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고방식을 가져서일까. 나는 인연설을 믿는 습성이 있다. 작은 인연 하나라도 우연이란 없으며, 어떤 필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어왔다. 때문에 나와 맺어지는 인연들을 유달리 소중해 하고 고마워한다. 하고 많은 성녀 중에 ‘요안나’란 본명을 갖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이 인연설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1983년 12월, 영세를 앞두고 본당 신부님과 면담을 할 때만해도, 본명에 대해선 무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 오자마자 내 발로 걸어간 성당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으니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교리반 지도자도 꼭 모시고 와야 할 대모님이나 본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던 터였다. 그 때만 해도, 본명은 성당에서 영세 받을 때 선물처럼 하나 받는 걸로만 알았다.
이런 내게, 특별히 생각해본 본명이 있느냐는 신부님의 질문은 적이 당황스러웠다. 신부님은 만약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듯 성인 인명록을 내 앞에 펼쳐 보이셨다. 그래도 이름에 대한 욕심은 있어 책을 뒤적이며 뜸을 좀 들였다. 우선, 들어봄직한 이름 중에서 어감이 예쁜 걸로 혀끝에 굴려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런 나에게 신부님이 성탄 전야에 영세를 받으니 ‘노엘’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노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했다. 그러자, “노-엘, 노-엘”하는 성탄 성가 후렴이 생각나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 이름은 놀림감이 될 것 같아 싫다고 했더니, 벽안의 신부님도 같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다음에 짚으신 이름이 ‘요안나’였다. 요안나? 이 이름 역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았다. 그 순간, 번쩍 섬광처럼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문 요안나 수녀님!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로 청소년들의 건강 상담자요, 자상한 어머니였던 문 요안나 수녀님. 그 분은 메리놀 회 소속 간호원 수녀로 이국땅에 와 근 사십 여 년 간 봉사의 삶을 살아온 분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 대신 공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근로 청소년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시던 수녀님. 그 분은 그야말로 사랑의 화신이요, 살아있는 성녀였다.
돌이켜 보면, 문 수녀님을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래된 수첩에서 발견한 후배의 전화번호를 보고 문득 전화를 건 것 하며, 그녀를 방문한 자리에서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내가 덜렁 K 신부님을 도와 근로 청소년 센터 교육부장으로 일하게 되고, 연이어 문 수녀님을 만나게 된 이런 일들이 어찌 인간의 계획으로 척척 이루어졌겠는가.
문 수녀님은 ‘지 선생’이 미국에 가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게다가 같은 본명을 가졌다고 하면? 아마도 수녀님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띠며 “하느님, 참 재미 있어요” 하시겠지. 우리 근로 청소년 중 십 년 사이, 신부님 한 분과 수녀님 열 분이 나왔을 때도 하느님이 참 재미있다고 하셨다는 분. 그 문 수녀님 덕분에 나는 흔쾌히 ‘요안나’란 본명을 정할 수 있었다.
본명을 정한 나는 성녀 요안나의 영명축일을 물어보았다. 12월 12일이라고 했다. 12월 12일? 그때 다시 “딱!”하고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내 뇌리를 스쳤다. 11월 11일. 달과 날짜가 같은 ‘마르띠노’ 선생의 영명축일과 일치했다. 그 분 역시 내가 근로 청소년 센터에서 함께 일하며 존경해 마지않던 특강 선생님이셨다. 인연도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는 이미 생일과 생시가 같다는 점에서 남달리 친근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사소한 것에서도 공통점을 찾고 싶어 하나보다. 문 수녀님과 같은 본명. 마르띠노 선생과 닮음꼴인 영명축일.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요안나’란 본명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내친 김에 카톨릭 성인 사전을 뒤져 성녀 요안나의 생애를 읽어 보았다. 주보 성인의 행적도 행적이려니와 남다른 인연이 무슨 비밀처럼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평생 영적 지도자로 모셨고 죽어서는 그 곁에 묻힌 프란치스코 드 살의 영명축일이 바로 내 양력 생일과 같은 1월 24일이었다. 이 날은 내 딸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쯤 되고 보니, 신부님이 무심코 찍은 ‘요안나’란 본명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 본명이 되기 위해 나를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탄생 이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400여 년 전 프랑스 디죵에서 태어난 성녀 요안나와 40여 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온 문 요안나 수녀님이 이렇듯 인연의 고리로 나와 엮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필연은 우연의 연속’이라던 밀란 쿤데라의 얘기가 오늘따라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그동안 요안나란 본명으로 살아온 지도 어언 이십 여 년이 흘렀다. 그 중에 이런 인연, 저런 인연 소중한 사람도 많이 만났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인연설이 아니요, 만남의 미학을 예비해주신 하느님의 섭리라는 걸 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내 생애 하느님은 또 어떤 계획을 갖고 소중한 인연,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하고 계실까. 그때까지 내 본명이 욕되지 않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