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섣달 스무 여드렛날이 내 생일이다. 미국으로 온 이후로는 양력 날짜로 생일을 지낸다. 크리스마스 삼일 뒤라 그런지, 미국 온 이후로, 생일이랍시고 그럴 듯하게 차려 먹어본 적이 없는 것같다. 크리스마스와 함께 그냥 묻혀가 버린다.
이벤트를 좋아하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던 딸은 내년 삼월 도로시 챈들러에서 공연하는 '피가로의 결혼' 뮤지컬 티켓을 사 두었다고 한다. 시갓집 식구들 모인 자리에서 간단히 케잌을 자르고 생일 축하 노래도 들었지만 나는 왠지 절해고도에 혼자 있는 듯 외로웠다.
어머니 없이 맞이하는 두 번 째 생일. 불현듯, 가고 없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생일이면 늘 되풀이해서 들려주던 내 탄생의 이야기는 어머니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었다. 내 생명의 원천이며 내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 그 엄마랑 밤새껏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야기 중간 쯤엔 엄마의 젊었던 날의 삶도 묻혀 나오리라.
산모와 어린 아기를 칼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 밤새 군불을 지펴주던 외할머니 얘기도 필히 나올 터. 아들이 이미 하나 있는데도 딸을 낳았다고 우시던 어머니 등을 토닥이며 효녀 딸이 될 거라며 위로해 주셨다는 외할머니. 천식으로 밤새 기침을 하며 얼마나 군불을 뜨겁게 땠는지, 아기 발 뒤꿈치엔 도장만한 화상도 생겼다. 뿐인가. 외할머니는 겨울 바람을 맞으며 막내딸 산모 뒷바라지를 해 주시다 결국은 한 달만에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진다한들 그 보다 더 할까.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질 잃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잃게 되었으니. 산기가 가시지 않은 몸으로 어머니 시신을 품에 안고 목놓아 울었을 스물 두 살 어린 우리 어머니. 나도 어머니를 잃은 지금에야 그 큰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모님은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늘 내 나이를 묻곤 하셨다. "희선아, 오래 몇 살이고?" " 네, 00 살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 하아-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벌써 00년이 되었구나!" 하시면서 촛점 잃은 눈으로 회억에 잠기곤 했다. 그때마다 나도 덩달아 발 뒤꿈치에 남아있는 사랑의 흉터를 만지며 기억에도 없는 외할머니를 그려보곤 했다. 내 생년을 통해 외할머니 돌아가신 햇수를 세시던 이모님. 그 이모마저 작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굳이 내 탄생의 이야기를 생일 때마다 해 주신 것도 어쩌면 당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나와 더불어 얘기할 어머니도, 내 나이를 물어볼 이모님도 안 계시니...... 여늬 때는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어머니 없는 생일을 맞고 보니 소소한 일들이 모두 그리움 되어 돌아 온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니, 이제는 내 분신인 딸과 손녀에 대한 사랑으로 내 남은 삶을 꾸려가야 할까 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며, 어머니가 애지중지 하시던 앨범을 뒤적이며 옛생각에 잠긴다. 밤이 깊을수록 파도는 더 철썩이고 절해고도의 외로움도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