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들어가서 채 한 달도 안 됐을 때다. 공부하는 걸 좋아했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쳇! 제 나랏글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영어 공부!' 그 날 이후, 영어 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 운명은 그때부터 삐끌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과목에서 점수를 올려 놓아도 영어때문에 평균 점수를 까 먹기 일수였다. 자연히 학급 등수도 쳐졌다. 그 이후로도 영어는 계속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듯, 영어라면 젬병이던 내가 미국으로 이민 와 영어로 말하고 영어권에서 살 줄 몰랐다. 하지만, 오고 보니 운 좋게도 제2의 서울이라는 '나성구' LA다. 불안감은 곧 사라졌다. 이민 오면, 누구나 등록한다는 어덜트 스쿨도 가지 않았다. 한 일 년 살면, 현지 영어를 배우고 발음도 돌돌 구르겠지 싶었다.
그런데 웬 걸? 그건 큰 오산이었다. 코리아 타운에 살면서 한국 마켓에다가 한국 성당 그리고 일터도 한국 신문사다 보니 하루종일 영어 한 마디 쓸 일이 없었다. 난 그저 타성에 젖어 살았다.
한 일년 쯤 지났을까. 1984년 LA 올림픽 게임을 앞두고 '올림픽 에세이' 취재를 나가던 길이었다. 차가 붉은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섰다. 푸른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던 내게 갑자기 내면의 소리가 들려 왔다.
'희선아,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미국 왔으면 미국 사회도 좀 알고 미국 사람들도 만나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우물안 개구리로 살 거야?'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여긴 미국이지!' 내 인생에 등 색깔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단, 어덜트 스쿨 영어 클래스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일터도 미국 직장으로 바꾸기로 했다. 신문을 뒤적이던 중, 그래픽 디자인 스쿨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그리는 일은 복잡한 영어가 필요 없을 것같고 종이 하고 노는 거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 싶었다.
그래픽 디자인 스쿨을 마친 뒤, 동기 세 명과 함께 취직을 했다. 가 보니 엄청 큰 인쇄소였다. 마켓 광고지를 전문으로 다루는 회사였다. 종이가 감겨 있는 기계가 어찌나 큰지, 완전 대형 공장이었다.
명실공히, 우린 미국 사람과 주류 사회에 어울리며 일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월급도 기자보다 훨씬 많은 데다가 작업 환경도 월등했다. 일도 어렵지 않았다. 준비된 자료함에서 필요한 그림과 맞는 가격표를 찾아와 보기 좋게 나열하면 되는 거였다. 우리 중엔 미대 나온 화가도 있었지만, 전공과는 관계가 없었다. 또닥거리는 영어도 일 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직장이 디즈니 랜드 근처에 있어, LA에서 가자면 프리웨이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게다가, 세 명이 한 차로 움직이는데 운전하는 친구가 결근하면 우리 두 명도 덩달아 결근을 해야만 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미대 출신인 친구와 나는 겁이 나서 프리웨이 운전을 못할 때였다.
딸아이가 독감에 걸려 학교도 못 가고 거의 일주일 넘게 앓게 되자, 오래 쉰 후유증인지 돈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직장이 너무 멀기도 하고, 프리웨이 운전을 못해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다시, 전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 미국 경기는 좋고 나이도 삼십대 초반이라 걱정은 없었다. 이것 저것 생각하던 중, 이민 처음 왔을 때 동생이 해 주던 말이 떠 올랐다.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던 동생이다.
여긴 어줍잖은 월급쟁이 보다 기술직이 최고란다. 네일 라이센스 하나 따서 비지니스 함께 키워보자고 했다. 게다가, 네일은 비유티 칼리지 가서 3개월만 공부하면 되니 지겹지도 않을 거라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손재주도 없거니와 한국적 사고 방식에 갇혀있던 나는 그 계통의 일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신문사였다.
그런데 이번엔 비유티 계통에 구미가 당겼다. 비유티 필드가 엄청 크다는 것도 좋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미국 생활 3년이라고, 눈이 뜨이고 생각에도 변화가 왔다. 기술과 제품 판매를 접목하면 개인 비지니스로도 재미있을 것같았다.
일단,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명성 있던 야마노 비유티 칼리지 네일 클래스에 등록했다. 영어 설명을 반은 알아 듣고 반은 놓쳤다. 실기는 눈으로 보고 하는 거라, 별 어렵지 않았다.
정말, 손톱에 불과한데도 사람의 몸 일부를 직접 다루는 직업이라, 거의 준 의사급 질문들이다. 손가락을 펴게 하는 뼈 이름은 무엇이며 모으는 뼈 이름은 무엇인가. 서비스를 거절해야 하는 질병은 등등. 긴 용어는 발음조차 어렵건만, 신체 구조와 화학 제품까지 죄다 영문으로 외워야만 했다. 시험 공부 시간이 짧은 것만 생각했지, 머리에 쥐내릴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영어로 150문제라니, 답 찾기는커녕 질문과 예문 읽는 것만 해도 시간이 다 지나갈 판이다. 다행히, 통역사를 대동할 수 있단다. 통상 통역사 사례비는 $300. 아파트 2베드룸 반달치 렌트비다. 난 아예 영어 잘 하는 한의사 친구에게 책을 줘 버렸다. 답도 같이 찍어 달라는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이 친구 더듬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시험치는 내내 날 윽박질렀다. 'Free edge'가 뭐냐는 답은 '손톱 끝 하얀 부분'이다. 그런데 'free'는 '자유, 'edge'는 '끝'. "자유로운 끝이 뭐냐?"고 통역해 주며 답을 찍으란다. 허, 참. 어려운 영어가 더 헷갈렸다. 우여곡절 끝에, 이론 시험을 통과하고 연이어 있는 실기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 자리서 바로 라이센스를 받아 왔다.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동생 샵에서 함께 일하다보니 애초의 내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인 타운에 위치한 동생 샵에는 100% 한국 손님만 왔다. 6개월 초보자 출신임에도 일단 베벌리 힐스로 진출하자는 결심을 했다. 나는 겁도 없이 LA Times를 펼쳐 들고 구인 광고란을 훑기 시작했다.
B, B, B... 비유티 살롱을 찾는 거였다. 그때, 딱 하나가 눈에 띄였다. Georgette Klinger! 얼마나 유명한 지는 몰라도 로데오 일번지에 있었다. 베벌리 힐스 심장부다. 전화를 걸어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막상 가 보니, 티파니 바로 옆 가게다. 입구에 높이 솟아 있는 은빛 철문은 어린 날 보았던 솟을 대문을 연상시켰다. 무슨 은밀한 비밀들이 많은지 바깥 창문은 빼꼼히 얼굴만 내밀 정도로 조그많다. 일단, 문을 밀고 들어섰다.
단발머리 금발 여자가 짙은 코발트 빛깔의 긴 스카프를 두른 채 나를 맞이했다. 이름은 패트리샤, 총 매니저라며 소개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질문을 던졌다. 주로, 기술적인 파트를 중점적으로 물어봤다.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I can do라 답했다. 양심상, 'well'은 붙이지 않았다.
영어는 잘 못해도 인터뷰할 때는 자신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인터뷰를 통과하고 취직을 했다. 여기는 한번씩 직장 바뀔 때마다 몸값이 뛴다더니 과연 그랬다. 죠지트 클링거는 스킨 케어 제품 판매와 살롱을 함께 운영하는 유명 프랜차이즈였다.
죠지트 클링거를 시발로, 크리스토퍼, 죠세 이벨 등을 거치는 동안 영어 실력과 기술도 늘어갔다. 일도 재미 있고 말로만 듣던 월드 스타들을 옆집 친구처럼 만나 노닥대는 것도 즐거웠다. 실린 디온, 엘톤 죤, 리즈 테일러, 제이미 리 커티스, 제인 폰다, 파라 포셋... 심지어, 휴 헤프너 와이프 킴블리까지 바디 가드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겸손하다. 또닥거리는 내 말에 함께 웃고 울어 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게 언어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소통이 더 중요함을 배운다. 다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미국은 제 밥 제가 챙겨 먹어야 하는 곳이다.
비유티 필드에서 일한 지 삼십 년. 몇몇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매번 평균 점수를 까 먹고, 내 인생의 발목을 잡아 끌던 영어. 아직도 또닥거리는 영어로 환갑 진갑 다 지나도록 밥 먹고 살고 있으니 신기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