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4일 새벽.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신성일이 유성별이 되었다. 향년 팔십 일세.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 불리우는 미남 스타며 시대의 로맨티스트로 그는 원하는 삶을 원없이 살다 갔다. 영화인으로 살다 갔고, 누군가의 아들이며 남편이며 아버지로 살다 갔고, 거기에 더하여 누군가의 애틋한 애인으로 살다 갔다.
그가 멋있는 건, 잘 생겨서가 아니라 자기 삶에 당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이익이나 비난에 굴하지 않고 자기 철학대로 소신껏 살다 간 사람이다.
첫번 째 에피소드는 엄앵란 입을 통해서 직접 나온 이야기다. 신혼 초, 엄앵란은 시어머니로 인해 정신적 고초를 엄청 겪었다 한다. 결국, 쫒겨나 친정집으로 가게 된다. 신성일은 아내를 설득해서 육개월만에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엄앵란은 사죄의 뜻으로 큰 절을 올린다. 이때 날아온 시어머니의 일갈!
- 배우 나부랭이가 연기하고 있네! 연기하지 마!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신성일도 이때만은 묵과할 수 없었다.
-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배우인 이 아들은 뭐가 됩니까? 저도 배우 나부랭입니까? 저희들 분가하겠습니다!
어머니로서는 심장을 비수로 찍힌 충격이었다. 순간, 풀수윙으로 아들의 얼굴에 따귀를 갈겨 올렸다. 번개와 천둥은 함께 오는 법. 속사포가 쏟아졌다.
- 그래, 이 녀석! 나도 너희들 내 보내고 내 인생 내가 살며 문화생활 할게! 당장 나가!
- 네! 그렇게 하십시오! 저희들은 분가하겠습니다!
성일은 휘청대지도 않고 동상처럼 앉아 고스란히 따귀를 맞으며 말했다. 성일의 눈가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 내린다. 남자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여자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때, 엄앵란은 ‘ 이 남자 같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 가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성일은 엄앵란의 손목을 나꿔채며 일어섰다. 하지만, 효심 지극한 외아들 성일이 영원히 어머니를 내 몰라라할 사람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는 예쁜 정원이 딸린 새 집을 사 드리며 마음을 풀어 드렸다 한다. 그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 영정을 성일가 독방에 모셔 놓고 조석으로 기도를 올린 효자다. 항간엔, 24시간 향을 피워 둔 밀폐된 방에 오랫동안 앉아 기도를 올려서 폐암에 걸린 건 아닌가 하는 얘기도 돌았다.
두 번 째 에피소드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그는 대본에도 없는 노출을 여배우한테 강요하는 감독에게 당당히 항의하여 상대 여배우를 지켜줬다고 한다. 감독과 함께 여배우를 농락한 조 아무개 파렴치한 남자 배우와는 확연히 다른 남자다. 그때 은혜를 입은 상대 배우는 김수미로, 갓 결혼한 신혼댁이었단다. 김수미는 이때의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신성일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따랐다.
세 번 째 에피소드는 세상이 떠들썩했던 스캔들이다. 아내를 가진 남편으로서 공공연한 장소에 애인을 노출시키면서도 그는 기자들에게 변명하거나 거짓으로 회피하지 않았다. 기자와의 일문일답에서 그의 솔직담백한 직선적 면모를 볼 수 있다.
파리에서 ‘이별’이란 영화를 찍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촬영 내내 통역관이란 미명 아래 그의 연인 김영애는 곁에 있었고, 촬영 뒤엔 유럽을 휘저으며 두 달간의 꿀같은 허니문 여행을 함께 보낸 후였다.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 애인이 있습니까?
- 있지!
- 사랑합니까?
- 사랑하지!
- 그럼 엄앵란씨는 어찌 되는 겁니까?
- 내 마누라지!
- 이혼하실 겁니까?
- 결혼했는데 왜 이혼을 하나?
이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그리고 그는 ‘졸혼’이란 신생어를 탄생시키며 끝내 이혼하지 않고 55년간의 부부의 연을 이어 갔다.
어찌 보면, 뻔뻔하고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아내라는 이름의 한 여인에겐 치명적인 배신의 상처를 남겼고 애인이란 이름의 연인에겐 언제나 반쪽 사랑만 줌으로써 갈증을 느끼게 한 ‘나쁜 남자다. 그는 결코 교과서적으로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비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당당함이 그를 밉지 않는 남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인(?)을 둔 대부분의 유부남들이 쉬쉬하며 비밀스레 사귀는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그는 매 순간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자기의 선택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은 로맨티스트일 뿐, 플레이 보이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부나비처럼 떠도는 플레이 보이는 오히려 외로울 뿐이라고. 그의 얘기에 따르면, 아내와 애인은 여러 면에서 다르단다.
사실, 아내가 생활의 동반자라면 애인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아내가 창 안의 여자라면 애인은 창 밖의 여자다. 여기에 소유할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 더하니, 애틋해질 수 밖에 없다. 동경이란 갖지 못할 때 갖는 그리움이 아닌가.
문득문득 ‘운명적 사랑’을 꿈꾸어 보는 건 남녀라고 다르고 노소라고 다르겠는가. 다만, 무사히 넘어가는 건 기회가 없고 뜻 맞는 상대방을 못 만났기 때문 아닐까. 윤리와 도덕, 배우자 쯤이야 걸림돌일 뿐 완전한 견제구가 되진 못한다. 그만큼 인간은 약한 존재다. 때문에, 세상에는 여전히 불륜이 난무하고 비련으로 속울음 우는 사람이 많다.
기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다. 부피와 크기와 무게, 심지어 온도까지 지닌 실질명사요 특별 명사다. 누구나 겪어 보아서 알듯이 사랑엔 온도 차이도 있고, 속도 차이도 있고, 부피 차이도 있다.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 습관조차 맞지 않았던 신성일과 엄앵란은 옆에서 봐도 온도 차이가 너무 컸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여섯 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고 아침은 심심한 간에 건강식을 든다. 그런데 한 사람은 낮 열 두 시에나 일어나 '아점으로' 짠 젓갈류에 흰밥을 먹는다. 한 사람은 책을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한 사람은 책하고는 담 쌓고 산다. 한 사람은 운동 마니아요 또 한 사람은 운동이라면 질색을 한다. 다르다 해도 두 사람은 너무 다르다.
결혼은 생활이지 낭만이 아니다. 서로를 맞추어 보려 노력해도 사사건건 삐걱댄다. 좋은 게 좋고 편한 게 좋다고 서로 감정 소모를 할 필요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젠 갈 길이 다르니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그들도 결국 '졸혼'을 선언하고 ‘동지’로 돌아 간다. 그들은 공인으로서 스타답게 탁월한 선택을 했다. 이혼이 완전한 포기라면, 졸혼은 절반의 양보다. 심리적으로도 ‘졸혼’은 절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좋은 타협법이란 생각이 든다.
한 송이 꽃이 꽃으로 돋보이는 건 그 꽃을 받쳐주는 꽃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꽃받침의 소임을 충실히 해 준 엄앵란이 없었다면 그도 멋있게 살다 멋있게 가진 못했을 터이다. 이런 엄앵란의 희생적 태도 때문에 신성일에 대한 비난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나 싶다. 그의 품위 유지를 끝까지 지켜준 아내를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조차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지 않고 갔다.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하다”
이 말 뿐이다. 나라면 참 섭섭했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 다운 말이다. 대신, 그는 마음의 정표를 남기고 갔다. 그는 자기가 제일 아끼던 경북 영천 성일가 앞마당에 벗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본인과 엄앵란 그리고 세 아이들 이름을 각기 나무에 걸어 두었다. 결혼 사십 칠 주년 기념 식수였다. 그는 그 벗나무 자기 이름 아래 묻히길 원했다. 결국,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마다 하던 엄앵란도 그의 곁에 눕겠다고 한다. 죽어서야 남편 곁에 누울 수 있는 서글픈 아내. 하지만, 그녀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마지막 자랑이다.
이미 강 하류에 이르러 바다와 합일을 바라보는 부부의 연륜이 아닌가. 굳이 사랑 운운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터. 이때쯤 되면, 이미 사랑보다 더 깊은 ‘정’이란 유대감으로 동여 매어 있을 사이다. 아내 엄앵란은 그를 떠나 보내며 이렇게 답했다.
“부디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사시라. 차비도 필요 없을 테니 구름 타고 훨훨 여행이나 하시라.”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구름을 타며 외지를 돌 남자. 남편이란 이름의 남자를 자기의 남자로 갖지 못하고 산 여인네의 한이 묻어나는 애잔한 말이다.
엄앵란은 신성일을 일러 말한다. 그는 동지일 뿐, ‘문 밖의 남자’였다고. ‘무책임한 남편’을 ‘문 밖의 남자’라고 품격있게 부르는 아내. 그런 태성을 지닌 남자를 큰 맘으로 수용해 준 여인의 심사가 경이롭다. 책임감으로 피워낸 한 송이 장미다.
영화계에 한 획을 긋고 이제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신성일. 그는 ‘문 밖의 남자’에서 ‘세상 밖의 남자’가 되었다. 거기서도 그는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살아가리라. 영원한 스타는 불멸의 스타다. 그가 남긴 500 여 편의 영화 속에 그는 살아 움직이고 우리들 가슴 속엔 귀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어린 날, 마산 화력 발전소 야외 극장에서 동네 어른들에 묻혀 깔깔대며 봤던 <로맨스 빠빠>가 떠오른다.
“아버지 바지 합바지, 쫙쫙 찢어서 맘보 바지 만들자~”
언니 오빠들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우리 개구쟁이들도 덩달아 어깨춤울 췄던 기억이 난다.
맨발의 백발로 먼 길 떠난 우리들의 일등성, 신성일. 그가 유성으로 떨어지며 남긴 하얀 꼬리선은 잔설 되어 우리의 가슴을 오래도록 시리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