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jpg

 

    ‘참, 이상한 꿈이다. 상여 없는 장례식이라니......’
   여느 때 같으면 침대에서 행복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새벽 여섯 시. 희부염하게 밝아오는 새벽창을 응시하며, 나는 한 시간 째 이상한 꿈에 매달려 있었다. 가끔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이상한 꿈을 꾸긴 했어도 이런 꿈은 난생 처음이다.
   얼핏 보니 내가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산 같았다. 갑자기 동네가 술렁거리더니 상여가 들어온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신작로에 나와 너나없이 고개를 빼고 상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발을 돋운 채 눈을 반짝였다.
   이윽고 골목길을 돌아 상여가 나타났다. 앗!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건 꽃상여도, 그냥 맨 상여도 아니었다. 꽃은커녕 관 자체가 없었다. 장부 네 사람이 죽은 사람의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을 돌아 나오더니, 산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하는 애절한 북망가도 없고, 만장도 나부끼지 않았다. 게다가 따르는 상주마저 한 명 없었다.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저토록 초라한 장례를 치루나’ 싶어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쓰렸다. 구경꾼마저 숨을 죽이자, 사방은 완전 침묵에 빠져 마치 죽음의 마을 같았다. 찬바람은 전깃줄을 윙윙 울리고, 죽음의 마을에 침묵의 장례 행렬은 팽팽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장례 행렬은 어느 새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곧 흙을 파고 시신 그대로 땅에 묻을 참이었다. 바로 그때! 시신이 한잠 잘 잤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나는 산등성이를 향해 소리치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안 죽었어요. 아직 안 죽었어요!” 그대로 땅에 묻어 버릴까봐, 얼마나 소리를 크게 질렀던지 제 풀에 놀라 잠이 깼다.
   직장에 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감 있는 꿈이 생각 속으로 날 몰아갔다. 오후 네 시경, 뜻밖에도 막내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생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파도에 흔들리는 그물처럼 출렁거렸다. “오빠가 탄 배.... 파선됐대... 우리나라 거의 다 와서...”  “오빠는?” “실종됐대.” “실종? 에이, 그러면 곧 찾겠지. 오빠는 해병대 출신에 물개 아냐.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나는 ‘실종’이란 말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바다에서만큼은 오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부산, 마산, 충무....... 우리는 언제나 바다를 끼고 살지 않았나. 그리고 바다는 오빠에게 운동장이었고. 나는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쫓았다.
   그러나 사흘이 지났는데도 오빠의 소식은 감감하기만 했다. 해상 사고에서 ‘실종’이라면 ‘사망’을 의미하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선장의 책임을 다 하며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였던 오빠. 오빠는 그렇게 서른 일곱의 나이에 11월의 겨울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꽃상여는커녕, 관도 없이 가 버린 오빠. 일곱 살 고명딸이 눈 앞에 어른거려 어떻게 이승의 끈을 놓을 수 있었을까. 모진 해풍을 맞은 소나무처럼 오빠의 삶도 굴곡이 심했기에 나의 슬픔은 더욱 컸다. 

    오빠만 생각하면 나는 미안한 마음 뿐이다. 오빠의 사랑에 비하면 나는 그 반의 절반도 되돌려주지 못했다. 착실했던 오빠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으며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불량한 오빠를  나는  '유령인간'처럼 대했다. 친구랑 가다가 길에서 부딪쳐도  모른 척 하고 지나갔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싸늘한 시선을 보냈고, 술에 취해 들어오면 나는 진저리를 쳤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내 자존심을 깡그리 뭉게버린 불량한 오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도 못된 동생이었다.  여대생이 되어 누군가 내게 접근해 왔을 때도, 나는 결혼 같은 거 안한다며 친구 이상으로 발전 시키지 않았다. 훗날, 내가 결혼하게 된 것도 그런 오빠를 이해한다는 딱  한마디에 그냥 승락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내게 어떻게 해 주었나.  어릴 때, 잠든 나를 깨워 새벽예배에 데리고 다닌 것도 오빠고 겨울 찬 바람을 앞장서서 막아준 것도 오빠였다. 내 성적표를 들고 동네 친구들 한테 자랑자랑한 것도 오빠요, 연극놀이 할 때는 나를 공주로 시켜주고  내 좋아하는 녀석을 용케 알고는 부마로 앉혀 준 것도 오빠였다. 바닷물에 양재기를 떠내려 보냈을 때도 목숨 걸고 헤엄쳐 나가 가져다 준 것도 오빠요, 월남전 막바지에 뛰어들어 목숨을 담보로 한 댓가로 나의 학자금 부담을 들어준 것도 오빠였다. 결혼 하고서도 아이가 늦었던 오빠는 우리 아이를 자기 아이 이상으로 사랑해 주었다. 네 살바기 아들 녀석이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 휴가까지 내고 함께 병상을 지켜준 것도 오빠요, 약한 내 손목을 잡고서  많이 야위었다며 눈시울을 붉힌 것도 오빠였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못되게 군 나에게 단 한번도 큰 소리를 쳐본 적이 없는 오빠였다. 오빠에게 나는 언제나 '천사 같은 동생'일 뿐이었다.

    오빠는 결혼과 더불어 몰라보게 달라졌고 가족을 끔찍히 사랑했다. 7년만에 낳은 딸아이에 대한 사랑은 옆에서 시기를 할 정도였다. 육상근무를 마다하고 해상근무를 선택한 것도 빨리 자립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항차에서 오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오빠가 간 지도 어언 사반세기가 지났다. 주인공이 죽기 전의 소설 앞 페이지처럼 다시 돌려놓고 싶은 그 때, 그 날, 그 시간!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지만, 그것도 빈 말인가 보다. 요즈음 들어 톱뉴스가 되어버린 ‘천안함 사고’가 아물어가던 상채기에 다시 소금을 뿌린 듯 마음을 아리게 한다.
   육중한 군함이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동강이 나고 마흔 여섯 명이나 실종이 된 해상 참사. 경악하며 들끓었던 것도 잠시, 살아온 것이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구는 생존 장병들 앞에서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제는, 사랑의 빚만 남겨준 채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목숨들. 그들도 해마다 받아드는 달력 속에 빨간 동그라미로 남아 눈물짓게 하겠지.
   “오빠, 미안해요.”  
    상여도 없이 가버린 오빠. 목 놓아 이름을 불러보아도 파도만 높이 출렁일 뿐 대답 없는 오빠.  산 자는 죽은 이에게 늘 미안하다. 잘 해 주었어도 미안하고 못해 주었어도 미안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마음은 그리움과 함께 깊어만 간다. 받은 사랑을 되갚을 길 없는 슬픔이 오늘따라 백령도 파도보다 드높게 출렁인다. (0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