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달리기 연습에 10분 가량 늦었다.
한국에서 부쳐온 <Hello> 시조집을 밤 늦게까지 읽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새벽 네 시 오십 분.
갈까 말까 하다가, 얼마 전에 쓴 <지금 이 시간>에 나오는 '자는 사람과 뛰는 사람’ 생각이 나서 양심상 나왔다.
모두 앞서 가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뛰다 보면 어디선가 만나겠지 싶어 혼자 뛰기 시작했다.
뚝방을 달리다 뾰족뾰족하게 솟은 사이프러스를 보았다.
마치, 고딕식 성채 같기도 하고 하늘에다 침을 놓고 있는 대침 같기도 했다.
하늘에다 대침 놓는 사이프러스라.
생각을 묵히면 무언가 수필 한 꼭지 나올 것같았다.
달리던 길 멈추고 뒷걸음질하여 사이프러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어둠 속인 데다가 나뭇잎에 가려 자리를 옮겨가며 찍었다.
잠을 털고 일어나기에는 아직 어두운 밤.
담장 밑에서 자고 있는 홈리스 피플 단잠을 깨울까 봐 도둑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죽였다.
일부러 그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뿔싸!
부시럭거리며 일어난 홈리스 피플은 내가 뒷걸음쳐 올 때부터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나 보다.
그러지 않아도 촉각이 예민한 그들인지라, 앞으로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와 뒷걸음 쳐 오는 소리를 구분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무엇을 하는지 그들 주변에서 왔다갔다 서성대니 불안할 수밖에.
짐짓 모른 척하며 작업하던 나도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해 하는 그들을 안심시켜주는 게 급선무다.
“Hi!”
수면을 방해한 미안한 마음에 한껏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겐 턱없이 이른 기상 시간이라 굿모닝 인사 하기도 미안했다.
“Hi!”
한 사람이 인사를 받았다.
사진 몇 장만 찍고 가겠다고 덧붙였다.
“Oh, I see...”
그때사 그들도 안심을 하는지 경계의 눈빛을 거두었다.
잠자기는 틀렸다는 듯, 한 명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돌아누워 있던 사람도 꿈틀대기 시작한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뜻밖에도 남녀 두 사람이다.
전화기를 밸트 주머니에 넣느라 더듬거리는 사이,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 Mom! Let’s go.”
예상치 못한 호칭에 깜짝 놀랐다.
아들 말에 이어 답이 들려옴직 했지만, 엄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유령 인간이 움직이는 듯 움직임만 있을 뿐,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얼른 피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냅다 뛰어 가면, 저들이 무서워 도망간다고 생각할까 봐 적당한 거리만 유지했다.
내 뒤로 두 사람이 따라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나는 오른쪽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그들은 왼쪽 도로변 길로 올라 섰다.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그들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다 장성한 홈리스 아들과 그 어머니.
집 없이 떠돈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어쩌다 홈리스가 되었는지 달리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Mom이란 말이 목에 가시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다.
체념한 듯, 아들 말에 아무 대꾸도 없는 엄마의 반응도 서편 하늘로 진 노을처럼 긴 잔영으로 남았다.
한편으론, 아들과 함께 있는 어머니가 다행스럽기도 했다.
멀리, 동녘 편으로 또 다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보였다.
일전에, 그 쪽에서부터 여명이 밝아오던 기억과 함께 갑자기 푸시킨의 싯귀가 떠올랐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과연, 삶이 우리를 ‘속일 때’ 우린 성자처럼 현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늘에 종주먹을 들이대거나 사이프러스처럼 대침을 꾹꾹 찌르며 분통을 터뜨리고 싶진 않을까.
오늘은 뚝방길 6마일을 달리는 동안 내내 하늘에 대침 놓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홈리스 피플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상그러웠다.
이왕이면, 도로변에 올라 선 그 모자가 해가 지는 서편보다는 해가 뜨는 동편을 향해 걸어 갔으면 싶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 수 없으나, 해를 향해 걷다 보면 왠지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