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띠노!
   이삿짐을 챙기다 멈추고 누어서 이틀 째 쉬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게를 쉴 예정입니다. 짐을 챙기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아서입니다. 임시로 옮기는 혼잣짐인데도 왜 이리 많지요?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군요. 아마도 오랫동안 나와 정들여 온 것이라 그런가 봅니다.
   '필요 없는 건 다 버려!'
   사람들은 늘 쉽게 말하지만, 입던 옷 쓰던 물건 하나에도 나와 더불어 온 시간 때문에 쉬이 폐기처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저는 확실히 실용주의자가 아니라, 감성주의자입니다. 아니, 싸구려 감상주의자라고나 할까요. 
   언젠가 제가 쓴 수필 '깨진 바가지'를 보고 문우 한 사람이 잘못 되었다고 하더군요. 내가 아끼며 썼던 $2짜리 플라스틱 바가지 이야기였는데, 금이 가서 더 이상 쓸 수 없어 폐기처분하게 된 내용이지요.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상당히 감상에 젖어 썼지요. 상추도 씻고 쌀도 씻고 다용도로 아끼며 썼던 바가지라, 비록 생명 없는 무생물이라도 이별의 아픔이 컸던 거지요. 
   그런데 그 문우는 그만큼 사랑 받고 다용도로 쓰였으면 제 소임을 다 하고 가는 건데, 소임을 다 하지 못하고 간 듯이 쓴 게 잘못이라는 거지요. 듣고 보면,그 말도 그럴 듯해요. 겨우 $2짜리 플라스틱 바가진데, 근 3년이나 이래저래 다용도로 알뜰살뜰 쓰였으니 제 소임 끝내고도 주리가 남는 행복한 바가지일 수 있어요. 그럼에도 제 생각엔 내 부주의로 깨지만 않았던들, 나와 더불어 더 오래 함께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자책감과 아쉬움을 버릴 수 없더군요. 
   부모가 90을 넘기고도 더 살아 백 세를 넘기고 돌아가셨다 해서, "마, 그만큼 살았으면 됐다!" 하고 속 시원해 할 자식이 몇 있겠습니까. 남들은 위로랍시고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이를 테면, 내가 타던 자동차를 십년 넘게 타고 새 차로 바꿀 때, 저는 새 차를 산 기쁨보다 헌 차와 함께 한 추억과 시간 때문에 오랫동안 그 차를 어루만지고 있는 심정과 같은 거지요.
   마침, 수필 '깨진 바가지'를 쓸 때는 우리 집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판 상태라, 곧 형체없이 우리가 살던 집이 허물어질 운명에 있었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가 함께 엮어 온 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이 사라져 없어진다는 게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더라구요. 집값이 올라, 훨씬 더 좋은 집을 살 수 있었음에도 기쁨보다는 왜 슬픔과 아쉬움으로 뒤척이며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까요. 
   이사한 지 한 2년 쯤 됐나 봐요. 저랑 함께 옛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곱 살 손녀가 그 집이 그리운지, 다시 가 보자 하더라고요. 막상 가 보니, 우리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거기엔 콘도 서른 세 채가 버젓이 들어서 있더군요. 길 이름도 바뀌었어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손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는 안 올 거야! 다시는 안 올 거야!!" 하며 막 흐느껴 울더군요. 제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그 이후로 거길 다시는 가지 않았죠. 그 마음, 그 기분, 그 느낌을 제가 왜 모르겠어요. 설명이 필요없는 거지요. 
   아, 그러니까 또 하나 생각이 나네요. 어머니 이야기에요. 수다 떨어도 더 들어주실 거죠? 제가 수필 '엄마의 채마밭'에서 약간 언급했던 내용이에요. 어머니가 살던 노인 아파트 주인이 바뀌면서 소일거리로 가꾸던 채마밭이 없어지게 되었죠. 채마밭을 없애고 주차장을 만들 계획이었나 봐요. 
   없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들이 노인들의 감성에 얼마만한 영향을 끼치는지 주인은 생각지도 못한 거지요. 곧 없어질 채마밭엔 날이 갈수록 잡초만 무성해지고, 호스를 빼 버린 수도 꼭지는 누렇게 녹이 슬어갔죠. 어머니는 애지중지 가꾸었던 채마밭이 흉물로 변해가자,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우정 먼길로 돌아서 다녔지요. 
   주차장 계획은 점점 늦어져 한 해가 지나 봄이 다시 왔어요. 어느 날,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어머니가 어린 떡잎 두 장을 발견하게 돼요. 바로 해마다 풍성한 수확을 주었던 호박 떡잎이었죠. 잡초로 무성한 밭에 어린 떡잎은 새 생명의 부활이었지요. 
   어머니는 그때부터 우유통에 물을 받아다가 밭에 물을 주기 시작했어요. 무릎이 아프신 어머니가 열 번 스무 번을 오가며 우유통으로 물을 나르는 거지요. 그러자, 잎이 나고 줄기가 뻗더니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잡초 밭에 물을 준다고 비아냥거리던 할머니들도 호박 선물을 받고는 함박웃음을 지었지요. 
   시절이 다 되어, 호박 줄기가 시들고 마지막 호박을 거둔 날, 어머니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 한 수를 쓰게 됩니다. 시든 호박 줄기조차 거두지 못하시고 죽어 거름이 되라며 두고 오신 어머니의 애잔한 심정이 녹아있는 시였어요. 그리고 그 끝 귀절이 찡해요. '... 세월은 거스릴 수 없는 듯 군대군대/시들어 가는 호박잎/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 아마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 할 거야.'
   일본식 교육을 받은 팔순 노인에게 ‘군대군대’란 맞춤법이 틀린 게 뭐 그리 험이 되겠어요? 어머닌 잡초 밭 속에서 호박 떡잎을 보며 생명의 환희를 느꼈고, 시들어 가는 호박잎을 보며 생명의 소멸을 느끼셨겠죠. 그리고 그 호박잎의 신세가 머잖은 날 당신의 모습이라 여기셨나 봐요. 사실, 어머닌 그 시를 쓰신 지, 6개월 뒤에 돌아가셨죠. 여든 셋. 어머니의 봄날이 그때 끝난 거지요. 채마밭을 잃은 어머니의 떡잎은 다시 필 줄 모르더군요.
   곧 사라질 목숨, 없어지는 것에의 애틋함은 어머니의 핏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어요. 나로부터 손녀에 이르기까지 우린 사라짐에 대한 면역을 태성부터 약하게 타고 난 거죠. 감상적이란 말은 계산할 줄 모르는 정의 흐름 때문이 아닐까요? 
   "미국은 소비 국가야. 버리는 연습부터 해야 해. 그래야 경제가 돌아!" 이민 초기에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랍니다. 그러나 근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래 된 것을 쉬이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혹자는, 욕심이 많다거나 구질구질 하다 하겠지요. 그리고 이런 비실용적 감상에 젖어 있는 나를 헛웃음치며 보겠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물건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으니- 거의 이틀 째 이삿짐 정리에 손을 놓고 있어요. 이 많은 물건 중에 정말 어느 놈이 택함을 받아 LA로 가 함께 살 지는 저  위에 계신 한 분밖에 모르실 거에요. 저도 알 수 없으니까요.
   마르띠노!
   참 한심한 여자지요? 이삿짐 정리는 정말 저에게는 'Impossible Mission' 인 것같아요. 이제 수다는 그만 떨고 짐이나 빨리 싸라구요? 어제는 버려두고 오늘을 취하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팝송 'Time to Say Good Bye' 라구요? 
   그것보다, 깊은 잠을 먼저 청해야 겠어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거든요. 삼십 년간의 기다림은 쉬워도 삼일간의 기다림은 마치 천년 같아서, 그 또한 이삿짐 정리처럼 'Impossible Mission' 이네요.
   내 소지품들도 내적 충만한 기쁨으로 무소유의 선물을 줄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러면, 저는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사랑 하나 가슴에 안고 표표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수다는 끝이 없고 밤도 많이 깊어졌네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 겠어요. 시간이 말을 해 주겠죠. 깊은 눈매로 애정 담뿍 담고 제 수다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