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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필 장르의 허구성

단군 조선의 건국 신화는 문학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옛날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신화는 소설의 원형이며 이와 함께 시도 발달해 나갔다.
시는 아마도 샤머니즘과 함께 무가의 형태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많다. 신라시대 월명사의 <도솔가>와 <제망매가>도 모두 주술성을 전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와 소설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수필은 구비문학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 설화나 전설 같은 구전과정도 없었고, 민요나 시조처럼 노래로 불리던 시기도 없었다. 수필은 필시 문자문학으로서 그만큼 발달 시기가 늦다.
물론 문자 발명 이후로만 잡더라도 그 역사는 길지만 그래도 수필은 여전히 문예창작으로서의 독자적 형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수필은 문학 장르로서 그리고 예술로서 지닐 수 있는 독자적 형식에 대한 이론적 정리를 필요로 한다.
수필은 오랫동안 다른 장르에 비해서 서자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다행히 70년대부터는 수필가와 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 양적 증대가 질적 발전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대한 시행착오의 오류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필 장르에 대한 분명한 개념 정립이 없는 상태에서 문학성을 높이기 위한 의욕만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타 장르의 기법을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허구적 기법의 남용으로 수필이 그 독자적 장르의 특성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예가 적지 않게 나타난 것이다.

2. 피천득 수필의 허구성의 의문

이런 문제 발생 원인의 가능성은 피천득의 수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필은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다’.
물론 이것은 창작의 기교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말고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뜻으로 쓴 것이겠지만 이것은 수필의 개념을 말하는 직접적인 설명문으로도 읽히기 때문에 심각한 오해가 생길 위험이 있다. 문학적 기교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수필만의 조건도 아니므로 더욱 그렇다.
사실로 수필에 대한 이런 개념 설명은 피천득이 처음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늘 있어 왔다. 수필은 특별한 기교가 없어도 저절로 붓 가는 대로 쓰면 그만 이라는 인식은 보편적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써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의식하며 발전해 온 다른 장르만큼은 문학적 기교의 탁마와 그 고민의 부담이 없었다는 것도 그 같은 ‘ 붓 나가는 대로’의 안이한 작법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필은 누에의 입에서 나온 액이 고치가 되듯 저절로 써져야 한다고 말한 피천득의 수필들도 그와 반대로 의도적인 기교의 자취가 많다.
한국 수필 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윤오영도 피천득의 <장미>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수필이다. 그의 간결하고 섬세한 솜씨를 알 수 있다. 슬픈 사람에게도 외로운 사람에게도 기쁜 사람에게도 장미를 주어보는 마음. 그러나 어딘가, 실감이 절실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Y,C,K의 각 사건이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의 계속인 까닭이다. 문맥의 긴밀한 연결이 못된다.
- 윤오영, 《수필문학입문》(관동출판사)

이것은 피천득의 이 수필이 ‘ 붓 나가는 대로 써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이란 평가가 나왔다. 작자가 장미를 다섯도 여섯도 아니고 스물도 아니고 흔히 좋은 숫자로 알려진 럭키 세븐이고, 그것을 둘씩 또는 셋씩 남에게 주고난 후 자기에게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그렇게 장미줄 사람이 순서적으로 세 사람이나 나타난다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우연의 연속이며, 그런 우연은 누에의 입에서 나온 액이 저절로 고치가 되듯 수필이 저절로 써졌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작위적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것은 피천득 자신이 수필을 저절로 붓 나가는 대로 쓰는 수필가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들이 실제와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허구가 된다.
교과서를 통해서 <수필> 이라는 수필 등으로 우리 국민의 수필 교육에 가장 많이 미쳤을 작자가 “수필은 저절로 써져야 한다”고 말하고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의 작법을 썼을 뿐만 아니라 수필은 허구가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쓴 것으로 짐작된다.

3. 갈 곳 없는 수필 장르

그런데 피천득의 수필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이 윤오영이나 필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수필가들도 피천득의 수필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갖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수필은 그렇게 써도 된다고 아주 수필 개념을 바꿔 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피천득은 수필이 허구가 되어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다. 윤오영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적어도 70년대의 수필 전성기 시작 직전 까지는 수필에서 허구성을 주장한 경우를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처럼 수필에서 허구성을 허용한다는 것은 필자가 본 바로는 7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한 돌발적인 이변이며 수필의 반란이다. 피천득의 수필에서 나타나는바 다분히 가짜로 꾸며낸 듯한 허구성을 지금은 거리낌 없이 쓰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것이 후배 수필가들에게 매우 많은 영향력을 미친 사람의 실제 작법을 그대로 따른 결과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런 한국적 이변이 지금 우리 수필계에 대한 타인들의 인식에 미치는 부작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 수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필 고유의 미감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허구의 도입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삶의 진실을 보다 진솔하게 규명하기 위해서 어떠한 기교와 기법의 도입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수필가들 중에는 표현의 차이들은 있지만 이렇게 주장하고 많은 후배들을 가르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주장이 원칙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기법도 그것을 적용하는 데는 그에 적절한 방법이 따로 있다.
모든 사람은 멋을 내기 위해서 무슨 옷을 입든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니며, 어떤 기교의 도입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원칙론이다. 그리고 누구도 상관해서는 안 되는 것 역시 원칙이니까 누구라도 마음대로 하면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처럼 보이고 싶더라도 여학교 강의실에 들어가는 남자 교수가 배꼽 티에 치미 입고 하이힐 신고 루즈 바르고 속눈썹 붙이고 멋을 낼 수는 없다.
남자는 남자의 것, 교수는 교수의 멋을 내는 독자적 특성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들이 그렇게 하면 정말 예쁜 여자로 보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전환 외과수술을 해도 콧수염이 나는 남자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라는 신체적 특성에 맞는 미의 기교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정쩡한 성전환 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고 만다. 수필이 수필의 본래적 구조를 무시하고 소설의 기법을 따르면 그처럼 소설도 수필도 아닌 기괴한 글이 된다. 구청의 호적계가 남자냐 여자냐를 물으며 애를 먹어야 하듯 문단에서는 그들을 어느 장르에 붙여서 문인 명단을 만들어야 할지 난처해질 것이다.
수필이 허구성을 도입하면 바로 이런 것이 된다. 치마가 여자의 것이고 루즈가 여자용 화장품이듯 허구는 소설의 기법이기 때문이다.
허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며 독자는 그렇게 실제적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것을 알고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이처럼 허구가 본질이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노벨이나 스토리보다는 픽션이란 용어를 더 많이 쓴다. 즉 장르의 명칭이 시와 허구와 수필과 평론 등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필이 허구를 사용한다면 수필은 어디로 가나? 수필은 증발해 버리고 소설만 남는 것이 아닌가? 소설이 되어 버렸다면 장르 명칭을 바꿔야 한다. 만일 바꾸지 않으면 매우 불미스러운 사태가 된다. 거짓으로 꾸몄는데도 독자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만 당하는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작자의 인격적 도덕적 문제가 된다. 문필 활동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이에 대해서 놀라운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수필이 그런 허구로 쓴다는 것은 대개들 알고 있으니 문제될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필이 그렇게 거짓으로 꾸며 쓰는 문학이라는 주장이 공감을 얻는 경우는 없다. 수필에서 “나는 그날 그 친구가 살인하는 것을 봤다”고 썼으면 그것은 본인이 허구라고 따로 밝혀 놓지 않는 한 어디서나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들도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일부 수필가들이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허구를 사용한다면 독자들은 그 작품에서누구의 수필은 실제적 사실이고, 누구의 것은 어디까지가 가짜이고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한 우리나라의 문학사에서 수필이 제대로 문학으로 평가받기는 어렵다. 결국은 한쪽에서 격상시켜 온 우리 수필문학에 대한 평가를 다른 한쪽에서는 무너뜨리고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수필의 예술성 - 손광성의 <달팽이>의 경우

허구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다. 상상은 문학의 필수조건이다. 문학은 상상력의 힘을 빌려서 언어(문자)로 쓰여진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작법의 기본 자체가 상상이므로 그것만으로도 예술의 기본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수필은 사실의 세계가 기본이며 이를 함부로 배반할 수 없으므로 운명적으로 비문학적 비예술적 장애조건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이런 조건이 타 장르와 다른 수필의 특성인 이상 이 개성의 바탕 위에서 수필 고유의 예술의 집을 지어야 하며, 그것을 수필의 전형으로 삼아 나가야 한다. 즉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인 이상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예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손광성의 <달팽이>다.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이렇게 시작되는 <달팽이>의 서두 부분은 달팽이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나타내고 있다. 움직이는 달팽이의 여러 모습을 빈틈없이 묘사해 나가고 있는 과학적 사실적 관찰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만들어내야만 되는 기록이 아니라 실제적 관찰로만 가능한 것이므로 실제적 사실의 세계로서의 수필의 기본조건에 철저하다.
그러나 그 같은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과학논문과 본질적으로 다른 서정성이 있다. 달팽이에 대한 따뜻한 동정이다. “속 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고 한 것은 날카로운 관찰력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그 같은 사랑과 깊은 이해가 있으며 이것은 비유법에 의한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있다.
다음에는 달팽이의 고향이 바다였다는 서술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육지에 사는 달팽이의 목과 눈은 물달팽이의 그것보다 훨씬 가늘고 길다. 슬픔도 내림이라,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상들의 슬픔으로부터그들은 자유스러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실향민의 후예, 달팽이는 늘 외로움을 탄다(중략)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전체 중에서 지극히 적은 부분만 옮겼으므로 설명에는 무리가 있지만(달팽이)는 이렇게 마무리 되어 있다. 그리고 관찰자 이외의 사람 하나가 나오지만 이것은 이 마지막 한두 줄에만 나오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는 달팽이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달팽이는 우리 인간의 험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사회적 약자를 연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이 글에서는 달팽이와 사회적 약자인 한 가엾은 인간이라는 양자간의 유추 현상이 성립된다. 작자는 외형적으로는 달팽이만 말했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힘없고 외로운 인간을 상상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암시를 통해서 문학이 지향해 나가야 할 지극히 소중한 휴머니즘의 주제를 짙게 깔아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달팽이는 사회적 약자라는 불특정한 인간만이 아니다. 달팽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작자 자신이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혼자 울고 있는 키 작은 남자는 누구일까? 말미의 한 남자의 모습은 울고 싶어도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는 달팽이의 가엾은 모습과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달팽이는 작자 자신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작자는 처음부터 달팽이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투명한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서 유리벽에 반사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없고 외롭고 슬픈 달팽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앞에서 인용한 “고향을 잃어버린 달팽이” “실향민의 후예”라는 것도 북쪽의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으로서의 작자 자신을 유추해 나가게 되는 중요한 키워드였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수필의 세계가 고수해야 할 실제적 사실성을 전체적으로 유지해 나가면서 이것을 類推해 낼 수 있는 상징적 세계로서 달팽이를 옮겨온 것이다.
이런 기법은 허구성 자체로 시작되고 끝나는 소설에 비해서 다음과 같이 더욱 예술성을 높이게 된다.
모든 문학은 한 마디의 말과 구와 절과 문장의 바른 해석이 따라야 하고, 전체 주제 파악이 있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소설이나 수필에 비해서 <달팽이>의 경우는 작자의 창의적 상상력만큼 독자도 많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달팽이만 보지 말고 그 뒤에 가려진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뒤쳐진 약자들 그리고 더 나가서 그곳에 서서 울고 있는 한 남자, 즉 작자 자신을 보며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A B
달팽이 사회적 약자, 혹은 작자 자신

이렇게 이 수필은 A와 B의 두 가지가 서로 대칭적 유추 장치를 형성하고 있으며, 달팽이는 표면상징, 작자 자신이나 사회적 약자는 이면상징적 구조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작자는 A를 통해서 B를 나타내며 독자는 상상에 의해서만 A에서 B를 유추해낼 수 있다. 즉 우리는 A를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이 같은 상상에 의한 의미의 전달과 이해의 과정이 왜 필요할까?
가장 빠르고 정확한 표현은 직접적 설명이다. 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산문은 이런 형테를 따른다.
그렇지만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 얼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래서 기술적 표현 수단이 필요하다. 만일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설명적인 글은 때때로 지겹고 짜증이 날 때가 많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독자도 작자와 함께 작품을 완성시켜 나간다면 더욱 좋다.
독자가 스스로의 상상력에 의해서 작품세계를 그려 나가고 의미를 발견해 나갈 때의 감동은 작자가 직접 설명으로 전해 준 경우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즉 달팽이의 사실적 묘사를 따라가다가 그 뒤에 숨겨진 달팽이를 닮은 우리 인간 사회의 어두운 그늘의 의미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땅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비슷한 기쁨을 주게 된다. 사실 이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 달팽이의 소리도 없는 처절한 울부짖음이 바로 실향민으로 살아온 작자 자신의 외로운 모습임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은 매우 크다. 다른 어떤 표현방법도 이 이상 감동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가스똥 바슐라르가 《이미지의 현상학》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을 내린 것으로도 설명을 대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가 연구하던 ‘이미지의 현상학’에 대하여 그것은 “혼의 울림, 즉 미적 감동을 추적하는 일 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상상력에 의해서 원형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의 감동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달팽이라는 작은 생물체가 이 수필 속의 화자 자신의 원형적 이미지라면 달팽이를 보면서 그것이 바로 그 뒤에 가려진 작자의 모습임을 발견하는 놀라움은 이 같은 미적 감동을 의미한다. 다만 바슐라르가 주로 물. 불. 흙. 공기 같은 사물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논해 간 것과 달리 <달팽이>의 경우는 한 인간의 외로움. 힘겨움. 좌절감, 그런 삶의 이야기, 그리고 실향민을 만든 분단 현실의 역사적 배경 등 어떤 것이든 이미지로 대치될 수 있는 문학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런 표현 기법에 의해서 상상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수필만의 고유한 예술적 기법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의 허구성이나 시의 압축적 언어와 달리 이것은 상상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그 내면에서 또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 연상으로 병행시켜 나가는 형태이며, 이는 오직 수필만이 가능한 특수한 상상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예술성은 물론 다양한 복합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은 상징에 의한 유추현상으로 만들어지는 상상력의 기법이다. 그것이 이 <달팽이> 같은 수작에 다같이 이르지 못한다 해도 그 기법은 수필이 다른 문학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장르의 우월성을 확보해 나가게 할 것이다.
수사법에서 ‘유추’는 A라는 상징을 통해서 그와 비슷한 B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상상의 사고 형태’를 말한다. 이 때 우리는 작자가 B를 A에 ‘비유(견줌)’했으므로 그 표현법은 ‘비유법’이 된다. 그리고 물론 이런 비유법에 의해서 유추의 상상적 사고가 가능해지려면 A와 B 사이의 유사성이 필수조건이다. 달팽이와 작자의 운명적 삶의 형태가 유사하듯, 그리고 이 수필은 비유법 중에 은유법에 해당된다. 사실로 유리벽 밖에 서 있는 남자가 작자이며 달팽이가 바로 그 삶이라는 것은 독자인 나의 상상일 뿐 실체는 숨겨져 있으니까.
그러므로 이 수필은 직유의 형태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은 은유보다 작법은 쉬어지더라도 상상의 세계가 지닐 수 있는 매력은 다소 감소 될 것이다.

5. 문학의 언어는 상상의 언어(상징)이다.

나는 해방 다음해이던 중 3년 때 <딱따구리>라는 작문을 쓴 일이 있다. 중학생 작문이니 수준은 논외로 하고 내용만 말한다면, 이것은 딱따구리의 관찰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한 두 줄 내 얘기를 붙인 것이다. 딱따구리는 단단한 나무껍질을 두드리고 구멍을 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벌레를 가늘고 긴 혀로 찾아내서 먹는다. 이 새는 이런 방법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신체 구조마저 그에 알맞도록 그런 모양으로 변형 발달 시켜 나갔으리라는 것을 나는 써 나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 했다.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 성장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저 새처럼 나도 자신을 그에 알맞게 변형시켜 나가야 되는 것일까? 필요하면 아무한테나 고개도 숙이고, 그렇지만 저 새는 그렇게 자신을 변형시켰어도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그럴 수 있을까?”
60년 전의 작문이니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나는 이와 비슷하게 끝맺은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교지에 실리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이 때의 칭찬 때문에 신이 나서 내가 문인의 길로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에 미술 반장을 비롯한 상급생들한테 몰매를 맞았었다. 경례를 안 붙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크게 당했다. 결국 그들에게 경례를 붙여야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의 고민이 딱따구리 모습을 통해서 내 작문이 된 셈이다.
나는 그들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는 대신 미술반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림 대신 독서에 기울이면서 문학 지망생으로 변신했다.
이 때의 내 작문은 나를 직접 새에 비유했기 때문에 직유법이 된다.
내가 만일 60년 전의 이 작문 기억을 되짚어 가며 재생시킨다면 이를 은유의 형태로 바꿀 수도 있다. ‘나’를 딱따구리 이면에 가리고 암시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제 70이 넘었으니 내가 그 때 바라던 대로 여전히 초록빛의 예쁜 새로 남아 있는 지 아니면 얼마나 추한 새로 변했는지를 고백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중간에 다른 삽화 하나쯤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하다가 투옥되고 해직되고 출옥 후 다시 에세이집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판매 배포 금지되어서 할 수 없이 그림으로 먹고 살았다. 살기 위한 변신이다. 그리고 6년 후 정권이 바뀌자 나는 다시 문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고 과거로 재변신했다. 60년 전에 미술에서 문학으로 바뀐 것과 거꾸로 된 것이다. 딱따구리에 지지 않을 만큼 나도 자꾸 변신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일수록 너무 가까운 자기고백이 되기 때문에 은유법이 더욱 가치가 있다. 수필은 이처럼 실제적 자기 고백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미화나 동정 구하기가 되어서 자칫 품위를 잃기 쉽다. 피천득이 <장미>에서 돈 주고 산 소중한 장미를 만나는 사람에게 세 차례에 걸쳐서 다 주어 버려서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한 송이도 없었다는 얘기는 아름답고 재미는 있지만, 자기 미화의 결과가 되기 때문에 글의 품위를 잃기 쉽다. 그러므로 수필은 더 많이 상상의 은유법에 의한 암시가 필요하다.
<달팽이>도 만일 그런 상징물의 등장 없이 직접적 자기 고백 형태로 바뀐다면 글은 넋두리의 구질구질함에 빠질 위험이 크다.
문학은 상상의 세계다. 그 세계는 비유의 형태를 통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넓어지고 심화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런 상상의 세계로서의 상징을 찾아내어 비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나는 < 이 겨울의 날개>에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었다가 날개가 다 부서진 채 죽어버린 나비 얘기를 썼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이 나비는 내가 70년대에 출옥 후 좌절감에 빠져 있던 시절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상징이었다. 또 사슴벌레를 통해서 우리의 분단 현실을 말한 일도 있다. 두 마리에게 전쟁을 시켰더니 막무가내로 싸움을 하지 않다가 오히려 싸움을 시킨 내 손가락(강대국)을 물어버린 얘기다.
문학에서 비유는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유추해 낼 수 있는 다른 상징적 사물이나 사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문학의 언어다.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런 상징적 언어를 찾는 작업일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상상의 언어가 아닌 직접적-사전적 표현에만 충실하면 상상의 폭이 축소되어 이미 다 설명되어버린 무의미한 글이 되기 쉽다.
이 경우에 상상력은 우리들의 모든 일상적 삶 자체를 다른 무엇으로 대신 말해 줄 수 있는 힘을 발휘해 주는 것이므로 이런 언어찾기를 망설일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다른 짝을 지니고 있다. 비가 눈물의 언어이고 눈물이 비의 언어가 되듯, 하나의 쌀알이든 우주 전체든 그것은 모두 다른 사물의 상징으로서 서로 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언어로 독자에게 말하고 독자도 그런 상상의 언어에 의해서 자기 나름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며 응답하면 된다. 그리고 독자가 그런 상상의 세계를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미적 감동의 순간임을 의미한다.
이런 미적 감동의 효과를 가장 잘 입증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앞에서 소개한 <달팽이>다. 그리고 상상적 언어(상징)에 의한 은유적 유추의 세계는 꼭 이 같은 방법 이외에도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다. 그리고 은유가 아닌 날카로운 분석적. 논리적. 직접적 표현 형태도 경우에 따라서 수필의 격을 높이는 것이므로 기법은 항상 다양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상상의 세계라는 필수조건을 갖추려면 상징적 언어에 의한 비유의 기법 역시 필수이며, 따라서 이런 기법이 효과적으로 많이 쓰일수록 수필은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확보하며, 아름다운 예술의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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