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일요일. 2016년 들어 처음 도전하는 헐리웃 하프 마라톤 대회날이다. 어제 밤부터 내리던 비가 새벽이 되어서도 계속 내린다. 남가주 메마른 땅을 생각하면 반가운 비임에도 마라톤 대회를 앞둔 나로선 걱정이 앞서는 비다. 달리는 동안만이라도 비가 그쳐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바램이 통했는지 간간히 뿌리는 비. 빗줄기가 비워주는 공간 사이로 사람들의 함박 웃음과 왁자한 대화들이 바람처럼 난무한다. 지난 겨울, 추위를 핑계삼아 연습을 게을리한 탓에 흥분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제 내가 산 모습의 결과물이라던가. 과연 명언이다.
그나저나, 거센 비와 찬 바람을 대비하여 가지고 온 소지품을 맡겨야 하는데 출발선에 이르도록 옷 맡기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출발선이 아니라 피니시 라인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대회때마다 알아서 안내해 주는 코치님과 선배 선수들에 묻혀온 터라, 굳이 소소한 것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LA 러너스 비공식 대회라 코치도 없고 우리 팀 선수도 아홉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때문에, 참석 선수 자신이 모든 걸 챙겨야함을 뒤늦게 알았다. 역시 준비가 미흡했던 내 탓이다. 다음에는 안내서를 세세히 읽어보고 와야 겠다. 실수가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됨을 새삼 깨닫는다.
곧, 출발 신호가 울릴 텐데 피니시 라인까지 갔다 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결국은 몇 블럭이나 떨어져 있는 피니시 라인까지 가방을 든 채로 뛰어야할 판이다. 우스꽝스런 모습이지만 어찌하랴. 같이 달려가다 맡기고 다시 되돌아 와 함께 합류할 수밖에. 시간상으로도 5~6분은 손해다.
하프 마라톤 거리는 13.1마일. 헐리웃 마라톤 대회는 이번이 5회째로 도심을 가르며 뛰는 코스다. 한때 내노라 하는 스타들이 누비던 영광과 명성의 거리, 밤이면 번쩍이는 네온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그 유서깊은 거리 헐리웃 블루버드가 주거리다.
이 주거리를 등뼈삼아 양옆으로 뻗어간 생선뼈처럼 코스를 잡아놓은 터라,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 꼬불노선이다. 서쪽 하일랜드에서 동쪽 버질까지 가야하고, 그 사이사이 길 이름도 알쏭달쏭한 북쪽 길에서 남쪽 길로 끊임없이 왔다갔다 해야 한다.
드디어 출발-
거의 15,000명이나 되는 건각들이 순서에 맞춰 힘차게 첫발을 내딛는다.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 나도 급한 마음으로 출발선을 통과했다. 몇 블럭 달려가니 Vine과 남쪽으로 두 블럭 내려간 Sunset 지점에 옷 보관소가 있었다. 빔번호 1111을 대고 급히 헐리웃 블루버드로 되달려 와 합류했다. 약 7분 가량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급한 마음 갖지 말고 내 속도대로 뛰자며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오르막길에서 놓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하여 내리막길에서는 조금 더 빠르게 뛰며 속도조절을 했다. 목표 시간은 내 평소 속도대로 두 시간 삼십 분에서 사십 오분 사이다.
언제나 처음에는 뛸만하다. 고조된 분위기에 워밍업하는 마음으로 뛰니 주변 구경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뛴다. 그러다가, 3마일이 지나고 6마일에 들어서면 슬슬 속도가 붙고 숨도 덩달아 가빠진다. 이때부터 숨을 규칙적으로 고르며 뛸 필요가 있다.
숨 고르기는 배운대로 '칙칙폭폭'을 하든지 '치익칙 폭폭'을 하든지 그건 자유다. 나는 들숨날숨을 길게 혹은 짧게 조정하면서 뛴다. 보폭도 넓게 혹은 짧게 잡으며 코스의 높낮이에 맞춘다. 팔동작도 크게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에너지를 비축하고 싶을 땐 팔동작을 줄인다.
어떤 사람은 달리기를 발로 뛰는 게 아니라, 팔로 뛰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에너지 비축을 위해 크게 흔들지 말라고 한다.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길의 지형과 몸의 지시에 따라 변화를 주며 달린다. 달리기 입문한 지, 이제 겨우 2년. 앞으로도 배울 게 너무 많다.
저 앞에서 연두빛 네온 자켓을 입은 우리팀 박상수씨가 양회장과 함께 열심히 뛰고 있다. 대회 때마다 기발한 행동으로 풍성한 얘기와 웃음거리를 제공해주는 장세인씨도 황반장과 앞서 뛰고 있다. 페이스 메이커로 격려하며 함께 뛰어주는 양회장과 황반장의 모습이 아름답다. 힘들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 러너들 사이에서 우리팀 선수가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서로 힘찬 응원을 나누고 헤어지면 어느 새 없던 힘도 불끈 솟아 오른다.
마지막 3마일 쯤 남긴 지점에 이르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물뿌리개로 뿌리듯 골고루 퍼지며 내리는 비. 흐르는 땀과 열을 식혀주는 고마운 단비다. 모자를 벗고 비를 맞으며 뛰었다. 가끔 얼굴을 들어 흐르는 땀을 빗물에 씻었다. 봄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 박인수가 절창하며 부른 '봄비' 속의 주인공 같다. 달리기 하기에는 최상의 날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2마일 정도는 걷다가 뛰다가 하며 들어왔다. 오늘까지 하프 마라톤 네 번을 뛰면서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역시 몸은 연습량을 정확히 알고 있다.
피니시 라인 사인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이미 완주를 끝낸 김치홍 회장이 달려와 함께 뛰어준다. 고맙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피니시 라인을 힘차게 밟았다.
두 시간 사십 육분. 소지품 가방 때문에 손해 본 시간을 빼면 거의 내 속도대로 들어온 셈이다. 막판에 몇 번 걷지만 않았어도, 작년 십일월에 뛰었던 아주사 계곡의 두 시간 이십 일분의 기록을 깰 뻔했다.
그러나 그다지 아쉽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운동경기처럼, 빠를 때도 있고 늦을 때도 있으리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바로 나를 위해 울리는 종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바로 나를 위해 달리는 것이다. 펀 런이다. 그야말로 내 속도에 맞추어 즐기면서 뛰는 마라톤이다.
이번에 개인 기록을 갱신한 임정숙씨와 신현, 장세인씨 뿐만 아니라 모두 좋은 성적으로 들어왔다. '함께 뛰는 마라톤 즐거운 인생'이란 우리 슬로건처럼 함께 뛰어 더욱 즐거운 인생이다. 홀로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모여 피는 군집의 꽃은 더욱 아름답다.
코 앞으로 다가온 유월의 샌디에고 마라톤을 위하여 힘차게 구호를 외쳐 본다. "런클, 런클,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