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자랑이란 제목으로 무용담을 적어 보내노라 하셨지만, 저는 격의없이 써 보낸 생활 보고문이라 생각하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겸손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지요. 아주 잘 하셨어요. 늦은 감 있지만, 크게 박수 쳐 드리고 싶어요.
쉰 일곱의 만만치 않은 나이에 경험도 전무한 가스 회사 부장급 자리에 도전하시다니요. 사장 면담 후, 15분만에 부장도 아닌 상무직 권유를 받은 건 한 편의 드라마이자, 초인적 설득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언변이 좋아서 성사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은 평소에도 사람의 마음을 여는 특수 비상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분이기에 가능할 수 있는 일이라 고개 끄덕여집니다.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따뜻함과 온유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그 사장님께도 전해진 거 아닐까요? 선생님과 제가 아는 조광제 선생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여는 비상 열쇠는 사랑이라고 하셨지요. 참, 신기하지 않나요? 작은 열쇠가 그토록 견고하고 큰 문을 연다는 사실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IMF 이후로 전공직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분야인 가스 회사에서 상무로 근무하시게 된 건 대단한 용기요 변신입니다. 아마도 가정을 책임지는 한 생활인으로서 그만큼 절박했고 간절했겠지요. 체면 문화의 나라에서 쉽지 않는 결정이었음에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도전하신 선생님의 태도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부딪혀 보고 안 되면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그 긍정적 마인드도 좋았습니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비탄 속에서 가정이 해체되고 의젓했던 가장들이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이번 이야기를 통하여 저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책임과 의무,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배웠으며,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인본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외유내강형이셨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을 거에요. 외유내강은 선생님의 인성일 수도 있지만, 삶의 한 방식이기도 하지요.
제가, 딸에게도 진정한 지도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녀야 한다고 늘 말하고 있어요. 강한 카리스마만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싶어하고 다른 상대방은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서로의 관계는 수평이 아닌 수직관계가 되어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어 버리죠. 입사 이야기도 드라마틱하지만, 전공자도 뽑아내지 못하고 머뭇대는 ‘적정 압력값’을 선생님께서 검토하고 연구한 결과, 제대로 된 정확한 숫자를 뽑아냈다는 대목은 완전히 이야기의 압권이었어요. 타성에만 젖어서 문제 파악도 하지 않고 해결 의지도 없는 분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준 사건이었을 거에요. 압력값 수치가 잘못되었을 때는 수학 시험처럼 오답 처리로만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사안 아니겠어요?
이제, 선생님께서는 노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아름다운 계획을 세우고 계시겠지요? 과연, 사람들이 너나없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적정 압력값’은 얼마나 될까요? 그 또한, 배관의 넓이와 길이, 그리고 꺾이는 각도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압력값을 구해야 겠지요. 행복한 삶을 희구하는 우리들 앞날에도 여러가지 변수가 있겠죠. x가 두 개라서 답을 못 구하겠다고 직원이 말했다죠? 저 역시 전공자가 아니라서 그 말 자체부터 아리송하긴 해요.
하지만, 만약 x 두 개를 2x라 치면 2를 =(이콜) 오른쪽으로 보내면 x값이 간단히 나오겠죠. 그야말로 1차 방정식이지만, 행복의 적정 압력값은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정신적, 사회적 변수 등을 두루 감안해야 하기에 어쩌면 더 복잡한 5차 방정식이 될 수 있어요.
a= 0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abcd라는 계수와 f라는상수값까지다 찾아내야 하니까요. 그러나 가능성을 가지고 답을 찾아가 보는 거죠. 안 해 보는 것보다, 해 보고 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또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문제 점검을 하면서 풀어가는 거죠. 5차 방정식이라 골치가 아프고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정답을 찾았을 경우의 희열에 비하면 그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죠. 어쩌면, 문제를 풀어가는 그 자체가 행복의 여정일 수도 있겠지요. 더우기, 행복 산술법은 함께 푸는 공동 프로젝트기 때문에 더욱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는 거죠.
방정식을 예로 들다보니, 제가 좋아하던 수학 생각이 나네요. 사실, 저는수학을 무척 좋아했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주산을 놓았고 내 인생의 최고 분깃점이었던 4학년 때는 대표선수로 시합에 나갈 정도였으니 숫자와는 매우 친숙했죠. 그것이 기초가 되어 산수가 수학으로 바뀌었어도 계속 탑에 들 수 있었고 어려운 응용문제도 답을 찾아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했죠.
어쩌다, 남편이랑 다투다가도 해법이 안 나오면(얘기가 뱅뱅 돌기만 하면) 전 책상에 앉아 '정석' 응용문제를 풀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곤 했어요. 응용 문제 푸는 게 사실 저한테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힐링이었죠. 남편도 부부 싸움 하다가 수학 응용 문제 푸는 여자는 처음 본다며 제 풀에 수그러지더군요. 하긴, 새댁이 언쟁을 멈추고 응용문제를 풀고 앉아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엉뚱한 점이 좀 있긴 해요.
지금은 너무 오래 되어 1차 방정식도 제대로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학엔 꼭 답이 있다. 그래서 수학이 재미있다"던 수학 선생님 말씀을 믿어 보는 거죠. 반 친구들이 아무도 풀지 못할 때, "지희선이 나와서 한 번 풀어 봐라!"하던 그 선생님의 무한한 신뢰와 답을 제대로 맞추었을 때의 뿌듯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죠. 가끔 머뭇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일단 분필을 들고 풀어가 보는 거죠. 수학에 답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답은 있을 터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비상 열쇠는 있겠지요. 저는 그걸 믿어요.
여기 아파트 매니저도 비상키 즉 master key를 가지고 있어요. 그 키 하나로 모든 방문을 다 열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비상키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지요.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천 년 전에 멋진 한 사나이가 제 목숨값 대신 던져주고 간 선물이 다름 아닌 ‘사랑’이란 것이. '사랑'이란 키는 마술봉과 같아서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변화를 시키고 빗장 걸어둔 열 두 대문을 활짝 열게 하죠. 다민족이 어울려 사는 여기 미국 사회는 특히 더 그런 것같아요.
'사랑으로'하는 해결책은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화하고 설득하여 적절한 '적정 압력값'을 산출해 내는 거지요. 이 방법을 쓴다면, 노사 문제도 좀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싶어요. 학교 폭력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교장 선생이나 교사들이 진정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풀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 서른 두 살 때였나 봐요. 어덜트 스쿨에 다닐 때, 자리 때문에 엘살바도르에서 온 놈하고 덩치 큰 흑인 한 녀석이 갑자기 난투극을 벌였어요. 수업 종을 기다리고 있던 오십 여명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죠. 저 혼자 교실에 남았어요. 큰 싸움 소리만 나도 사시나무처럼 떨던 내가 말이죠. 저도 왠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 날, 저는 무서움 대신 치고받고 싸우는 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라구요. 제 나라를 떠나와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살아볼려고 온 아이들이 왜 하잘 것 없는 자리 하나 때문에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나 싶어 눈물이 난 거죠.
6피트가 넘는 큰 녀석들 사이에 뛰어 들어 5피트 남짓한 이 조그만 동양의 아가씨가 소리 질렀죠. "Stop it!" "Why fighting?" " Go, Wash your face!" 단 세 마디였어요. 기초 영어도 몰라서 영어 배우러 간 내가, 할 수 있는 영어가 몇 마디 있겠어요. 그리고 설득력 있는 고상한 고급 영어가 이 때 왜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내 짧은 영어 몇 마디를 듣고 거짓말 같이 싸움을 멈추는 거에요. 제 눈물을 본 거죠. 그리고 제 눈물 속에 어린 진정성을 본 거지요.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잖아요.
"자, 악수하고... 곧 선생이 오고 수업 시작이야… 빨리 얼굴 씻고 와!"하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하니, 그 덩치 큰 놈들이 핏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훔치더니 악수를 하더군요. 저는 많은 학생과 노랑머리 여자 선생까지 창문 밖에서 가슴 졸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지 몰랐어요. 녀석들이 피범벅이 된 얼굴을 씻으러 나가자, 도망갔던 학생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내게로 달려왔어요. 겁에 질려 있던 선생도 내 손을 잡으며 댕큐를 연발하시더군요.
여기선 잘못하다 총에 맞아 죽을까 봐, 아무도 싸움에 개입하지 않아요. 슬슬 피해 가죠. 저 역시 용감해서 싸움을 말릴 수 있었던 게 아니에요. 전 사랑의 힘을 믿었던 거죠. 그 애들은 평소에 날 좋아하고 언제나 나이스했던 아이들이죠. 나한테 해꾸지할 아이들이 아니었죠. 나도 평소에 친했던 아이들이라 더 슬펐는지 몰라요. 얼굴을 씻고 온 아이들을 내 양 옆에 앉히고 그 날 수업을 잘 끝내고 왔죠. 그 다음부터 두 녀석은 먼저 와서 자기들 둘 사이에 내 자리를 마련해 두곤 했지요. 사랑의 힘은 두려움을 없애주고 오히려 눈물을 준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사랑으로'란 내 생활 모토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제 신념이지요.
저는 선생님이 무척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한없는 신뢰가 가요. 무엇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사람 친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전적으로 마음에 들어요. 일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통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즐거운 거죠.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오늘 해 주신 이야기는 자랑도 무용담도 아닌 걸 알아요. 함께 나누고 싶은 유쾌한 생활 보고지요. 사랑에 대한 삶의 자세로 산다면, 이런 유쾌한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거에요. 생활의 감동이지요. 보람이구요. 오늘도 가슴에 사랑을 담고 활기찬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랑’이란 비상 열쇠는 결코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장 이란 비밀스런 호주머니에 꼭꼭 챙겨 두세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느 새, 해가 떠올라 일어나라 하네요. 자, 다시 선물같이 받은 하루가 시작되네요. 부디 건강 관리 잘 하시고, 다음에도 소설 같은 생활 이야기 많이 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