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줄기가 말 잔등이처럼 축 처진 자리를 바래너미라고 한다.
올라가 보면 평평한 억새밭인데, 그 중간쯤 늙은 고욤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고욤나무 아래는 펑퍼짐한 너럭바위가 엎드려있고 그 옆에 가랑잎이 가득 가라앉은 옹달샘이 있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집터였다고 하는데 집이 있던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정황으로 보아 집터가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다. 한 때 이 산정에서 이루어진 산바람 같이 초연한 삶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고욤나무가 증명해주는 듯했다.
첫눈이 올 때면 가끔 그 늙은 고욤나무가 눈에 밟힌다. 사십오 년 전 거두어 줄 사람도 없는 고욤을 잔뜩 열고 산등성이 억새 밭 가운데 홀로 서서 첫눈 발에 묻히던 고욤나무가 지금도 외로움을 타지 않고 침착하게 그 산등성이에 그렇게 서 있는지 궁금하다.

윗버들미 사람들은 갈 일이 끝나면 다람쥐 도토리 물어 나르듯 부지런히 나무를 해 나른다. 섣달 그믐까지 집 안에 나무 짐이 가득 쌓여야 정월 한 달 맘 놓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장정들은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나무를 해 지고 예닐곱 번은 쉬어야 돌아올 수 있는 먼 나무길이지만 거기 가야 관솔 배긴 소나무 삭정이나, 마른 싸리나무 같은 불때기 편하고 화력 좋은 나무를 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동매 떠서 사람들 눈에 뜨이는 삽짝 안에 자랑하듯 배겨놓았다. 그걸 동네사람들은 정월 나무라고 했다. 그 나무로 섣달 그믐께 가래떡살도 찌고, 조청도 고고, 두부도 하고, 적도 부쳤다. 정월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적의(適宜)의 화력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도 여인들의 정월 달 부엌간을 안락하게 해주려는 남정네들의 배려이기도 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삼동의 추운 부엌간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높은 화력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여인네들의 편리한 일상인 것이다. 정월나무라는 말뜻은 남정네들이 자기 아내의 안락한 정월을 위한 선의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느낌이 든다.

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집은 굴뚝을 보면 안다. 파란 연기가 조용히 오르면 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것이고, 굴뚝에서 짚동 같이 검은 연기가 오르면 청솔가지나 물거리(생나무)를 때는 것인데, 굴뚝의 연기가 그 지경으로 나와 가지고는 내외간에 금실 좋기는 꿩 새 운 집이다. 왜냐하면 굴뚝에 그 지경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려면 모깃불 피우는 것처럼 컴컴한 아궁이의 주저앉는 불길을 세우려고 아낙네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아궁이에 얼굴을 들여대고 ‘빌어먹을 놈의 화상-. 빌어먹을 놈의 화상-.’ 하며 불을 불어야 한다. 그래서 정월나무가 삽짝 안에 그득하면, 집이야 비록 오두막일망정 벼 백이나 하는 고대광실(高臺廣室) 못지않게 행복해 보였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더 바랄 것 없던 소박한 시대 우리 고향 윗버들미에서는 그랬다.

우리는 정월나무를 삽짝 안에 싸놓고 살아보지는 못했다. 내 할머니와 어머니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정월을 지낸 셈이다. 아버지는 읍내 출입이나 하시며 사셨고 농사는 할머니가 머슴을 데리고 지으셨는데 머슴은 한해 농사가 끝나면 새경을 받아 가지고 저의 집으로 갔다가 정월을 넘기고 왔다. 그러니 정월 나무를 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나무를 사서 때는 형편으로 정월나무를 싸놓고 때기는커녕 늘 나무에 쪼들려 살았다. 할머니는 그 정월 나무를 삽짝 안에 가뜩 싸놓고 정월을 맞이하는 것이 원이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해 겨울, 나는 할머니의 원을 풀어드리기로 작심하고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 갔다. 아무도 그리 멀리 나무를 안 가는 날 혼자서 갔다. 눈이 올 듯 착 찌부러진 날이었다. 그런 날은 장정들도 나무를 하러 멀리 가지 않고 사랑방 군불 나무로 가까운 산기슭의 풀숲을 접어왔다. 생일(육체노동)이 몸에 배지도 않은 처지에 눈이 올 듯한 날 혼자 그리 멀리 나무를 하러 가는 건 모험이랄 수 있다. 할머니를 위해서 모험을 하고 싶었다.
나무꾼들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 간 까닭은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느냐’고 질시를 하며 나를 품앗이에도 안 끼워주는 사람들의 폐를 끼치기 싫은 오기도 있었지만 그보다, 필경 까치둥지 같은 나무 짐을 지고 칠전팔기를 거듭하며 용렬스럽게 돌아올 나무 길을 보이기 창피한 때문이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짓을 결행한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바래너미에 올라가 보았는데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펑퍼짐한 산등성이의 마른 억새밭이 전혀 적적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억새밭 가운데 고욤을 잔뜩 열고 서있는 늙은 고욤나무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욤나무는 바람 센 산등성이의 힘든 삶의 환경 때문인지 헌출하지는 못해도 가지를 많이 뻗고 가지에 고욤을 잔뜩 열고 있는 모습이 이 서방, 박 서방처럼 가난한 동네 사람 같이 탄탄해 보였다. 삶이 고단하다고 불만 할 줄도 모르고, 부자 되려고 아등바등 욕심부릴 줄도 모르고, 그저 그날이 그날같이 부지런할 줄밖에 모르는 순해 터진, 동네 사람 중에 한 사람처럼 반갑기 그지없었다.
지게를 고욤나무 아래 벗어 놓고 너럭바위에 앉아서 고욤나무에 등을 기댔다. 융성하게 고욤을 연 가지 끝으로 산등성이가 흐린 하늘 아래 주절주절 펼쳐져 있었다.

소백산맥은 이마 위에 떠있고, 그의 지맥인 높고 낮은 산등성이들은 눈높이거나 눈 아래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바래너미 산등성이는 낮아지면서 남쪽으로 뻗어갔는데 끝은 안 보이고 그 앞쪽을 가로막고 소백산맥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래너미 산등성이에서 가지를 친 작은 산등성이들이 버들미 골짜기를 향해 서쪽으로 뻗어 내리다 도랑 앞에서 멈춰 섰다.
모든 산줄기는 물길을 가로막지 않고, 물길은 산줄기를 피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처녑 같은 골짜기에 초가집과 다랑논과 뙈기밭들과 무덤들이 다소곳이 안겨서 소르르 겨울잠에 들어있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고만고만한 경계구획의 저 작은 경작지들의 다툼 없는 유순함이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순리와 잘 어울렸다. 나도 저 모습같이 살리라. 울컥 감정이 복받쳤다.
숲에 들어가서 까치둥지만 하게 삭정이 나무를 해지고 고욤나무 아래까지 오는데도 나무 짐을 서너 번은 메어쳤다. 나무 짐이 쿨렁쿨렁하게 골아서 지게꼬리를 다시 졸라맸다. 나무 짐은 장정 나무 짐의 반도 안 되었다.

고욤나무 아래 나무 짐을 받쳐놓고 너럭바위에 앉았다. 이미 해는 척 기울고 나는 손끝 까닥할 힘도 없이 탈진한 상태였다. 산 아래 우리 집이 조그마하게 바라보였다. 나무 짐을 저 집 삽짝 안에까지 져다 백여 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너럭바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욤들이 조롱조롱한 눈망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서 나를 먹고 힘내’ 그러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고욤나무로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고욤을 따 먹었다.

나는 별미를 들라면 겨울 고욤나무에 반쯤 마른 채 달려있는 고욤 맛을 들겠다. 이미 수분은 다 증발하고 과당(果糖)만 남아있는 작은 열매의 달디단 과육(果肉)의 맛, 그 맛을 혹 건포도에다 비하는 상상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 말이지만, 건포도 맛과 겨울 고욤나무에 달린 고욤 맛은 사탕과 엿의 차이 같은 것으로 당도로는 따질 수 없는 맛의 정서 차이가 존재한다. 원래 고욤은 털어서 단지에 담아두었다가 눈이 깊이 쌓인 겨울밤에 사발로 떠다가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다. 펑펑 눈 쌓이는 밤에 먹는 그 고욤 맛을 경험한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의 몇 프로쯤이나 될까. 누가 알랴. 탈진한 나무꾼이 따먹은 겨울산정의 고욤나무에 매달린 채 건과가 된 고욤 맛을…. 그 맛을 아는 사람은 국회의원 숫자보다도 적을지 모른다. 아니 국회의원은 모르는 맛일지 모른다. 나 한 사람만 아는 맛일지 모른다. 나는 그 고욤 맛을 아는 게 마치 ‘대통령도 몰라, 국회의원도 몰라’ 그러는 한국적 맛의 기능보유자 같은 자부심을 느낀다.
얼마쯤 과당을 섭취하고 나자 멀고 작게 바라보이던 우리 집이, 마치 명사수가 보는 과녁같이 크게 보였다. 나무에서 나려와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내 눈앞에 때아닌 흰나비가 날아들었다. 소담한 흰 눈송이가 산등성이 가득히 날랐다. 마침내 하늘 가득히 날랐다. 고욤나무가 눈발에 가뭇하게 묻히면서 내가 떠나는데도 홀로 침착하게 서있었다.

사십오 년 전이다. 첫눈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고개를 들면 하늘이 착 가라앉은 산등성이의 늙은 고욤나무가 어제인 듯 선연하게 보인다. 무모한 젊은이의 위기를 모면케 해준, 당도 높은 고욤을 가득 달고 침착하게 첫눈 속에 묻히던 고욤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할머니도 보인다. 까치둥지 같은 나무 한 짐이 삽짝 안에 배겨있는 걸 가지고 우리 손자가 해온 바래너미 나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시던 할머니가 보인다. 그 소박하기 짝이 없는 할머니의 행복이 보인다.

* 목성균 선생님 2004년 6월 27일 영면
* 작품집
* 명태에 관한 추억(문예진흥원 2003년 우수도서/하서출판)
* 생명(유고수필집-수필과비평)
* 작품출처 http://www.sd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