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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조와 수필을 주로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수필에 초점을 맞추어 나의 글쓰기 습관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
    내게 있어 수필쓰기는 ‘숨은 그림 찾기’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사물을 눈여겨보노라면 어느새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이 동그마니 눈 뜨고 말을 걸어온다.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수필을 쓰면서 배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오면서 볼 때가 있고 어제 못 본 꽃이 오늘 보일 때도 있다. 심지어 무생물조차 꿈틀대며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그를 두고 어찌 생명이 없다 하랴. 어느 벗인들 그토록 솔직하며, 어느 님인들 그토록 다정할까. 적당히 자기 화장을 하고 만나는 친구보다 훨씬 마음에 평화를 주고 기쁨을 줄 때가 많다. 때로는 큰 스님 법문처럼 들려주니 그들과의 대화가 기껍기만 하다.  
    마치 십년지기를 만난 듯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새 한 편의 수필이 된다. 무생물과 나누는 대화는 사색수필이 되고, 한 사람의 삶을 엿보고 쓴 글은 꽁트식 수필이 된다. 좀 길어지다 보면 소설식 수필이 되기도 한다. 수필을 쓰는 동안 내 마음은 태곳적 순수로 돌아간다. 맑되, 시험관에 든 증류수가 아니라 철분과 마그네슘이 듬뿍 든 우물물 같은 마음이 된다. 이런 마음으로 쓰는 수필은 누군가를 향한 나의 연서인지도 모른다. 사랑, 평화, 희망 때로는 눈물까지 동봉하며 띄우는 연서에 나는 ‘산고’라는 말 대신 ‘즐거운 고통’이란 반어를 쓰고 싶다. 굳이 작법이랄 것도 없지만,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나의 수필 쓰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  소재와의 감성적 만남(!)+사색+의미부여+작품 구상+퇴고+완성 >
  

   여기서 감성적 만남이란 심상에 각인된 느낌표라고나 할까. 자연이나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내 심상에 하나의 느낌표로 찍히면서 사랑의 대상이 되면 그때부터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에 빠져든다. 그 다음, 나의 이 주관적인 느낌이나 경험을 어떻게 인생의 한 단면과 연결하여 보편성을 띠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된다. 내 개인의 감동적 체험이 누군가와 나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변잡기’와 ‘문학 수필’의 언저리에서 서성일 때가 많다. 묘사와 꾸민 글의 애매모호한 경계선도 이래저래 괴롭힌다. 어쩌랴. 다 필력의 문제인 것을.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작품 구상에 들어간다. 주제를 받쳐줄 예는 충분하고 타당한가. 화자는 어느 거리쯤에 둘까. 구성에 있어 무슨 말로 첫 줄을 시작할까. 느낌부터 던질까, 아니면 시간대 별로 구성할까, 의식의 흐름에 따를까 등등. 효과적인 마무리와 여운을 남기기 위해 마침도 고려 대상이 된다. 대체로, 이야기 전개는 ‘항아리형’으로 하고 마침은 ‘수미쌍관법’을 씀으로써 처음과 끝을 하나로 연결해준다. 실마리가 안 풀릴 때는 무조건 써 내려가고 본다.
   퇴고 부분에 가서는 그야말로 ‘등심주물럭’이다. 고치고 또 고쳐 ‘곤야꾸’가 될 때까지 간다. 그렇다고 완전한 작품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완전한 작품이라곤 없다고 본다. 다만, ‘원고 마감일’이 있을 뿐이다. 출판 기념회에 가서도 책을 받는 즉시, 또 고치고 있으니 이 불치의 병을 어찌하랴.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한 노력으로는 책을 많이 읽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편식을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20여 년이 지나도 발전된 게 없다고 B 선생님으로부터 한마디 들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그 분의 일갈처럼 책 선택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부가 되는 고전보다 재미있고 좋은 책이 매일 쏟아져 나오니 이 유혹을 어찌하랴. 지금도 책이야 ‘신체 장기’처럼 지니고 다닌다. 다만, 아끼는 책은 어떠한 유혹에도 ‘장기 기증’ 하지 않을 예정이다. 글이 안 나오는 요즈음에는 ‘문학 일기’를 짧게 써 보기도 한다.
   이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옛날에 비해 나도 많이 게을러진 듯하다. 한때는 수필에 미쳐, 문공부에 등록된 수필 전문지란 전문지는 다 정기구독해서 보았다. 뿐인가. 김태길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수필 통신 강좌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때 마침 <<계간 수필>>을 발간한 지 얼마 안 되어 본인은 힘들다고 하시면서 윤모촌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의 열성을 기특하게 보셨는지, 눈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우리가 보낸 글을 크게 확대하시어 붉은 줄로 일일이 고쳐 다시 미국으로 보내주신 선생님. 때로는 너무 붉은 줄을 많이 그어서 미안하다며 따로 친필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이제 선생님은 가시고 붉은 언더라인이 수없이 쳐진 교정 원고만이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 그때의 열성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선생님께 송구스럽기만 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다.  몇 시간을 끙끙거려 쓴 글도 원고료 없이 신문 공란이나 메꾸어주는 수필. 하지만, ‘정의 문학’인 수필은 아름다운 것. ‘여백의 예술’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오늘 밤은 어둠 속에서 기웃대고 있는 팜트리에 대해 써 볼거나. 처처에 흩어져 동그마니 눈 뜨고 있는 ‘숨은 그림들’을 위해 연서를 써야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