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는 나의 자장가였다. 새소리로 눈을 뜨고, 새소리에 잠이 들었다. 수풀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소리, 깊디깊은 심연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영혼을 울리는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나는 자랐다.
백문조, 금화조, 십자매, 종달새, 카나리아…. 아버지는 여러 종류의 새를 기르셨다. 그러나 봄이면 보리밭 고랑에서 종달새 새끼를 주워 오시곤 했다. 나는 어린 것들이 불쌍했다. 새끼를 찾아 울고 있을 어미가 떠올랐고, 푸른 창공을 날아야 하는 태생을 좁은 새장에 가두는 게 매몰스러워 보였다. 부리에 먹이를 넣어주면서 나는 새끼가 얼른 자라기를 바랬다. 어떤 녀석은 며칠을 못 견디고 죽어버렸고, 어떤 녀석은 모이를 갈아줄 때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몇 달 후, 감옥인 줄도 모르고 신나게 곡조를 빼는 녀석도 있었다.
새소리를 듣고 자라선지, 아님 새를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인지, 나도 새소리에 푹 빠졌다. 그 중에서도 종달새소리가 뛰어났다. 고가에 거래되는 카나리아보다 수수한 시골뜨기 종달새의 가창력은 기가 막혔다. 고만고만인 실력으로 노래하는 뭇새들과는 달리 종달새는 높은 하늘에서 노래한다. 모두를 제압하는 위력이 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5월 초, 꾀꼬리 울음소리가 동네를 뒤흔들 때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저 소리 들어봐라, 또 왔다. 시오리 밖까지 울리는 소리란다. 꾀꼬리소리가 제일이야. 하도 소리가 좋아 소리꾼들이 꾀꼬리를 흉내내고 싶어 한단다.”
실제로 아버지는 친구들과 함께 산성에 올라가 소리공부를 하셨다. 음보가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꾀꼬리처럼 툭 트인 소리를 내려 애를 썼다. 그때까지 나는 꾀꼬리를 본 적이 없었다. 늘씬한 몸매와 기다란 깃털, 맑고 고운 소리로 우짖는 새. 파랑새였다가 노랑새였다가, 새하얀 깃털로 변하는 상상의 새, 그것이 마음 속에 그려보는 꾀꼬리의 형상이었다.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셨다. 어느 날, 하늘의 극락조가 내려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이듬 해였던가,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인 아침이었다. 정원에서 새가 울었다. 새하얀 깃털, 예전에 본 적이 없는 새 한 마리가 옥구슬 구르듯이 울었다.
“아버지다!” 동생과 나는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틀림없이 우리를 보러 오신거야.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나뭇가지에 놀던 새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새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사람도 새가 되어 환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여러 번 새를 만났다. 눈 내린 날 아침의 그 하얀 새였다. 쭈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로 새를 안았다. 새의 얼굴에 내 볼을 비비면 새는 무슨 얘기라도 하는 듯 꾸룩꾸룩 울었다. 꿈에서 깨어나선 새의 부드러운 깃털과 따뜻한 온기를 느끼려고 볼을 문지르곤 했다.
지난 봄, 이른 아침이었다. 뒷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깼다. 꿈길처럼 아득한 소리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저 소리는…. 새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검은 날개, 노오란 몸통의 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었다. 저 소리, 어릴 적 내가 듣던 소리, 반 백년 까마득히 잊은 꾀꼬리 소리였다. 귓속 어두운 곳에 차곡차곡 접혀있던 소리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듯, 명창이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소리를 잡아채는 듯. 서둘러 사진을 찍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틀림없는 꾀꼬리였다. 영어로는 오레올인, 꾀꼬리는 가까운 아리조나에서 겨울을 난단다.
입으로 부는 바람이 퉁소의 떨판을 울리는 것처럼, 꾀꼬리는 온몸으로 창공을 향해 노래한다. 창공이 공명통인 셈이다. 그럴 때, 사랑의 찬가가 울려퍼질 때, 창공의 떨림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산천초목을 감동시킨다. 5월의 정령이, 붉은 두견화 꽃잎이, 연초록 잎새의 싱그러움이 그 안에 녹아 있기에. 지렁이와 온갖 벌레들이 그 안에 꿈틀거리기에. 나비가 날듯, 얼음쟁반에 구슬이 구르듯,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의 정열이듯. 그래선지 꾀꼬리소리는 춤을 닮았다. 열정의 탱고, 사람의 넋을 홀리는 춤사위다. 아름다움의 극치요, 시름을 씻는 카타르시스의 결정이다.
꾀꼬리소리는 영혼의 부름이다. 숲이, 자연이, 조상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할 것이다. 마침내 득음을 하셨구나, 내게 자랑하러 오셨구나. 그 경이로운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꾀꼬리소리가 보리밭 고랑에 푸른 물결을 출렁이고, 온 산을 연초록으로 물들이던 봄이었다. 나는 새소리를 이불처럼 끌어당기고 늦잠을 잤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버지는 보리이삭을 꺾어들고 집으로 오시고, 어머니의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나를 깨우던 유년의 봄날….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보물이자 은총이다. 온갖 소리와 향기, 맛과 촉감이 숭어처럼 살아 펄떡이던 곳, 웃음과 눈물로 온몸을 적셔주던 고향은 이제 아련한 전설로 남아 있을뿐 지도 상에는 없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더욱 그립다. 아리 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