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토요일 새벽 네 시 반. 여늬 때와 달리 오늘은 한 시간 일찍 서상호 코치를 따라 나섰다. 내년 3월에 있을 LA 마라톤준비를 위해 장거리 훈련을 하고 있는 멤버들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한 달 앞서 2월에 열리는 헌팅톤 비치 마라톤에 등록을 하고서도 연습을 게을리한 죄책감에 선듯 나선 첫길이다.
태양은 어디선가 어둔 하늘 끝자락을 들추며 기지개를 켜고, 차량은 이른 새벽부터 삶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문득, '사막은 살아 있다'라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목이 떠오른다. 살아있는 새벽이다. 아니, 용트림을 하는 새벽이다. 여기에 나도 한 일원으로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날씨는 쌀쌀하나, 마음은 뜨겁고 몸은 가볍다. 서코치가 우리 초보자를 위해 마일당 12분 정도로 뛰어준다. 사랑으로 봉사해주는 서코치를 볼 때마다 고개가 숙여진다.
태양을 등 지고 나보다 앞서가는 그림자를 따라 언덕을 오른다. 얼마 전까지도 불가능으로 보였던 오르막 길이 가능성을 보이며 가슴을 열어준다. 드디어 내리막 길. '내리막 길'인데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방심하고 뛰다 보면 무릎 충격은 더크고 부상의 위험도 더 많다는 걸 이내 배운다. 내리막 길일수록 가슴을 활짝 펴서 배짱좋게 바람과 맞짱을 뜨야 한다. 이런 배포유한(?) 자세는 삶의 내리막 길에서도 한번 적용해 봄직하다.
오늘은 포장도로를 버리고 언덕 쪽 구불대는 흙길을 따라 달렸다. 1마일 정도 더 먼 길이라 한다. 가파른 언덕길에서는 달렸다기 보다 경보 대회처럼 빠르게 걸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처음으로 한의사 강원장과 나란히 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집안 어른 중에 월북한 문학가가 있어 이야기가 더 무르익었다. 동물원을 돌아 기차 박물관을 지나고, 불가능의 상징처럼 보였던 언덕길을 오르고 흙길을 돌아 골프장 옆길로 빠져나왔다. 장장(?) 7마일. 1마일도 헉헉거리던 내가 10개월만에 이 정도 해낸 것도 어찌보면 장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멤버에 비하면 시간이나 연습량에 있어 '조족지혈'이다.
오늘도 역시 흑인 드러머 라빈은 두둥거리며 숲속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벌써 십 삼년 째라고 한다. 우리가 소리쳐 그의 이름을부르자, 그도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두루루 숲속을 울리며 화답한다.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니, 채 일곱 시도 안 됐다. 매번 간식을 나누는 벤치엔 아무도 없었다. 각 자 자기 연습량을 위해 아직도뛰고 있는 모양이다. 추운데서 혼자 떨고 있을 필요가 있나. 내친 김에, 그리피스 팍 입구까지 뛰어갔다 오기로 했다. 동쪽 방향을 향해 1. 5마일을 달려갔다가 다시 해를 등지고 1. 5마일을 되돌아 오는 3마일 코스다.
이제는 태양과 맞짱을 뜨야 한다. "태양을 향해 달려라!" 일성을 지르며 냅다 달렸다. 뱀이 몸을 튼 듯, 구불구불 S자 길이 나온다. "내일을 향해 쏴라!" 또다시 일성을 외치니 에너지가 솟는다. 혼자 뛰는 길, 걷고 싶을 땐 걷고 뛰고 싶을 땐 뛴다. "나는 자유로운 러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입구. 'GRIFFITH PARK'이라는 황금색 현판이 태양을 받아 더욱 빛난다.
바쁠 것도 없는 시간, 카카오 스토리를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뛰면서 놓쳤던 자잘한 것들이, 걸으니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갖다 놓은 사랑의 물컵도 보인다. 걷다가 뛰다가, 눈을 붙들면 사진을 찍었다. 태양을 등지고 원위치로 돌아올 때는 나의 긴 그림자가 다시 앞장을 섰다.
혼자여서일까. 색채 없는 나의 긴 그림자가 무채색의 고독을 외친다. 인간 근원적인 고독과 상실의 고독 모두가 어우러진 듯한 이 '무채색 고독'의 정체는 무엇인가. 삶의 색채를 송두리채 빼앗긴 고독의 결정체? 생전에 얼굴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나의 그림자. 난 영원히 그의 표정을 모르리라. 내가 아무리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어도 그는 그의 무채색 옷, 단벌로 나를 따라 나서겠지. 내가 걸으면 함께 걷고 내가 뛰면 함께 뛰어주는 나의 그림자, 나의 분신. 그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며 견뎌내는 또 하나의벗, 고독의 반려자다. 내 삶이 다하는 날, 그도 내 곁에 따라 눕겠지. 참으로 귀한 친구다. 온갖 상념이 뇌리를 스치며 바람에 서걱댄다.
순간, 전기 감전으로 한 팔을 잃었다는 인터뷰어가 떠올랐다. 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 편집국장을 하던 시절 , 숨은 봉사자로만난 사람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시절 감전으로 한 팔을 잃었다는 중년 남자. 한 팔이 없는 자기 그림자를 보며 한없이 울었단다. 그가 한 팔을 잃었을 때, 그의 그림자도 한 팔을 잃었다. 그가 어둔 뒷골목만 찾아 걸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함께 걸어 주었다. 뿐만 아니다. 그가 울 때, 그의 그림자도 무채색의 슬픈 울음으로 어깨를 들먹였다.
그가 죽을 때 그의 그림자도 관 속에 따라 누을 참이었다. 그의 한 팔 없는 그림자는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죽으리라 굳게 약속했다. 팔 잃은그에겐 유일한 벗이었고 배반하지 않을 위로자였다. 그의 그림자는 색채 잃은 그의 삶에 함께 무채색으로 어둔 삶을 살아주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다녔다. 단, 한 번도 그를 혼자 버려둔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한 팔 그림자를 앞세우고 세라 피정의 집을 찾았다. 산타 모니카 바닷가를 따라 말리부 초입에 이르면, 오른 쪽산정상에 우뚝 서 있는 옛수도원이었다. 성령 기도회가 뭔지도 모르고 휩쓸려 따라온 자리였다. 사람들이 울며불며 통성기도를해도 굳게 닫힌 마음문은 열리지 않았다. 주님도 기다려 주었고, 그의 그림자도 숨을 죽인 채 기다려 주었다. 결국, 사흘만에 그는 터져 버렸다. 그 날은 피정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와 목 놓아 울었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어깨를 들먹일 때마다, 잃어버린 빈 팔소매가 흔들렸고 그림자도 따라 덜렁댔다.
그는 신앙을 찾고서야, 무채색의 삶을 버리고 명도 높은 봉사자의 삶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화려한 채색을 고집하지 않았다. 여전히 변치 않는 무채색의 모습으로 그의 삶을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대패질을 하며 십자가를 만들고 기도대를 만들 때, 그의 그림자는 미소 지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현숙한 아내인 양 조용히.
나의 그림자가 앞서 뛰어간다. 죽는 날까지 나와 동고동락할 벗이다. 내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는 무채색을 고집하며 그의 모습 그대로 나와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내가 뛰면 같이 뛰고, 내가 걸으면 같이 걸으면서 내 삶의 속도를 충실히 지켜줄 것이다. 해를 등지고 뛰는 나의 모습으로 그림자의 키가 두 배는 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키를 낮추고 제 주인님 앞에 엎조릴 거다.
다시 만남의 장소로 돌아오니, 오늘 따라 즉석 호떡 파티란다. "웬 떡?" "호떡이야!". 낄낄, 껄껄. 즐겁다. 웃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함께 뛰는 마라톤, 즐거운 인생'이라고 적힌 화려한 현수막이 무채색의 긴 그림자와 대비를 이룬다. 무채색의 고독, 나의 그림자는 함께 웃지 않았다. 그는 친구가 없다. 오직 나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