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홍(鄭元鴻)군은 내가 귀양살이할 때 같이 지낸 사람이다. 그는 그물 손질을 잘하였다. 해어진 그물을 잘 손질해서 날마다 고기를 잡았지만 언제나 성하여 새 그물 같았다. 그 덕에 나는 조석으로 생선을 먹을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군은 매일같이 그물을 손질하고 고기를 잡곤 하였지만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다른 노비들에게 대신 시켜 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군에게

"그물 손질은 아무나 해낼 수 없는 특별한 방도가 있는 것이냐?"

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정군은,

"미련한 노비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물이란 본디 벼리〔網〕와 코〔目〕가 있는데, 벼리는 코가 없으면 쓸모가 없고, 코는 벼리가 있어야만 펼쳐지는 것입니다. 벼리와 코가 잘 엮어지고 가닥가닥이 엉키지 않아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물을 처음 만들 때에 맨먼저 벼리를 준비하고 거기에다 코를 엮는데, 가닥가닥이 정연하여 헝클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물건은 오래되면 망가지게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게나 고기들이 물어뜯고, 좀이나 쥐가 갉아서, 처음에는 그물코가 터지고 나중에는 벼리까지 끓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그물로 고기를 잡을라치면 마치 깨진 동이에 물붓기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너덜너덜 해져서 손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통상 버릴 때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왜 손질할 수가 없겠습니까? 저는 그 해진 그물을 가지고 돌아와서 바닥에다 펄쳐 놓고 해어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부지런히 수선을 합니다. 제일 먼저 벼리를 손질하고, 그 다음 코를 손질합니다. 끊긴 벼리는 잇고, 터진 코는 깁는데, 며칠 안 돼서 새 그물 같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버리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모두, 헌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 것인 줄은 알지만, 골똘한 생각과 매우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것까지는 모릅니다.

만일 버리라는 말을 듣고 손질하지 않았다면 이 그물은 이미 쓸모없이 버려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설사 손질하고자 하더라도 미련한 종놈에게 맡긴다면, 벼리와 코의 순서가 뒤죽박죽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손질하려다가 도리어 헝클어놓게 되는 것이니,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될 것이 뻔합니다. 이후로는 잘 사용하고 잘 간수해서, 해어진 곳이 생기면 바로바로 손질하고, 어리석은 종놈이 헝클어 놓는 일이 없게 한다면, 오래도록 성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니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자세히 다 들은 뒤에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자네의 그 말은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알아야 할 내용이다."

하였다. 아! 벼리는 끊기고 코는 엉키어서 온갖 것이 해이되어 해어진 그물과도 같은 이 말세임에랴!

끊기고 엉킨 벼리와 코를 보고 모른 체 버려두고 어찌해 볼 수가 없다고 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며, 어리석은 종놈에게 맡겨 그르치게 하여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당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던가?

아! 어떻게 하면, 정군과 같이 골똘한 연구와 여유 있고 침착한 손질로,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선후를 잘 알아 처리하여 간단하게 정돈해 내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날마다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고 언제나 완전함을 유지하여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그런 인물을 얻을 수가 있을까? 아!.....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이건명(李健命)

 

子는 중강(仲剛), 號는 한포재(寒圃齋)·제월재(霽月齋). 본관은 나주(羅州). 현종(顯宗) 4년(1663)에 태어나 경종(景宗) 2년(1722)에 졸(卒)한 조선후기 문신(文臣)이다. 현종 12년(1686)에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 을과(乙科)에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 응교(應敎), 보덕(輔德),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숙종 24년(1698)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우승지(右承旨),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이후 부제학(副提學),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숙종 44년(1718)에 우의정(右議政), 경종(景宗) 즉위년(1720)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당시 세제(世弟-英祖) 책봉(冊封)을 건의하고 이어 책봉진청사(冊封秦請使)로 청나라에 갔으나 그간 국내에서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귀국하자마자 경종 2년(1722)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이내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즉위년(1724)에 신원(伸 )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이 글의 원제는 '보망설(補網說)'이며, <한국문집총간 제177집 한포재집(寒圃齋集) 卷九 잡저(雜著)>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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