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의 매화사랑

 

                       

 

퇴계 이황은 평생 매화를 사랑하여,

75제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었고,

살아생전 [매화시첩 梅花詩帖]을 편찬하였다.

이는 매화를 사랑한 북송시대의 학자 임포(林逋)를

마음 깊이 사숙하고 있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임포의 대표적인 시,  산원소매(山園小梅)

 

 모든 꽃이 떨어진 겨울에 매화만이 홀로 볕 받고 아름답게 피어서

 온갖 풍정을 독차지하며 작은 정원을 향해 서 있으니

 성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고도 얕은 물에 비치고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으스름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서리 속의 저 새는 아래로 내려오르다가 꽃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 조심스레 보고 있고

 흰 나비가 만일 이 매화꽃 핀 사실을 안다면

기막힌 향기에 놀라 혼비백산할 것이다.

 다행이도 이 몸은 가만히 시를 읊으며 매화와 서로 친해질 수 있으니

 저 세속의 돈많은 인간들의 박자치는 악기와 금술잔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퇴계 이황의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퇴계는 도산서당에 단을 쌓고 솔, 대, 매화, 국화를 심고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면서

  솔과 국화는 도연명의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해서 참가 못했는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풍상계(風霜契) :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는 다는 뜻.

 

 

퇴계와 두향(杜香) 

 

두향은 단양 사람으로 관기(官妓)였는데,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두향이 청하여 관기를 면하고 상민으로 평생을

퇴계를 사모하면서 강선대(降仙臺:지금의 충주호반)

아래 초옥(草屋)에서 수절하고 살았다.

 

두향은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하고,

매화를 기르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두향의 묘비명에도 성명은 두향. 중종조 시대의 사람이며,

단양 태생.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난과 매화를 사랑하였으며,

퇴계 이황을 사모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마치고 헤어질 때,

이별을 슬퍼하며 전별시로 지은

두향의 즉흥시는 다음과 같더라.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 드니 얼굴만 야윗고야.

    백 년을 못 사는 우리 인생

    이별만이 더욱 서러워라.

 

이에 퇴계는 두향이 입던 치마폭에

두보(杜甫)의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어라.(生別常惻惻)

 

퇴계는 68세때인 무신년 7월 선조의 소명을 받고

한성에 입도하였을 때 두향에게서 받은 매화를

직접 한양으로 가져가 이 매화를 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매형(梅兄)으로 혹은 매화의

신선(梅仙)으로도 부르며 애지중지 하였다.

 

이듬해 3월 선조의 허락을 받고 8개월간의

한양 생활을 끝내고 귀향하면서 이 매분을

고향으로 가져가지를 못해 이별하는 시를

증답가(贈答歌) 형식으로 지었다. 증답가란

서로 한마디씩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는 노래이다.

퇴계가 한 번은 자신이 매화의 입장에서

한 번은 매화를 이별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노래하였던 것이다.

먼저 주인의 입장에서 퇴계는 이별하는 매화를 향해 노래한다.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頓荷梅仙伴我凉)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워라. (客窓瀟灑夢魂香)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하지 못하니,(東歸恨未携君去)

    서울 티끌 이 속에서 고이 간직하여다오.(京洛塵中好艶藏)

 

이번에는 퇴계 자신이 매화가 되어 의인화된

매화의 입장에서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듣건대 도선과 나 서늘하다 하셨으니(聞說陶仙我輩凉)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임이시여, 우리서로 사랑할 때(願公相對相思處)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玉雪淸眞共善藏)

 

 천향 : 임은 퇴계 자신을 이르는 말로,

            임이 떠난 뒤에도 천하제일의 향을 피우겠다는 말은

            매화를 의인화시켜 매화가 퇴계에게 한 맹세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두고 온 분매를 그리워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퇴계의 지인 고봉(高峰)이

다른 사람 편으로 퇴계에게 전했다.

1년 만에 다시 상봉하는 이 매화꽃을 보고는 시를 지었다.

 

    붉은 티끌 일만 겁을 초연히 벗어나,(脫劫紅塵一萬重)

     속세 아닌 이곳 찾아 이 늙은이와 벗하니,(來從物外伴濯翁)

     일을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不緣好事君思我)

     빙설 같은 그 얼굴을 어찌 볼 수 있으리오.(那見年年氷雪容)


그 후 두향은 사람을 시켜 퇴계에게 봄을 알리는

일지춘심(一枝春心) 매화분 하나를 보냈다.

그리고는 이전의 그 치마를 보내며

소첩이 보낸 옥매를 잘 받았다는 표시로

일필하여 보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퇴계는 두향이 보내온 치마폭에 이전에 썼던 두보의 시에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相看一笑天應許)

    기다려도 오지 않고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有待不來春慾去)를 연이어 썼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도산서원의

맑은 우물(洌井)에서 정화수(井華水)를

직접 길어 동이에 한가득 채워 보냈다.

  퇴계가 말년에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한 수는

상사별곡(相思別曲)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黃券中間對聖賢)

    비어 있는 방 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虛明一室坐超然)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 마라.(莫向瑤琴嘆絶絃)


시를 쓴 치마폭과 정화수를 받은 두향은

강선대에 나아가 몸을 씻은 후, 장독대에

퇴계가 보내온 정한수를 받쳐놓고 퇴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치성을 퇴계가 죽는 날까지

2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하였다.

그리고 선조 3년, 1570년 12월 8일 유시에

(酉時 오후 5시와 7시 사이)

퇴계가 숨을 거두자 두향의 부엌에 보관된

정화수가 갑자기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인로의 시, 매화

 

   선녀의 얼음 살결 ()으로 옷 해 입고

  향기로운 입술로 새벽이슬 마시었네

  속된 봄꽃들의 붉은 빛에 물들세라

  신선 고장 향하고자 학을 타고 날으는 듯

 

 

 만해(卍海) 한용운의 시, 無 題

 

  늙은 나이라 머리칼 짧아지고(桑楡髮已短)

  해바라기 닮아서 마음은 장하다.(葵藿心猶長)

  산집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山家雪未消)

  매화꽃 피어 봄밤이 향기롭다.(梅發春宵香)

 

 

 

김용택의 시,  매화꽃 환장하게 흐드러졌네

 

  매화꽃 피면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매화더러 피지 말라고 했지요.

  그냥, 지금처럼

  피우려고만 하라구요.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옛 선비들은 <구구소한도>란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추운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곤 했다.

흰 매화 81개를 그려놓고 동지로부터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 색을 칠하여 81일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게 되는데, 그러면 거의 봄이 된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는

 

그는 그림을 청하는 돈 3000냥이 들어오자

2000냥으로 기이한 매화를 한 그루 사고,

800냥으로 술잔치를 벌였으며,

나머지 200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샀다.

큰 돈이 들어와도 하루 생활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호방한 풍류 예술가로서 김홍도의 모습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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