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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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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명자.jpg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초가을 빗소리에 깨어나 넋놓고 앉았다가 필을 들었습니다.

  며칠 간 쓸지 않은 방바닥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어지럽지만 무련, 그대를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의 단풍잎이 화들짝 달아오릅니다. 변명 같지만 그 동안 그대에게 소홀했던 것은 순전히 날개 세 쌍의 나비들 때문입니다. 그 연두빛 나비들의 천국을 엿보느라 부지하세월이었지요.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그대가 온다면 꼭 보여주고 싶었기에 이렇게 뒤늦게나마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니 오히려 나비 때문에 그대에게 소홀했었다는 말은 핑계가 되나요?
  어쨌든 지금도 날개 세 쌍의 연두빛 나비 수천 마리가 날개를 접은 채 가을비에 젖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날개 세 쌍의 연두빛 나비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궁금하겠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 없고, 또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제대로 있는 게 없습니다. 그대도 알고 보면 내 곁에 있다가도 없고, 초롱초롱하던 저 별빛마저 몇 억 광년 거리의 별이 몇 억 년 동안 빛의 속도로 달려와 겨우 우리들 눈에 보이지만 이미 그 별빛의 실체인 별은 사라진 지 오래인 경우도 허다하지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의 조합일 뿐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물이나 진실들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다만 눈에 보이는 사물이든, 이미 규명됐다고 믿는 진리든 모두 상호관계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련!"하고 그대의 아득한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 그대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알겠지요. 하지만 사실 내가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파문도 보이지 않는 공기가 없다면 벙어리의 통곡이나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들리지 않겠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사실 의아해할 그대의 생각처럼 날개가 여섯 개인 나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나는 그 동안 날개가 세 쌍인 나비들의 포로가 돼 있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 그 나비들이 어디에 사느냐구요? 지리산 자락의 섬진강 변 어느 외딴 집 마당입니다. 바로 우리집 마당의 텃밭이지요. 지금도 마치 세상의 모든 나비들이 날아든 것처럼 수 천의 날개를 퍼덕이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나비들의 천국이지요. 여섯 개씩의 연두빛 날개를 단 나비들이 떼를 지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나비들은 섣불리 날개를 폈다 접거나 울타리를 넘어가는 법도 없습니다. 소란스럽거나 이꽃 저꽃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참선하는 선승의 결가부좌 같기도 하고, 겁의 무량한 세월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주 깊은 숨을 천천히 몰아쉬는 삼층석탑과도 같습니다.
  하루에 단 한 번 날개를 폈다가 접고, 언제나 제 자리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는 날개 세 쌍의 나비는 다름이 아니라 결명자 잎사귀입니다. 이른 아침 날개를 펴는 결명자 잎사귀들은 줄기마다 하나같이 세 쌍 여섯 잎을 달고 있지요.
  콩과에 속하는 결명자는 한낮에는 잎사귀를 편 채 진짜 나비들과 더불어 춤을 추지만 저녁이 오면 슬그머니 날개를 접습니다. 그 동작이 너무나 느리기 때문에 언제 날개를 펴고 접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요.
  반속도주의, 바로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면서도 날개 세 쌍의 나비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능청을 떨고 있습니다. 자다 깨어 한밤중에 나가 보면 어느새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잠들어 있지요. 그러면 나도 한없이 느리게 날개를 폈다가 접는 나비 꿈을 꾸고 싶어 툇마루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하루에 단 한 번만 날갯짓을 하면서도 하염없이 그대를 향해 날아가는 나비가 되고 싶어 내가 먼저 안달을 합니다. 하지만 내게 날개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지요. 온 마당이 나비들의 천국이지만 날개 하나 없는 나만 홀로 깨어 결명자 잎들을 어루만집니다.
  오늘은 두고두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대에게 날개 세 쌍의 연두빛 나비들을 날려 보냅니다. 하루 단 한 번의 날갯짓이 한 없이 느리고 답답할지 모르지만 석 달 열흘이 걸린들 어찌하겠습니까.
무련, 그대의 꿈속을 향하여 수천 수만의 나비들이 오늘도 만만디 만만디 날아갑니다.
마침내 보이는지요?
                                        —이원규,「날개 세 쌍의 나비를 아십니까」『벙어리달빛』(실천문학사, 1999)74~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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