 싶고, 잘 다루고 싶은 무기였다. 그 무기로 내가 상처 입은 만큼 남을 상처 입히고 싶었다. 그때부터 국어 수업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애썼다. 점수로 일등을 차지하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너넨 ‘우리말’이라는 게 없잖아. 다른 나라 언어를 빌려 쓰고 있는 주제에.” 날 괴롭히던 한 남자아이를 비웃으며 그런 말을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한 사람만을 향해 한 말은 아니었다. 교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 그리고 교실 저 너머에 있을 그 나라의 모든 사람이 들었으면 하고 지껄인 말이었다. 내 말에 아이는 조용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그 말을 한 걸 아직도 후회한다.

 

  그러다 시끌벅적했던 중학교 졸업식 날 소중한 친구에게서 손편지 한 통을 받았다. 친구는 우리나라를, 네가 머물다 가는 모든 곳을 사랑해달라고 내게 썼다. 누가 보기엔 별것 아닐지도 모를 그 편지의 내용이 나를 늘 들끓게 하던 화를 꺼트렸다.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어 내린 몇 마디의 문장은 어쩌면 내가 그때껏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친구와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간 난 그 편지에 관한 글을 썼고 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내 글에 공감한다는 말을 건넸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난 반짝이던 시상식이 아니라 시상식장을 나서며 올려다본 밤하늘을 두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아빠에게 전했을 때, 아빠는 한숨을 쉬었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아빠는 말로, 그리고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엄마는 침묵으로 날 무너뜨렸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되고 쓸모없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글을 쓰겠다는 거냐.” 네 언어는 부족하다는 그 모진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아팠다. 그것은 꼭 내가 여태 받은 상처 또한 부족하다는 말 같았다.

 결국 나는 아빠가 바라던 경영대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일 년을 채우지 못한 채 자퇴서를 냈다. 다른 대학교에 입학신청서를 냈지만, 번번이 불합격을 받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내게 한 말이 자꾸 생각났다. 네 선택은 틀렸어. 분명 후회할 거야. 그렇게 점점 움츠러드는 몸을 이끌고 밖을 나선 어느 날, 우연히 한 작가분이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 관한 공지를 보고 괜히 마음이 끌려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수업은 어느 주택을 개조한 작은 서점의 다락방에서 열렸다. 우리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각자 단편을 쓰고 그것을 함께 나눴다. 난생처음 쓴 내 단편을 모두와 읽었을 때, 부족하다는 감상만 받게 되는 건 아닐까 하던 내 걱정과는 달리 멋진 글이라는 칭찬을 연이어 받았다. 수업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한 여학생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준 글은 처음이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말을 곱씹었다. 글을 써줘서 고맙다는 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지독하고 아픈 글을 쓸까요.” 몇 번의 수업을 함께한 작가님이 내게 말했다. 글을 써줘서 고맙다는 말만큼이나 날 울고 싶게 하는 말이었다. 종종 묻곤 한다. 내가 쓴 글엔 내가 얼마나 들어 있는 걸까. 나의 전부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대체 뭘까. 그저 상처인 걸까. “우습지만, 그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꼭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사람이 내게 들려준 대답이었다. 나의 영혼이 스며든 글. 내 언어는 늘 부족했고 나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상처가 나의 전부는 아니듯이 이 글 또한 나의 일부를 담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싶어 한 나의 마음은 진짜였다. 그러니 그 어떤 언어로 쓰였든, 틀리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선 통보를 받고 ​"수필은 가장 나다운 장르…내 글에 책임지는 작가 될 것"

엄마는 최근에야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법을 배우셨다. 지구 반대편에서 엄마가 내게 보낸 문자는 늘 이곳 시간으로 이른 새벽에 도착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엄마의 글을 읽었다.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문장을 끊어 읽는 동안엔 매번 숨이 가쁘고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빠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나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우셨다던 아빠를 상상하며, 아빠가 내게 ‘포기해라’ 말했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언젠가 그걸 보여드릴 날이 올지 모르겠다.​무슨 언어를 쓰든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글을 썼다. 웃으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울면서 시작한 게 글쓰기였기에, 눈물이 말라버리면 내 글쓰기도 끝이 날까봐 두려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내 글을 읽고 싶다는 이들이 있기에 괜찮다. 앞으로 글을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기에 괜찮다. “엄마, 아빠. 나는 결코 당신들의 딸로 태어나 자란 걸 불행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내게 이렇게 많은 언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꿈은 여전히 작아진 적 없이 늘 그대로였습니다.” 내 글을 발견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나는 나만의 언어로 계속 글을 쓰려 한다.

 

박하림 씨는 △1989년 전남 순천 출생

△싱가포르국립대·호주국립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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