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 올리는 연서 / 지희선
아버지!
삼라만상은 잠이 들고, 지금 눈 뜨고 있는 것은 오직 별님과 달님, 그리고 당신께 연서를 쓰려는 저 뿐이옵니다.
아버지!
기억하세요? 최초로 절 아버님 곁으로 불러주셨던 때를요. 그 날 저는 단발머리를 날리며 우리 집 앞에서 친구들이랑 고무줄뛰기를 하고 있었죠. 학교에 갔다 온 걸로 봐서 수요일로 기억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죠. 그때, 길을 지나가던 한 젊은 여자 분이 길을 멈추고 저희들에게 물었었죠.
“너희들, 나 따라 교회 가지 않을래?” 그녀는 허리를 굽혀 우리 꼬마들과 키를 맞추며 눈을 응시했죠. 그 눈빛! 부드럽고도, 그윽하고, 깊었던 그 눈빛! 사랑이 가득 담겨있던 그 다갈색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때 저는 ‘사로잡힌 자’가 되어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죠. ‘아, 천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저는 속으로 외쳤죠. 그리고 제가 급히 말했죠.
“잠깐만요! 우리 어머니께 여쭤 보고 올게요! 가지 마세요! 네?!” 그리고 바람처럼 달려가 어머니께 여쭈었죠. 교회 따라 가도 좋으냐구요. 어머니는, “교회 가면 좋은 거 배우니까 좋지!” 하시면서 흔쾌히 허락하셨지요.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 집안의 사람이면서 그토록 흔쾌히 허락해 주신 것은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저를 부르신 ‘최초의 부르심’이었지요. 그때 ‘응답’했던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베드로에게 그물을 버리고 따라오라던 예수님 모습이 겹쳐 떠오르곤 해요.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 분을 따라간 베드로의 응답이 마치 내 눈을 응시하며 따라가자던 그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과(교회 가서야 그 분이 주일 학교 ‘반사’선생님이란 걸 알았지요.) 제가 하나의 등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저를 당신의 딸로 삼아 주시고 지금까지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것 너무 감사드려요.
아버지!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계속 편지를 써 나가다 보니, 제 육신의 아버지가 생각나네요. 지금 한국에 계시고 벌써 여든 아홉이 되셨어요. 점점 시력을 잃어 어쩌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이젠 아버지를 뵈러 한국에 나가더라도 저를 못 알아보실 거 아니에요.
아버지!
언젠가 아버지의 마지막 부르심을 받고 당신께 나아갔을 때 당신이 절 못 알아보시면 그때는 제가 더 섧게 울겠지요. 아버지, 당신은 완전한 분이시니, 제 육신의 아버지처럼 눈멀어 절 울리지 않으시겠지요? 제발, 당신만은 눈멀지 마세요. 그리고 한국에 있는 제 사랑하는 아버지도 더 이상 눈멀지 않게 주님께서 지켜주세요. 당신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절 사랑해 주셨던 분이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아버지!
언젠가 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제 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어요. 제가 전차를 타고 어머니 일터로 가고 있는데 차창 밖을 아버지가 길 저 편 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시고 있는 거에요.
전차 안이라 “아버지!”하고 소리쳐 부르지도 못하고, 점점 멀어져만 가는 아버지를 보자 제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집을 향해 동쪽으로 가는 아버지와 엄마 가게를 향해 서쪽으로 가고 있는 나. 멀어져 가는 거리만큼이나 서러움도 커져 ‘아버지, 아버지......’ 하며 소리 죽여 울고만 있었답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과 반대 방향으로 가 당신과 더 멀어지면 그때는 어쩌지요? 세상은 나를 태우고 떠나던 전차처럼 자꾸만 아버지하고 떼어 놓으려고 그러네요. 제발, 저를 꼭 붙들어 주세요.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해 주세요.
나를 위해 늘 계획하고 계시는 사랑의 아버지, 저도 정말 사랑해요. 그거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