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기차출근/무지개를 만드는 여인/어덜트 스쿨에서 생긴일/배터리가 다 된 줄 어떻게 아는가?/엄마의 채마밭/죽은 아이들의방/어미의 사계/이승에서의 마지막 성호/달빛 사랑/폐선/눈물은 성수입니다/새벽전람회
기차 출근
차를 역에다 버려두고 기차를 타면서 나만의 사색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그 사이에 잠깐 잠깐 끼어들어 상상은 나래를 편다. 줄 낚시하듯 눈을 먼 풍경 속으로 던져보기도 하고 계곡만큼이나 깊은 사색에 잠기다 보면, 출근이 아니라 마치 여행을 가는 기분이다. 바쁠 것도 없이 쉬엄쉬엄 산마루를 휘돌아가는 기차와 함께 흐르다 보면, 느림의 철학은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기차 출근을 하며 얻는 한 시간 반의 사색 시간. 이 시간은 잠시 순수 인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요, 평화의 시간이다. 짜증나던 먼 길이 너무 짧아 아쉬워진 것도 기차 출근 덕분이다.
기차 출근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 여섯 시 오 십 오 분에 출발하여 랭카스터를 거쳐오는 앤텔롭 밸리 매트로 링크는 일곱 시 십 오 분이면 어김없이 빈센트 역에 도착한다. 일곱 시에 도착한 나는 시골 역 창문에 이마를 바짝 대고 기차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십 오 분간의 이 절실함.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기차를 타고 누군가 내게로 올 것만 같다. 연인인가, 추억인가, 젊음인가.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은 모두가 쓸쓸한 잔영을 남긴다. 응달의 잔설처럼 애잔함으로 떠오르는 눈동자.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늘 길었었다. 오늘따라 스쳐가는 간이역처럼 추억의 장소도 몇몇 떠오른다. 아카시아 휴게소, 에덴 공원, 태종대, 표충사........그리고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걸려있던 행운 다방. 내가 걷던 그 길을 지금은 어느 젊은 연인들이 걷고 있을까.
땡, 땡, 땡, 종소리 울리며 기차가 오고 있다. 마치, ‘아서라, 재가 되어버린 추억은 잊어버려라’하고 경고라도 해주려는 듯.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테이블이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과, 책 한 권, 물 한 병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버릇처럼 이마를 창문에 바짝 붙인다. 이렇게 하면, 바깥 풍경이 거실 벽면에 붙어있는 그림 액자처럼 가깝게 느껴져 좋다.
하늘, 구름, 산, 나무, 집, 땅, 기차....... 이렇게 위에서부터 풍경을 훑어올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반대로 훑어 올라갈 때가 있다. 그 날 그 날 분위기에 따라서 한참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물이 다르다. 요즈음은 유난히 ‘산’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을 바라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서 그때그때 느낌과 생각이 달라진다. 능선을 따라 보는 수평적 방법에 높은 산부터 낮은 언덕까지 보는 수직적 방법, 그리고 앞산에서부터 먼 산 쪽으로 보는 원근법. 여기에다 요즘 화두가 되어있는 낯설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 상식을 벗어나기, 자세히 관찰하기 등등을 합하면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는 관점이나 각도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도 알게 되었다. 한 사물이, 혹은 한 사람이 타자에게 제대로 평가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생각해 본다. 나만 해도, 어떤 사람은 시베리아 삭풍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봄바람의 미풍이라고 한다. 나는 나일뿐인데. 사물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지 않는가.
하지만 섭섭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각각 다른 시선들로 해 얼마나 많은 예술품들이 태어났으며, 실연으로 몸져누웠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 받았던가. 모름지기 모든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줄낚시 하듯 시선을 좀 멀리 던져 본다. 시에라 산맥을 타고 흘러온 산들이 부드러운 능선을 펼치고 있다. 먼 길을 달려온 산들. 세월의 풍화 작용에 마모되고 실키어 둥그렇게 변해버린 산들. 그 산들은 부드러운 능선을 통해 모난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넌지시 알려준다. 나 역시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이방원의 하여가로 바뀐 지 오래 되었다. 흑과 백을 분명히 하고 싶어 목청을 높이던 내가 언젠가부터 ‘회색분자’로 변질되어 있음을 본다. 연륜이 준 선물일까. 요즘의 나는 아른아른한 안개 뒤에 숨어있는 산들이 좋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반쯤 드러나고 반쯤 감추어진 모습이 더 문학적 상징성을 가지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다. 한때는 안개 같이 비밀스런 사람이 싫었지만, 이젠 너무 앞장서서 나 여기 있소 하고 내대는 사람보다는 더 정이 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열두 번도 더 변한다는데,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걸 보니 나도 덜 자랐나 보다.
기차가 돌아들자, 먼 거리를 두고 높은 산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캉캉 춤을 추며 원무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가지고 도도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높은 산’이라? 무언가 암시적이다. 오르고 싶었지만 오르지 못한 산. 늘 바라보고만 있었던 산. 그런 산이 내겐 무엇이었더라? 더듬고 있는 사이, 이태준이 떠오른다. 그는 '내 앞을 가로 막는 것은 모두가 산이었다'고 했었지. 암시적이고 울림이 커 긴 여운을 남겼던 마지막 말.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던 이태준에겐 낮은 언덕도 거대한 산으로 보였으리라. 환경과 시대의 희생자였던 그에게 오늘따라 더욱 큰 연민이 솟는다.
힘든 시대를 비켜갔음인가.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높은 산’은 퍽 친절하게 보인다. 키대로 앞산을 세워두고 낮은 언덕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라고 일러준다. 산과 산 사이론 강물이 흐름직한 계곡도 보인다. 그런데 기차가 끼고 도는 이 시에라 산맥 일대는 사막 기후라 물에는 인색하다. 얼마 전에 노루 두 마리가 계곡까지 내려왔다가 목도 축이지 못하고 되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웠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물 없는 계곡은 가슴을 열어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가슴을 열어주는 계곡'이라. 그것도 메마른 가슴이라. 그러면 산도 '어머니'였던가. 수직으로 깎인 산 속에 무수히 박혀있던 잔돌도 결국은 우리가 어머니 가슴에 못 박았던 무수한 아픔이었단 말이지.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바다를 두고 늘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는 산도 되고 바다도 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오셨구나. 높은 산을 보다가 생각은 계곡처럼 깊어져 긴 음영을 드리운다.
생각을 묵히면, 괜찮은 수필 한 편 얻을 수 있으려나. 문학소녀의 초심으로 돌아가 메모를 해둔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 둔다. 산은 발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다고. 그것도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낯선 마을을 지나며 생각의 찌를 드리우고 풍경을 낚시하는 즐거움. 이 모두가 기차출근이 주는 기쁨이다.
버뱅크를 지나 글렌데일로 기차가 들어서자 바깥 풍경은 도시의 모습으로 바뀐다. 여기저기 큰 건물들이 드러나고 높은 굴뚝이 보이기 시작한다. 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다 슬 옆으로 눕는다. 바람에 거역하지 않는 자세가 보기 좋다. 그러다가 자취도 없이 허공중에 섞여버리는 모습이 마치 황동규 시인의 '풍장'을 연상시킨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서두르지 않건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이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늘 흙이 묻는다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진작에 아스팔트길로 흙을 덮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오늘 또 하루 땅을 힘차게 밟아 봐야겠다. 흙이야 털면 되는 거라고, 호기롭게 다짐해 본다.
땡, 땡, 땡, 기차가 종소리를 울리며 서행한다. 어느 새 유니온 스테이션, 종점역이다. 줄 그어가며 읽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일어나야겠다. 가방을 챙기며 슬슬 내릴 준비를 한다. 한 시간 반의 사색은 너무 짧다. 언제나 입맛을 다시게 한다. 못 다한 사색은 퇴근 시간으로 미루어야겠다. 어둠 속에 지워진 산 대신, 그 때는 산 속에 반딧불 켜고 사는 사람들의 ‘불 켜진 창’으로 들어가 봐야지. 아니면, 달빛 사랑에 한번 젖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즐거운 상상을 하며 군중 속에 나를 묻는다. “자, 희선이! 오늘 또 하루 열심히 사는 거야!" 내가 나를 격려하며 다시 생활 속으로 빨려든다. 노동이 아니라 여행을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
유난히 맑고 바람이 단 아침이었다. 새벽부터 주인장 잠들을 쫓은 닭들은 아침밥을 달라고 날개를 퍼덕이고 염소도 덩달아 부산스럽다. 발목을 적시는 잔디는 무지개 이슬방울을 반짝이며 온천지에 색채의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다. 남편은 닭장으로 가고 나는 스프링클러가 닿지 않는 귀퉁이 꽃밭에 물을 주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늘에 가려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늘 칙칙하게만 보였던 극락조부터 물을 주기 시작했다. 마치 새 이름을 닮은 극락조. 보통 때는 잊혀져있다가도 황금색 꽃을 피울 때면 장미보다 더 환영을 받는 꽃이다. 뜰에 있는 꽃으로 꽃꽂이를 할 때면 제일 먼저 꺾이는 꽃도 바로 이 극락조다. 마치 등불을 들듯 높이 솟은 꽃대궁 위에 피어있는 황금색 꽃은 두 송이만 브이자로 꽂아 놓아도 확실히 중심을 잡아준다.
사시장철 누렇고 칙칙한 잎만 드리우고 있는 극락조가 미운 오리새끼라면 꽃 핀 극락조는 놀라운 변신을 한 백조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 그 황홀한 꽃의 색채로 긴 시간을 기다려준 주인에게 기꺼이 보답한다. 극락조야, 빨리 빨리 더 많이 피거라 하고 속삭이며 물을 뿌려준다. 사실 그 이름값에 맞게 나는 극락조야 빨리 날아라, 훨훨 날아라, 하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날지 못하는 새인 것을. 길을 가다가도 꽃 핀 극락조를 보면 나도 몰래 극락조, 하고 이름을 되뇌게 된다. 마치 나를 극락으로 데려가줄 수호천사인 양 이름이 주는 어감이 정겹다. 다음은 옆에 있는 장미다.
장미꽃은 빨강, 분홍, 진노랑, 연미색 네 종류로 뒤섞여 있다. 단색의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종류별로 심었었다. 이 중에서 나는 연미색 장미를 제일 좋아한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다른 꽃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부드러움이 나는 좋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부드러운 연미색에 홀려 잠시 방심하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겉으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유야무야’로 있지만, 오히려 가시는 튼실히 키워 한번 찔리면 그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나도 최근에 연미색 장미 같은 친구한테 찔려 깊은 상처를 입었다. 본인은 정작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을 터이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오늘도 연미색 친구 주변을 맴돌고 있겠지. 정이 그리워서, 그리고 그 부드러움이 좋아서. 빨간 장미의 강함 속에 오히려 진실이 숨어 있더라는 말은 입 안에 담아두자. 정열적이라 좋다던 것도 잠시, 너무 강해서 싫다며 떠나버린 빨간 장미의 연인들. 오래 기다려줄 수 없는 장미는 그래서 더욱 서럽다. 오늘 따라 빨간 장미의 외로움을 읽었음인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빨간 장미에게 한줄기 물을 더 뿌려주고 싶었다.
호스를 높이 들었다. 물줄기는 반원을 그리며 기분 좋게 뻗어나갔다. 그 순간이다. 높은 물줄기 위에 아침 햇살이 얹히자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와우.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무지개를 보다니. 나는 호스를 높이 들어 무지개를 그리고 또 그렸다. 어느 새 나는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이라. 정말 멋지다. 무지개를 꿈꾸는 여인이 아니라, ‘만드는’ 여인이라니. 무지개 하나에 행복, 무지개 둘에 기쁨, 무지개 셋에 희망, 무지개 넷에 사랑.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무지개를 나누어 주는 행복한 요정이 엉뚱하게도 별을 헤는 윤동주 흉내를 내고 있었다. 꽃들도 화답하듯 방글거렸다. 이 꽃 저 꽃 옮겨가며 무지개를 만들어 주다보니, 아예 창조주라도 된 기분이다. 무지개는 하느님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네 뭐. 그리고 하늘에만 있는 것도 아니네 뭐. 한 마디 할 때마다 무지개는 더 높이 피어올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침 내내 물장난 하는 어린 아이처럼 크고 작은 무지개를 그려댔다. 정말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그래, 사람 사는 거 별 거냐. 이렇게 무지개 만들면서 하루하루 기쁘게 사는 거지. 어떤 시골아이는 웅덩이에 괸 물에서도 무지개를 보고 휘저어 막대기 끝에 무지개를 걸고 갔다지. 어찌 보면 이 지상 처처에 무지개는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무지개를 만들며 살 수 있는 것을. 꽃들에게 나누어 준 아름다운 말들이 어느 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연두색 장미에게도 미풍처럼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은 천지가 무지개 색채다. 잔디에도, 꽃밭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어덜트 스쿨에서 생긴 일
올림픽 길을 따라오다 LA하이스쿨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하교시간이라 왁자하니 떠들며 나오는 학생들과 픽업하러 온 스쿨버스들로 몹시 혼잡스러웠다. 앞 차를 따라 나도 속도를 줄이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팔청춘 딸아이들의 얼굴은 여름날 녹음처럼 싱그러웠고 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녀석들은 야생마처럼 활기차 보였다. LA 하이스쿨은 이민 초기 시절, 내가 다녔던 어덜트 스쿨이라 ‘모교’처럼 애정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까지 사랑스럽다. 새떼처럼 무리지어 나오는 아이들을 보니, 어덜트 스쿨 시절이 흑백 필름으로 되감겨 온다. 벌써 30년 가까운 이야기다.
매사에 서툴고 어리둥절하던 이민 초기시절, 한 일 년 정도 지나면 영어는 '도사’가 될 줄 알았다. 여기는 영어 공용인 본토요 미국 현지인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곳이 아닌가. 귀동냥을 해서라도 영어쯤이야 아이들 말대로 ‘피스 오브 케잌'이다. 엄마 말 듣고 말귀가 트였던 우리말처럼 영어도 생활 속에서 그렇게 배우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려나. 이민 천국의 나라, 미국. 그것도 날씨 좋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햇빛은 쨍쨍, 바닷물은 출렁.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싱싱한 나이 서른. 무엇이 두려우랴. 라디오야, 텔레비젼이야 틀기만 하면 쏼라쏼라 영어 천국이요 그도 안 되면 헐리웃도 가깝겠다 쪼르르 달려가 영화 한 프로씩 떼면 될 터. 허센지 자신감인지 의기충천한 나를 보고 이민 생활 대선배이신 형부는 빙글빙글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한 번 있어 보라우. 십 년 있어도 공부 안 하면 영어가 나오나." 그 말도 귓등으로 흘러버렸다.
그런데 웬 걸? 일 년이 지나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은 웅성웅성하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 통 ‘히어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 MC들은 이야기 하면서 왜 그리도 많이 웃어대는지. 노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잡담 같이 얘기를 나누다가는 갑자기 까르르 웃거나 낄낄댄다. 즐기면서 일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한 마디라도 더 들어 보려고 용쓰는 내 모습은 뭐냐구. 사랑도 기술이라더니 영어도 ‘기술’일 줄이야. 그것도 ‘고급 기술’이라니. 결국, 나도 어덜트 스쿨 코스를 밟으며 제대로 영어를 한 번 배워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때 찾아갔던 곳이 집에서 제일 가까운 LA 하이스쿨 어덜트 클라스였다.
6단계 중에서 알파벳을 배우는 레벨 원을 넘어 레벨 투를 신청했다. 기초부터 철저히 배워보자는 심사였다. 교실 안에 들어서자, 오십 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완전히 인종 전시장이다. 백인, 흑인, 황인종까지 피부색도 갖가지요,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도 몇 개국 언어인지 마치 외계인 세계에 온 듯 정신마저 혼미하다. 과연 미국은 이름 그대로 ‘유나이티드 스테이트’였다. 시골 학교에서 전학 온 촌닭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이 소프라노로 한국말 인사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한 눈에 봐도 성격이 명랑쾌활하게 보이는 여자였다. 그 옆에는 남편인 듯 얌전하게 생긴 남자분이 미소를 띠우며 서 있었다.
“아, 네에......”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 있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좀 어설프게 대답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미세스 유’라고 소개하고 연이어 남편을 ‘미스터 유’라며 인사를 시켰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듯 했지만,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한국 사람은 우리 셋 뿐인 듯했다.
그러나 딱 한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한국사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필리핀이나 월남 사람 같기도 한 까무잡잡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보고도 전혀 아는 척 하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만약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데서 만난 것도 귀한 인연이라며 분명 악수를 청할 터. 우리는 그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찌 하다 보니 그 ‘까무’씨가 우리 옆에 앉게 되었다. 여전히 그도 나도 말없이 공부만 했다. 노랑머리 여 선생님은 재치있게 가르치진 못해도 자기 의무에는 충실한 사람인 듯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까무’씨는 화장실을 가는지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리는 이때다 싶어 한국말로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조용한 ‘미스터 유’는 두 수다쟁이 이야기에 간간이 미소 지으며 비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얘기 도중, 편한 자세로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나는 ‘기이한’ 물건을 보고 말았다. 꺄악! 너무나 놀라 비명 같은 괴성을 질렀다.
“아니, 이거 <동아 사전 > 아냐?”
책과 노트를 가지런하게 포개놓은 ‘까무’씨 책상 위에는 <동아 사전>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어디? 어디?” 하며 ‘미세스 유’가 일어서려는 찰라, 언제 왔는지 ‘까무’씨가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힐난하듯 물었다.
“아니, 한국분이면서 몇 달 동안이나 우리를 깜쪽 같이 속이셨어요?”
“뭐, 일부러 속인 건 아니고. 어덜트 스쿨에 오면서 한국말은 안 쓰기로 다짐하고 와서.........”
이때쯤 뒷머리를 긁적거릴 만도 한데 그는 상투적인 연기를 싫어하는 듯 두 손을 바지 포켓에 꽂은 채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아니, 그러면 <동아 사전>은 안 갖고 오셔야죠? 완전 범죄를 위해서라도.......”
‘미세스 유’가 한 마디 보탰다.
“나, 참. 완전히 범죄자 됐구먼. 허허. 내 언제 맥주 한 번 사리다.”
맥주 산다는 말에 우리는 금방 마음을 풀고 친구가 되었다. 사실 그 정도 쏘아붙였으면 됐다. 재미로 짐짓 화난 듯 더 쏘아붙였지만 그도 왜 그걸 모르겠는가. 속마음을 못 읽으면 진짜 한국 사람이 아니지.
그 이후, ‘까무’씨는 ‘미스터 전’이 되어 제대로 한국사람 행세를 했다. 볼링이 수준급이었던 그는 미안한 마음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종종 우리를 사토 볼링장으로 데려가곤 했다. 때때로 장난기가 발동하면, 나는 “어이! 동아 사전씨!”하고 놀려먹었다. 그러면 그도 맞장구를 치며 “그 놈의 <동아 사전> 때문에 그만.......”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일 년 남짓한 어덜트 스쿨을 수료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미세스 유’부부하고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데 ‘미스터 전’은 한국으로 역이민을 갔는지 깜깜 무소식이다. 우리의 삼십 대 이민 초기 시절은 <동아 사전> 한 권 때문에 고달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한바탕 웃으며 넘어갔다.
독자여, 요즈음의 내 영어 실력은 부디 묻지 마시라. 하지만, 어덜트 스쿨에서 잠깐 배운 그 실력으로도 베벌리 힐스의 스타들을 울리고 웃겼다는 사실 하나만은 기억해 주시길. 오늘 따라, 나와 이민 역사를 같이 한 내 <동아 사전>이 우리의 ‘까무’씨 소식을 궁금케 한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어떻게 아는가?
일을 끝내고 옥상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멀리 차가 보이자, 나는 습관적으로 알람 키를 눌렀다. 그런데 차도 알람 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웬일인가 싶어 의아해 하면서 계속 알람 키를 누르며 차 가까이 갔다. 힘을 주며 눌러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열쇠로 열어보았다. 그런데 문은 열리지 않고 알람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혹 붙이는 격이 되었다. 알람 시스템을 해놓은 터라 열쇠로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알람 키를 고치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퇴근 시간이 임박하여 곧 주차장 철문을 내릴 시간인데다 열쇠 집들도 문을 닫을 시간이다.
몇 블록을 돌아가 겨우 열쇠 집을 찾았더니, 알람 키는 차 액세서리나 카스트레오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또 거기서 몇 블록을 뛰다시피 하여 겨우 카스트레오 집을 찾았다. 알람 키를 건네받은 주인은 배터리가 다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나를 그렇게 난처하게 만들고 고생시켰던 알람 키는 기술자 손에 들어가자마자 채 일 이 분도 지나지 않아 정상 작동을 했다. 좁쌀 보다 작은 배터리 하나가 그토록 생고생을 시키다니. 작다고 얕잡아볼 일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느림의 미학’과 함께 화두가 되는 것이 ‘작은 것의 소중함’이라던가.
그런데 배터리가 다 된 줄은 어떻게 알지? 주차장을 향해 달리던 내게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겉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겨우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알람 키는 열어보기도 힘든데. 나는 다시 되돌아 가서 주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어떻게 알죠?”
“아, 네에. 가까이 가서 눌러도 반응이 없으면 배터리가 다 된 겁니다.”
젊은 주인은 호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가까이 가서 눌러도 반응이 없으면 배터리가 다 된 줄 알라고? 그의 대답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아 가까이 가면서 계속 눌렀던 기억이 났다. 그 거리가 차와 점점 가까워져 엊그제는 차 문 앞까지 가서 눌러야만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오늘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정말 무디기는 어지간히 무디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배터리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과 반응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와도 흡사하지 않을까. 반응이 없는 관계는 죽은 관계다. 배터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갈아 끼우든지 재충전을 해야 한다. 왜 안 되나, 어떻게 해야만 되지 하고 애꿎은 알람 키만 눌러댄 나처럼 사랑에도 기계치가 된다면 두 사람 사이는 결국 끝나고 말 것이다. 에릭 프롬은 ‘사랑도 기술’이라고 했다. 아내와 남편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연인과 연인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 모든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공식은 한 가지다.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
언젠가 인간관계 훈련을 받을 때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 양 편으로 나누어 한 사람씩 각각 3분간 자기가 가장 슬펐던 일과 가장 기뻤던 일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이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반드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음, 그래, 너무 마음이 아팠겠구나.” 하며 감정을 수용해 주는 긍정적 코멘트도 좋고,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는 무언의 위로도 좋다고 했다. 상대방이 이야기 할 때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자 두 사람의 대화는 훨씬 생기를 이루며 활발해졌다. 강의실 안은 눈물과 웃음이 범벅된 사랑의 화원으로 금방 변했다. 우리는 그때 그 조그만 반응이 상대방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배웠다. 마치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여는 것처럼 한결같이 마음 문이 열리는 것도 보았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터지는 큰 사건들이 틀어진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걸 많이 본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시간이 없어지면서 불행한 사건이 연이어 생기곤 한다. 반응을 보인다는 건 결국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애정을 갖고 관심을 보인다면 그토록 많은 우울증 환자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열병처럼 번지는 자살 소동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 알람 키를 만지작거리며 반성해 본다. 한번 충전한 배터리가 언제까지나 작동하리라 믿는 자만감은 없었는지. 혹은 다 되어가는 배터리를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누군가 가까이 와서 그토록 알람 키를 눌러재끼는데도 무반응으로 일관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오늘 퇴근 시간에 있었던 이 일련의 소동은 습관화된 나의 일상을 깨우기 위해 일어난 해프닝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사랑의 배터리도 한번 점검해 봐야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그대들 사랑의 배터리는 안녕하신지.
엄마의 채마밭
어머니가 사시는 노인 아파트에는 자그마한 채마밭이 있다. 칸칸이 나누어진 채마밭은 주인의 개성에 따라 꾸밈새가 다르고 심은 채소 종류도 조금씩 다르다. 어머니는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쑥갓, 오이, 호박 등을 주로 심으셨다. 그렇게 넓은 땅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드시고도 딸 셋 가족과 친구 할머니들에게 나누어주실 정도로 수확량은 넉넉했다.
원래 꽃 가꾸기가 취미인 어머니는 틈만 있으면 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밭에서 돌아오실 때면 어머니는 이야기거리도 풍성하여 수다스럽다할 정도로 보고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도시의 한 귀퉁이를 떼내어 무료한 할머니들을 위하여 채마밭을 만들어준 건물주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주가 바뀌고 아파트는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노인 아파트가 시나 정부 소유가 아니고 개인 소유인 것을 처음 알았다. 새 건물주는 한국 사람으로 부동산 업자라고 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했고 많은 돈을 들여 멋있게 수리를 해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차장 부족으로 이제는 채마밭을 가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설날이나 추석 그리고 어머니날 등 일 년 중 이 세 날만 빼면 주차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차는 몇 대 되지 않고 자식들이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들은 웅성웅성했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가꾸어오던 채마밭이었다. 어디 먹기 위해서 가꾸어 오던 밭이던가. 그야말로 소일거리로 가꾸었고, 가꾸다보니 내 새끼 같이 애착이 갔을 뿐이었다. 자식이 찾아오지 않으면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말 할 벗이 없으면 말동무로 마음을 주고받던 채마밭이었다. 그러나 법이 그렇다 하니 따를 수밖에. 새 주인은 수도에 연결된 호스도 빼버렸다. 아직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채소들은 시들시들 말라서 죽어갔다. 손길을 놓아버린 채마밭은 어느새 잡초로 뒤덮여 흉물스런 공터로 변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며 먼 길로 돌아다니셨다. 주인은 금방이라도 주차장을 만들듯 하더니, 몇 달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은 물값 아낄려고 밭을 없앴나보다며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다녀가고 겨울마저 다녀가더니 어느새 봄기운이 대지를 적셨다. 춘풍이 불자, 채마밭이 어머니의 마음을 스물스물 동하게 했다. 에둘러 다녔던 길을 가지 않고 오랫만에 채마밭 쪽으로 갔던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잡초로 흉물스럽게 변한 어머니의 채마밭 한 귀퉁이에서 여린 떡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호박잎이었다. 물도 주지 않은 그 메마른 땅에서 모진 겨울까지 이겨내고 고개를 내민 호박잎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호박잎에 물을 주기 시작하셨다. 허리 디스크로 수술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세지만 산 생명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호스를 빼버려 빈 우유통에 물을 받아 적셔주었다. 그것도 물 나오는 수도꼭지는 멀리 있어 절뚝거리며 그 길을 몇 번이나 오고가야만 했다. 한번 갔다 와서 쉬고 또 한 번 갔다 와서 쉬면서도 물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시샘인지 뭔지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 말라는 것 한다고. 주인이 알면 큰일 난다고. 잔디를 깎던 멕시칸 정원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 밭을 밀어버린다고 엄포를 주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오케이!” 하면서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주말마다 방문을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영상을 펼치듯 호박의 성장과정과 이웃들의 시샘어린 한마디를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 끝에는 항상 이런 말을 덧붙이시곤 했다. “희선아, 도산 안창호 선생 말마따나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끼데이.” 도산 안창호 선생 이름만 틀렸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신 어머니가 훌륭한 말씀은 골라가면서 잘도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삶의 자세가 좋았다.
호박은 무럭무럭 자라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머니와 나는 호박쌈도 먹고 호박나물, 호박전도 해먹으며 한 여름을 잘 보냈다. 한마디씩 거들던 사람들도 애호박 하나씩을 건네받고는 빈정대던 말들을 싹 거두었다. 가을로 접어들자, 호박잎은 누렇게 시들어가고 마지막 열매도 다 땄다. 호박은 봄부터 가을까지 그토록 큰 기쁨을 주고 자기소임을 다 한 듯 마지막 목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비록 누렇게 죽은 호박넝쿨이지만 당신 손으로 차마 거두지 못하시겠다며 그대로 두셨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호박이 시들어 죽은 어머니의 채마밭도 서서히 다른 채마밭처럼 잡초로 덮혀갔다. 어머니는 다시 그 채마밭을 둘러 먼 길로 다니기 시작하셨다.
호박 가꾸던 낙이 없어지자 어머니의 얼굴은 생기가 없어지고 신나게 보고할 거리도 없어졌다. 나 역시, 계절따라 영상처럼 펼쳐주었던 호박 이야기가 끝나니 못내 아쉬웠다. 어머니는 마지막 호박을 어루만지며 이리 굴러보고 저리 굴러보며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았다. 나는 어머니께 호박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부추겼다. 글이라도 남기면 어머니의 아쉬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줄 것 같아서였다. 여든 셋의 할머니, 그것도 일제시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어머니가 선뜻 글 쓸 마음을 내기는 어려울 터. 나는 또 문법타령과 맞춤법타령을 할 줄 알면서도 딸 앞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냐며 계속 졸랐다. 그런데 하루는 조용해서 방안을 들여다보니 상을 갖다놓고 무언가 열심히 쓰고 계셨다. 결국, 어머니는 ‘고마운 나의 호박나무’라는 제목으로 난생 처음 ‘시’를 쓰셨다. ‘나의 그리움을 흘려버릴 수 없어 글로 표현해 본다’라는 부제까지 붙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봄에 예쁘게 자란 호박나무/여름에는 열매를 매저준 호박/ 예쁜 호박을 친한 친구들에게/나누어 먹게 한 고마운 호박/가을에는 더문더문 매저준 호박/그러나 줄기마는 싱싱한 호박나무/지금은 초겨울인데도/아침 저녁 즐겁게 바라본 귀여운 호박/세월은 거슬리 수 없는 듯 군대군대/시들어 가는 호박잎/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아마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할 거야. -
글 끝에는 11-9-2011 향년 팔십셋 지수연이라고 적혀있었다. 향년이라니.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하는 마음이 잠깐 스쳐갔지만 솔직 담백한 내용은 그 어느 명작보다 나를 감동시켰다. 군데군데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어머니가 육필로 쓴 마음의 글이 아닌가. 특히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라는 표현에서는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라 침을 삼켜야 했다. 어머니가 유독 채마밭 가꾸기를 즐기시고, 잡초더미에서 발견한 호박잎에 그토록 연연했던 것은 기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 당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호박을 동일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호박이 떠나고 그 빈 잡초더미 위에 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도 주차장 공사는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봄이 되자, 어머니는 땅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본격적으로 채마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고추, 상추, 깻잎, 부추, 오이, 호박 등 남은 씨앗을 골고루 뿌리셨다.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며 1갤런짜리 빈 우유통에 물을 담아 부지런히 날랐다. 좀 피곤하다 싶어도 자라나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올 3월, 어머니는 유난히 피곤하고 배가 더부룩하니 아프다며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간까지 전이된 위암말기였다. 수술은 불가하다고 했다. 주치의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께 소화제 처방만 해준 주치의가 잠시 원망스러웠지만 어머니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 죽을 때는 이름 하나 받아가는 거라고. 이제 암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1차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날에도 밭에 물을 주러 가셨다. 쑥갓을 못 심었다며 쑥갓씨를 사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 찬바람을 쐰 탓이었을까. 결국 이틀 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폐렴이라고 했다. 십 여 년간 정들었던 채마밭과도 그 날로 영이별이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밭에 물 줄 걱정만 하고 계셨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밭에 물을 주러 갔다. 1갤런 우유통 두 개를 들고도 내 성한 걸음으로 열 번을 왕래해야하는 거리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즐기시는 일이라는 생각만 하고 방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었지, 같이 밭에 내려가 볼 생각은 못했다. 성치 못한 다리를 끌며 3층에서 1층까지 오르내리셨던 어머니.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날이면 걸어서라도 내려가셨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결국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당신이 시 말미에 쓰신대로 ‘향년 팔십 셋'이었다. 시를 쓰신 지 꼭 6개월만이었다. 죽어 거름이라도 되라고 차마 당신 손으로 버리지 못한 호박줄기처럼 어머니도 수목장을 원하셨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밭에 지금은 내가 물을 주러 간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은 가야하는 거리인데도 시간만 나면 꼭 물을 주고 온다. 내가 못 갈 때에는 어머니와 가장 친했던 친구 할머니가 주신다. 심은 사람은 가고, 상추니 고추니 따 먹는 사람은 다 다른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말씀을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도 잘 따르고 가셨다. 어머니의 채마밭에서는 각종 채소들이 오늘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저희들을 그토록 사랑해 준 주인이 떠난 줄도 모르고. 마치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그런대로 다 잘 살아가듯이. 이번 채소농사가 끝나면 나도 어머니의 채마밭을 돌아 먼 길로 다녀야 할 것같다. 어머니와는 또 다른 이유로. 그러나저러나, 내년에는 엄마의 채마밭에 누가 씨를 뿌려주려나.
어미의 사계
<초여름 날>
만 사년 이십일을 이쁜 짓 다 하더니
비 오던 초 여름날 내 손 놓고 떠났고나
실실이 초 여름비 내리면 다시 괴는 눈물비
아가가 갔다. 오랜 가뭄 끝에 첫 장마비가 시작되던 초여름날이었다. 만 4년 20일. 앞당겨서 차려준 네 살 생일 케익을 받고도 그 애는 먹지 못했다. 초대되어온 태권도 친구 몇 명만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케익을 입에 넣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기합소리 우렁차게 외치던 친구가 왜 먼 길을 떠나야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른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백혈병 주인공이 야생화처럼 지천에 널려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창밖에는 플라타너스가 넓은 잎으로 굵은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었다. 후둑후둑. 아이에게 그늘을 주고, 아이가 먼 길을 홀로 갈 제 동행해 주었을 플라타너스. 지금도 나는 비오는 날이면 유월의 플라타너스를 기린다. 내 기억 속에 가두어 둔 네살박이 그 녀석을 기린다.
< 가을 날 >
단풍은 단풍대로 은행은 은행대로
제각금 속울음을 토해내는 가을날
하늘엔 솔개 한 마리 속울음도 잊었다
가을이다. 푸르렀던 기억은 추억으로 쟁여두고 제각금 길 떠날 차비를 한다. 떠날 때는 가장 멋진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길 떠날 차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태권도 도복을 제일 좋아했다. 관에 태권도 도복을 넣어주고 못을 박으며 사범은 꺼억꺼억 울었다. 떠날 때 나무는 잎을 버리고 나는 말을 버렸다. 눈물도 버렸다. '잘 가, 안녕!' 마지막 인사도 입술로만 달싹거렸다. 무심한 솔개 한 마리 맴을 돌며 하늘에 커다란 원만 그리고 있었다. 라이프 이즈 서클. 나는 윤회설을 믿고 싶었다. 그동안 가을이 참 많이도 다녀갔다.
< 겨울 날 >
함박눈 흰 나비 떼 온 천지에 휘날리면
깊은 산사 솔가지 쩌엉 쩡 부러지고
깃털 그 가벼움마저 천근 무게로 내리앉는 밤
그 애가 떠나고 첫 겨울이 왔다. 산사를 찾았다. 함박눈이 흰 나비 떼 되어 천지에 휘날렸다. 코트 깃에 내린 눈송이는 이내 녹아버렸다. 잠시 내 곁에 왔다 떠난 아이처럼. 바람이 불고 날리는 눈발 위로 햇빛이 얹혔다. 무지개 빛이었다. 아름다웠다. 산사를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으리. 무지개 빛 눈발을 받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찰나의 아름다움은 이내 사라지고 산사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산사의 밤은 적막했다. 깊은 밤이 되자 굉음이 잠자는 산을 깨웠다. 쩌엉쩡.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깃털처럼 가벼운 눈송이도 쌓이면 천근 무게로 내리 앉는가. 잠시 흰 눈발과 내 슬픔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 봄 날 >
봄빛도 눈 부셔라 반 쯤 눈 뜬 민들레꽃
길 가던 하얀 나비 날갤 접고 앉고나
아가야, 네 영혼은 어디에 날갤 접고 앉았나.
봄은 어김없이 왔다. 찬바람에 온기가 드니 천지가 색채의 향연이다. 잡초나 뽑을까 하고 채소밭에 내려섰다. 그때, 어디선가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무꽃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그 순간,‘헉’하고 숨이 멎었다. 날개 위에 영혼을 얹고 있어 늘 하느적 하느적 난다는 전설의 하얀 나비. 마치 내 아이가 다시 살아온 듯했다. 아이가 간 다음 날 아침, 채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아이 숙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나는 섬짓해서 물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아침에 빨래터를 향하는데 흰나비 한 마리가 앞서거니 하며 계속 따라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나는늘 ‘흰나비 환상’에 젖어 살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흰나비가 내 주변을 맴돌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곤 한다. 사람들은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다. 하지만, 이‘어미의 사계'는 초여름으로 시작되어 봄날로 끝난다. 아니, 끝나는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순환한다. 라이프 이즈 서클. 계절도 서클이고 사랑도 서클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서클이다.
죽은 아이들의 방
사진 작가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충격적인 사진을 보았다. Milanda Hutton의 작품으로 ‘Rooms’ 프로젝트인데 ‘죽은 아이들의 방’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아이는 가고 없어도, 차마 치우지 못해 유품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여러 아이들의 방을 시리즈로 찍은 것이었다.
‘죽은 아이들의 방’은 소리 없는 말로 참 많은 이야기를 걸어왔다. 재잘대던 소리와 웃음으로 왁자하던 ‘존재의 방’이 이제는 ‘부재의 방’이 되어 죽음보다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사원의 정적인들 이토록 고요할까. 평화로움과는 또 다른 느낌이 가슴을 죄어왔다. 소리를 먹은 그림, 뭉크의 ‘절규’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가 일시에 정지된 공간, 그것이 바로 ‘죽은 아이들이 남기고 간 방’이었다.
죽음은 그림자를 말아가듯 이렇듯 소리까지 말아가는 것일까. 소리란 소리를 다 데리고 그들은 어디로 먼 마실을 떠난 것인가. 하다못해 엄마의 울음이나 기도소리로라도 채워 이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깨뜨려야 했다. 아니면, 모짤트의 레퀴엠이라도 틀어놓아야만 마음 편히 슬픔에 잠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은 비정할 정도로 화사했다. 그러나 창가에 놓인 사진틀 속의 미소 띤 아이들 얼굴은 슬픔의 극치였다. 빈 침대 위에 소품처럼 놓여 있는 이불과 베개, ‘새로운 시작’을 영원히 알려줄 수 없는 꺼진 컴퓨터, 그리고 빈 책상, 온기가 사라진 빈 의자, 그들의 체온을 감싸주었던 옷들,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인형들....... 한때는 주인공과 더불어 제 존재를 빛냈을 사물들이 이제는 한갓 유품이 되어 잠들어 있다. 죽음은 정녕 침묵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인가. 눈짓 하나 손짓 하나에 담겨 있는 추억들을 다 어이하랴.
나도 가슴에 묻은 어린 아들이 하나 있다. 오랜 가뭄 끝에 장마가 시작되던 초여름 날이었다. 창밖에서는 플라타너스 넓은 잎이 빗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가슴을 두드리던 그 소리를 들으며 네 살 박이 아들 녀석은 홀로 먼 길을 떠났다.
건강하고 착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급성 임파선 백혈병이라니. 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여명 기간은 짧으면 보름이고 길어봤자 두 달이라 했다. 네 살 생일을 못 지내고 갈까봐 생일을 앞당겨 해주었다. 태권도 도장 친구들은 맛있게 먹는데, 그 아이는 케잌 한 조각 입에 대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아이는 자꾸만 목이 타 오는지 우유를 사 달라고 했다. 뭘 사달라고 한 번도 칭얼댄 적이 없던 녀석이었다. 그즈음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를 살려 보려고 양의, 한의를 찾아다니며 할 수 있는 민간요법까지 다 동원할 때였다. 우유나 야쿠르트가 안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 나더러 절대 먹이지 말라고 당부한 뒤 출근을 했다.
의사로부터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온 터라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에 안 좋다고 하는데 난들 어쩌랴. 안 된다는 암시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들 녀석이 창밖을 보더니, "아, 참! 엄마! 비가 와서 못 가겠제? 그럼 내일 사 줘!"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30분, 우유를 사달라던 그 '내일'이 오기 전에 아이는 먼 길을 떠났다. 먹고 싶던 우유도 못 마시고 목이 마른 채 55미리 고 작은 발로 타박타박 떠나고 말았다. '단장의 아픔'도 덜 아플 때 느낀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 모두가 비현실로 느껴져 몽롱할 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생과 사. 문지방 하나 넘기가 그렇게 수월할 줄이야. 엄마 보다 앞장서서 쥐를 쫓아주던 착한 녀석. 내 아이는 그렇게 갔다.
하지만, 단칸방 신혼살이로 시작한 가난하던 시절이라 나는 아이의 방을 남겨두지 못했다. 아이의 유품은 모두 동네 고물상으로 갔다. 며칠이 지나자, 어떤 아이는 우리 아이의 세발자전거를 타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고, 어떤 아이는 우리 아이가 좋아했던 빨간 장화를 신고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우리 아들처럼 고만고만한 친구들이었다. 그 아이들 얼굴에 우리 아이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밤에는 아파서 칭얼대던 신음조차 그리워지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고통은 그 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자책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른 번도 더 넘는 계절이 다녀갔다. 세월이 명약인지, 잊음이 헐한 건지 오늘도 나는 밥을 먹었고 웃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애 생일을 잊기도 하고 기일마저 까먹기도 한다. 그게 오늘따라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 다들 못잊어서 방을 치우기는커녕 이사조차 못하는데.......
해가 지면, 산그르메도 제 집을 찾아들건만 아이는 꿈길로도 찾아 주지 않는다. 잘 있으니 안심하라는 건지, 엄마처럼 잊고 살겠다는 엄포인지. 방조차 남겨두지 못한 이 가난한 엄마는 빛바랜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화룡점정.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진 침묵의 방에 붓을 들어 점 하나 찍어주고 싶다. 죽었던 아이들이 용트림을 하며 되살아와 뛰고 굴리며 왁자하게 떠들고 놀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작은 행복마저 신은 왜 그리도 빨리 앗아가 버렸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성호
-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더 깊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 하늘에 별이 뜨고/ 땅에 꽃이 피고/ 이웃에 문소리가 나고/ 창문에 불이 켜지고/ 하늘과 땅에 흐드러진 보석들을/ 시의 꽃바구니 속에 담아보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숭자 시인의 제2시집 ‘새벽하늘’ 서문에서) -
시인 이숭자 선생이 떠나셨다. 기품있게 사시다가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으시더니 ‘산목련 이울듯’ 떠나셨다. 향년 97세.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없는 곳, 영원한 천국으로 ‘빛 따라 어둠 따라' 바람처럼 가셨다. 지금쯤 선생은, 시간의 유한성과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난 저 천국에서 시심을 불태우고 계시리라.
선생을 마지막 만나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침상에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이 꼭 구도자 같았다.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함에 나의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그때는, 선생이 기억을 놓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때였다. 함께 간 C시인이 그 분 머리맡에 놓인 시집을 들어 한 수 낭송해 드렸다. 나는 목이 메어 읽어드리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함께 바쳐드렸다. 그리고 성호를 긋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이제까지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선생이 함께 성호를 그으려고 팔을 꿈쩍꿈쩍하는 게 아닌가. 노인성 치매로 오래전에 기억을 놓아버린 선생이 성호 긋는 걸 잊지 않으시다니! 왈칵 눈물이 났다. 실핏줄이 선연한 선생의 팔은 가볍게 떨기만 할 뿐, 끝내 선생의 이마를 짚어주지 못했다. 우리는 선생의 팔꿈치를 받들어 당신이 직접 성호를 긋도록 도와드렸다. 어쩌면 당신 손으로 그을 수 있는 마지막 성호가 아닐까 싶어 우리의 손도 함께 떨렸다. 선생은 온 마음을 모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노사제의 마지막 성찬식인들 이토록 경건할까. 나는 감히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신앙의 마침표, 아니 생의 마침표인 양 온 마음을 바쳐 긋던 성호.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호였다. 습관적으로 긋던 성호, 파리 쫓듯 재빨리 긋던 성호. 내가 수없이 그었던 성호 중에 이렇듯 경건한 마음을 담아 그은 성호는 과연 몇 번이나 될까. 나도 언젠가는 기억을 놓게 되고, 내 손이 이마를 짚어줄 기력마저 없어질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성호를 그을 수 있는 기억과 이마를 짚어줄 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여지껏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고마움이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선생의 영상이 떠올라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떠나신 선생이 그리워, 선생의 훈기가 담긴 시집들을 꺼내어 다시 읽어본다.
- 고국을 떠나 서른 해에/ 이미 그 땅에선/ ‘작고 시인’으로 나뉘었다는데/ 여기 죽음 없는 / 부활이 있어/ 돌멩이 같은 겨울무 하나/ 노오란 속잎 달고 나왔다/ 귀환을 반겨/ 푸른 나뭇가지마다/ 옐로우 리봉을 걸고 기다리는/ 이국 풍경은 아니라도/ 친구여/ 내 여기 살아 있소/ 돌멩이 같이 살아있소. (‘내 여기 살아있다’ 3연)
시를 놓고 산 이민 생활 삼십 년. 급기야 ‘한국 여류 시인 101인집’에 선생은 작고 시인으로 분류되어 나온다. 큰 충격을 받은 선생은 '내 여기 살아있다'고 피 토하듯 시로 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살아있어도 결국 ‘작고 시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 느꼈다. 선생은 자리를 털고 분연히 일어섰다. 불후의 시집인 ‘새벽하늘’과 ‘국경의 제비’에 이어, ‘사랑의 땅’과 ‘빛 따라 어둠 따라’가 용트림을 하며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선생의 시는 마지막 둥지를 틀었던 베니스 비치의 팜츄리만큼이나 키가 높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숨 가쁜 고착은 거부했다/ 신.발 신발은/ 해 뜨면 지렛대로 날 세우고 나서고/ 해 지면 고요히 안식의 여백으로 남아/ 쪽배 하나 띄울 강물도 없는 다리 아래/ 좌우 이란성 쌍둥이 입 벌린 공간/ 일찍이 내 요람의 첫걸음발에서/ 다섯 발가락 가난처럼 한 방에 들어/ 오밀조밀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겼다/ 사랑과 미움으로/ 땀과 눈물로/오래도 왔다/ 멀리도 왔다/ 오늘 무릎뼈 사각이는 일모의 언덕에 서면/ 내 키는 어떤 징후로 0.5센치 줄어져도/ 너만은 줄곧 시퍼런 나의 20대/ 7문 반의 치수를 고수하나니/ 신.발 신발, 나의 시퍼런 수치/ 어느 날 구름 위에 띄울 내 불변의 수치여. (‘불변의 수치’) -
'요람의 첫걸음발'에서 부터 친구였던 신발은 칠문 반이란 ‘불변의 수치’로 선생이 가는 마지막 길에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문신처럼 자서전을 새겨온’ 선생의 신.발. 선생이 걸어온 길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증언해줄 그 신발은 선생의 이민 50년사도 충실히 썼으리라. 팍팍한 이민 생활에 누군들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으랴. 맞지 않는 신발도 애써 제 발에 맞추어 가며 개펄같은 삶을 살아온 나날이 아니던가. 칠문 반 '불변의 수치'는 어쩌면 초심을 잃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온 마음의 수치가 아니었을까.
선생이 직접 건네주신 작품집을 다시 읽어보니 생전의 육성이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본다’더니, 생전에는 빠트렸던 많은 말들이 의미를 가지고 행간 사이에서 되살아나온다. 언제나 성실하고 긍정적인 삶을 사셨던 선생의 시는 한마디로 ‘삶의 찬가’요 하늘에 올리는 경건한 기도였다. 한국 여류 문단사에도 한 획을 긋고, 미주 문단사에도 큰 주춧돌을 놓아주신 이숭자 메리 선생은 문단의 대선배요 신앙의 멘토다.
이제, 육신의 옷은 벗고 떠났어도 그분의 영혼만은 맑은 시정신으로 부활하여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마지막 만나 뵈었을 때 함께 올렸던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선생도 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힘차게 성호를 그어주시리라 믿는다.
달빛 사랑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비에 씻기운 듯 맑고 밝은 달이었다. 달빛 아래 잠든 산마을 집들은 부드러운 형광 빛에 싸여 신비롭게 보였다.
오늘이 보름인가?‘ 혼자말처럼 뱉았다. 묵묵히 운전을 하고 가던 남편이 그럴거라며 짧게 받았다. 언제나 단답식으로 말하는 남편이 오늘따라 더욱 무드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단답식 대답도 별로 밉지가 않다. 달빛을 받으며 달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랴. 오히려 ’느낌‘만이 소중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의자를 뒤로 뺀 뒤 다리까지 쭉 뻗었다. 달과 함께 좀 오래 놀아보겠다는 심사다.
높이 뜬 보름달은 날 잘 따르는 우리 집 강아지처럼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으면서 계속 따라 왔다. 내 눈도 달을 따라간다. 나와 눈맞춤한 달은 어느 새 내 마음까지 앗아가 버렸다. 이젠 달이 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을 따라가는 셈이 되었다. LA 다운타운에서 내가 사는 리틀락까지는 장장 80마일. 호젓한 밤길이라 빨리 달려도 족히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한 시간의 데이트. 별로 나쁘지 않다.
한 때는, “고작 한 시간!”하고 토라져서 아예 만남 자체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단 오 분만이라도 뵙고 싶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고서야, 유아적인 나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내 젊은 날, 연인과의 한 시간은 너무 짧게 생각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나 역시 만날 수만 있다면 단 오 분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만나서, 부끄러웠던 일, 미안했던 일 다 용서 받고 싶다. 하지만, 저 달은 떠올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옛님은 꿈에서 조차 찾아주지 않는다. 꿈길에서도 어긋나는 걸 보니, 흘러가 버린 세월만큼이나 먼 길로 떠났나 보다. 이젠 삼십 년이 다 된 이야기다.
달은 늙지도 않는가. 여전히 유정하고 낭만적이다.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달빛 사랑은 예나 이제나 은유적이다. 현란한 네온 사랑이 아니라, 은은한 형광 불빛 사랑이라 좋다. ‘침묵 속의 공감’만으로도 마음에 물무늬 지는 사랑. 이런 사랑을 잠시 꿈 꿔 보는 것도 달밤 아래서는 무죄가 될 것 같다. 둥근 보름달은 생긴 그대로 우리 마음을 둥글둥글하게 해 준다. 사랑도 미움도 그저 둥글둥글하게 생각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밝아지리라 한다.
프리웨이를 달리며 구불구불 산길을 돌 때마다 오른 쪽 왼쪽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달이 재미있다. 맑은 얼굴에 얼비치는 옥토끼는 오늘도 많은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골짜구니에 서리서리 어린 이야기는 장편 소설로도 모자라 한숨짓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를 미소짓게 하고, 눈물샘 없이도 눈물짓게 하는 저 달. 나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달 보고 웃는 사람, 저 달 보고 우는 사람, 서울의 지붕 밑에 ......” 그 다음 가사는 생각이 나지 않아 허밍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가사 내용 때문일까. 아니면, 달이 주는 감상 때문일까. 괜히 쓸쓸한 기분이 들어 노래 소리는 잦아들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달을 보고 울었을까. 윤오영 선생의 ‘달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장기려 박사의 ‘달님’이 들어섰다. 인술로도 유명하지만, 사십 평생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하는 그의 순애보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언젠가 장기려 박사와 김동길 박사가 미국에 왔었다. 그날 밤도 보름달이 떴었나 보다. 장기려 박사는 습관처럼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동길 박사가 넌지시 다가와 달이 참 밝지요하고 말을 건넸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국에서 보는 달은 재미가 없으이. 하루가 틀리니, 북에서 저 달을 보고 있는 내 아내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보는 달이 아니잖어. 그러니까 재미가 없으이. ” 독백처럼 뱉는 말에 그의 속울음이 들리는 듯하여 김동길 교수도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이북에서도 아내가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 허망한 믿음일 수도 있는 그 믿음이 그에게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 되었으리라.
똑 같은 달이라도 똑 같지 않은 달이 누군가의 가슴에 있다. 오늘의 달을 보며 어제의 달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아팠던 지난날이 생각나 다시 눈물 짓는 사람도 있으리라. ‘저 달 보고 웃던 사람, 저 달 보고 울던 사람’은 서울의 지붕 밑에만 있는 게 아니고 이 LA 하늘 밑에도 무수히 있겠지. 하물며 물설고 말이 선 이 곳에서의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달 외에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으랴. 운전대에 이마를 찧으며 흐느끼는 사람도 달을 보며 울고, 개나 늑대도 달을 보며 사연 있는 울음을 운다. 달은 이 모든 사연을 가슴으로 받고 함께 아파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은빛 자락으로 우리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일 뿐. 달이 잠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사춘기로 흔들리는 딸과 함께 얼마나 많은 날들을 울었던가. “우리, 이렇게 살려고 미국에 온 거 아니잖아?”하며 딸을 부둥켜안고 울 때마다 달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기에 나보다 먼저 한 쪽 가슴이 무너 내려 앉았겠지. 울어 지쳐 잠든 딸 이마 위로 가만히 내려앉던 은빛 달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밖에 없다고 타이르던 달빛 은유.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고 오늘밤 보름달은 다시 한 번 내게 일러준다.
팜트리 잎새 위에 걸린 보름달도 감나무 위에 걸려있던 고향의 보름달 못지않게 운치가 있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 어제의 일은 어제의 바람이 다 쓸어갔겠지.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허밍으로 부르는 노사연의 ‘님 그림자’가 리틀락의 밤하늘에 조용히 퍼져나간다.
폐선
마산 앞 바다
돌고래들의 릴레이에
물결치는 파도
온 바다를 떠돌던
여객선은 갯부두에 묶여
산 같은 몸집이
뻥뻥 뚫리고
숭숭 파고드는 햇빛!
건강한 그 빛이
결핵 병동
낡은 침대 위에도
걸터앉아,
가슴 시린
하얀 젊음의 등줄기에
파도를 일으키고
해체되는 기관지를 통해
분출하는 시뻘건 피를
폐유처럼
바다에 뿌린다.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미련의 시간이지만
아린 빛을 아끼며
사랑하고 있다. (K 시인의 ‘폐선’)
몰랐다. K가 이런 시를 쓰며 하루하루 혹독한 삶을 연장하고 있었는지는. ‘하나님이 주신 휴가 기간’이라며 영어 공부까지 하고 있다던 그가 아닌가. 회복기에 있다는 그의 말만 믿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왔었다. 자기 병동에서도 가장 중환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대한민국 공군 대위로서 언제나 당당했던 그였기에 폐병과의 싸움에서도 꼭 이겨낼 거라 믿었었다. 그리고 12년이 흐르고 다시 21년이 흘렀다.
그의 가슴에도 가끔 내가 물무늬를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인명대사전을 뒤적여도 없던 나를, 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미주 문학 사이트’를 통해 찾아냈다. 대학 학보사 기자 시절에 만났던 그는 내가 어디에 있든 글을 꼭 쓰고 있을 거라 생각되어 미주문단 사이트를 뒤졌단다. 반가움이 가득 묻은 e-mail과 함께 보내온 시 소품들. 한때 신동아 논픽션에도 당선되었던 그는 어느새 개인 수필집과 시집을 가진 전업 작가로 돌아와 있었다. 놀람과 기쁨도 잠시, ‘폐선’이란 시는 숨을 멎게 했다. 보이지 않는 행간마다 시뻘건 추억을 쟁여둔 이 시는, 어느 새 나를 30여 년 전 ‘그 날’로 돌려세웠다. 여름의 끝자락에 초가을이 기웃대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비가 왔었고, 천지간에 혼자인 듯 외로움이 뼈 속 깊이 스며들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래, 떠나자. 이왕이면 추억이 있는 곳으로. 이런 날은 열차 여행이 제 격이지.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속삭이며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서서히 비가 흐려놓은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움’이란 추상명사는 비에 젖어 떠는 간이역을 스치면서 한 영상으로 구체화되어갔다. 이제는 비껴간 인연이 되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람. 남자와 여자가 아닌 영혼과 영혼과의 만남이 절실한 순간.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제약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내 마음은 외로워서 오히려 자유로웠다.
비, 그리움, 고독. 그리고 추억. 이런 것들에 등 떠밀려 동대구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그의 부대 인사과로 전화를 걸었다. “김00 대위는 마산 국군 통합 병원으로 옮기셨습니다.” 아, 아직 제대는 하지 않았구나. 마산으로 옮겼다는 부하 직원의 말이 고마웠다. 마침, 마산은 내 고향이고 어차피 여행 삼아 나온 길이 아닌가. 다시 마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모네의 후기 작품 같은 풍경이 희미한 실루엣을 남기며 스쳐갔다.
“의무관입니까? 환잡니까?”
정문에서 면회 신청을 하자 담당 군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인사과에 있었는데......” 하고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군의관은 아니고 환자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환잡니다!”
관에 못질하듯 꽝하고 대못을 박고는 면회 대기실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환자는 무슨 환자. 키 176에 몸무게 72 킬로그램인 건장한 대한민국 공군 대윈데......’ 나는 머리를 흔들어 담당관의 말을 지웠다. 정문에서 면회실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길 양쪽 꽃들은 비에 씻겨 색깔이 더욱 선명했다. 비도 어느새 멎고, 하늘은 푸른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놀랍게도 K였다. 파란 환자복을 헐렁하게 입고, 여윈 얼굴에 파리한 채로 나타난 사람. 그는 예전의 K가 아니었다.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내게 그는 빙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쩌다가.......”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십 대 후반의 그 푸르른 젊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진 거야!”
그는 또 한 번 빙긋 웃으며 힘 주어 말했다. 그 말, 그 웃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요 화해의 몸짓이었으리라.
말줄임표로 끝나는 단답식 대화만 간간이 오갈 뿐, 우리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음 면회조차 거절하는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사조 같은 사람이라 꼭 이겨낼 거라 믿었다. “또 며칠 퐁당퐁당 하겠구나.” 날 바래다주며 혼잣말처럼 내 뱉던 한 마디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읽게 된 그의 시엔 그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투병 중 면회 온 사람은 딱 두 명인데 그 중에 한 명이 나라고 했다. 나는 우연히 찾아간 셈이니, 그는 일체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그 고통을 감내해낸 모양이다. 짧지 않은 투병 생활 속에 그 외로움과 고통이 어떠했을까. ‘폐선’이란 시 뒤에 붙은 추신은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국군 통합 병원에서 바라보는 창가에 폐선이 정박해 있고, 결핵 환자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듯 폐선은 고철로 낱낱이 분해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무도 이런 일이 결핵 병동 앞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줄을 몰랐답니다. 저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이 시를 적었지요.”
폐선과 결핵 환자. 이보다 더 강한 은유는 없을 것 같다. 고철로 낱낱이 분해되어 나가는 폐선의 최후를 보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절망 속에 죽어갔을까. 창 밖 풍경이 주는 의미가 새삼 가슴을 친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요양소 창 너머로 보이던 ‘폐선’의 차이. 그것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희망과 절망으로 나뉘는 길목에서 생사를 가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시뻘건 피를 폐유처럼 바다에 뿌리며’ 육필로 써 내려간 ‘폐선.’ 그러나 그의 배는 결코 ‘파선’되지도 않았고 고철로 분해되지도 않았다. '사월의 노래’를 부르며 생명의 불꽃을 밝혀 들고 되돌아온 사람. 그는 지금, 한 여자의 남편이며, 세 자녀의 아버지요, 손자 손녀를 거느린 다복한 할아버지로 ‘아린 빛을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듯, 노후란 본시 아름다운 것. 누군들 몇 번의 고비를 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랴. 머잖은 날 고철로 분해되는 날이 올지라도, ‘건강한 햇빛’ 속에 우리 아직 살아있음을 감사해야겠다. 아름다운 환송인가. 서녘 하늘에 몸을 푸는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오늘따라, 늦가을 언덕에 빛나는 은빛 억새들의 춤은 또 왜 저리도 장엄한가.
눈물은 성수입니다
오늘은 싱글엄마들의 성경 모임인 ‘임마누엘’ 소구역 모임이 있는 날이다. 사별을 한 사람, 이혼으로 생이별 한 사람, 외국인과 결혼해 ‘또 하나의 고독’에 절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눔의 시간을 갖는 모임이다. 저마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기에 정도 각별해 특별히 기다려지곤 한다.
405 프리웨이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찬 겨울비가 시야를 뿌옇게 흐려 놓는다. 이런 날의 과속은 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15마일로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느려지니, 마음마저 느긋해진다. 라디오를 틀었다.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라디오 코리아에서 김종찬의 ‘당신은 울고 있네요’가 흘러나온다. 노래의 가사도 가사지만, 축축한 그의 목소리가 왠지 우수에 젖게 한다. 비오는 날의 노래는 흑인 영가나 샹송이 제 격이다. 그러나 김종찬의 목소리도 이런 날의 노래론 손색이 없다. 산그리메가 마을을 덮고 저녁연기가 실실이 피어오르다 자취를 감춰버리는 그런 목소리. 김종찬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고향집의 아랫목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는 듯 아늑해지곤 한다. 가만가만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괜히 내 설움에 취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아는 여인의 한 많은 삶이 떠올라서인가. 나직이 따라 부르는 내 시야에 나도 모르게 뿌연 물안개가 인다. 그 물안개를 헤집고 한 여인이 걸어 나온다.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한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 ‘피코의 마마.’ 남편의 배신에 한이 맺혔으면서도,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총고백성사를 하고 함께 영성체를 하고 싶다는 그녀. 가슴에 눈물을 담고 살아온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물먹은 선인장을 연상하곤 했다.
‘피코의 마마.’ 그녀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를 ‘피코의 마마’라고 불렀다. 그녀는 늘 빈민자의 거리인 피코 길에 실비 식당을 차리고 싶어 했다. 쓰레기도, 짐승도, 사람도 한 통속이 되어 뒹구는 그 거리에 실비집을 차려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해 아이들을 앞세우고 “마암!” 하고 들어선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거라 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녀의 꿈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뜨거운 화덕 앞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 있는 그녀 모습을 보면 누군들 그녀의 꿈을 믿지 않으랴.
그러나 이 꿈은 4.29 폭동이 앗아가 버렸다. 벌몬트와 2가 쇼핑몰에 차린 식당은 몫이 좋아 장사도 잘 됐었는데, 흑인들에 의한 폭동으로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 곳 가게를 정리하고 피코 길에 새 가게를 차리려고 에스크로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즈음의 일이었다. “출출하지예? 오다가다 한번 들려 주이소, 예?” 하던 그녀의 구수한 광고 목소리도 그날 이후 뚝 끊겼다. 끊긴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의기도 꺾여버렸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그 날 저녁, 우리는 처음으로 그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 허허 웃으며 맏언니 역할을 해왔던 우리 모임의 수장한테 그토록 큰 아픔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녀가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었다는 것도 그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비극적 소설이었다. 수녀복도 마다하고 맺어진 사랑이었기에 남편과의 만남은 그만큼 뜨겁고 애틋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했던 사랑은 채 십 년을 넘기지 못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올망졸망한 아이를 키우며 이민 초기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가실 즈음, 뜻밖에도 남편이 어느 젊은 여인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편이 죽어 불쌍하다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여자라 아픔이 더욱 컸다.
그녀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혼만은 막으려고 했었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천주교 신자여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정만은 꼭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을 빼앗겨 버린 남편은 이혼을 해 달라며 폭력의 강도를 높여 갔다. 기도를 바치고 시를 읊던 고상한 입에서 망언과 욕설도 앞다투어 나왔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어린 딸이 울면서 막아섰다. "I don't know. What's mean 개썅년. But she is my mom!"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그는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울면서 가로막는 어린 딸마저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걸 본 순간, 그녀는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쓰라린 배신감과 어린 두 자식뿐이었다. 찔레꽃이 갸웃거리던 어느 초여름의 일이었다.
아픈 세월 속에서도 꽃은 피고 꽃은 졌다. 회억하는 그녀의 희미한 눈빛 속으로 세월의 강물이 출렁였다. 시간은 정말 돌아오지 않는 강물일까.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마릴린 몬로가 아득한 눈빛을 띠고 기타를 치면서 “No return, No return......”하고 반복해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마치 ’피코의 마마‘ 심정을 대변이나 해주듯, 가수는 더욱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 그 누가 알았던가요......”
그녀가 남편을 다시 만난 건,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였다. 속 깊은 딸이 동생 졸업식에 아버지를 불러들인 것이다. 떠날 때에는 채 걷지도 못하던 아들이었기에 무대에 서 있는 아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딸이 울먹이며 아빠에게 일러주었다. “아빠! 우리 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 저어기 왼쪽에서 두 번 째 서 있는 녀석이 바로 아빠 아들이야.” 그때사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알아보고,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피코의 마마도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아비가 제 아들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게 서럽고, 새까맣던 그의 귀밑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앉은 것도 서러웠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은 더더욱 서러웠다. 졸업식이 끝나자, 그는 다시 뒷모습만 남긴 채 자기의 둥지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딸은 엄마의 손을 잡고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엄마! 아빠 이제 용서해줘. 엄마는 우리를 가졌지만, 아빠는 아무도 없잖아......” 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아빠로부터 내동댕이쳐졌던 그 딸은 아빠를 용서해줄 정도로 훌쩍 커 있었다. 시간은 잔인했지만, 또 한편 시간은 너그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남편에게 배반을 당하고 싱글 엄마가 되어 살아온 그 잔인했던 날들이 얼마나 길고 깊었던가를. 차창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라디오에서는 애틋한 가사가 흘러나와 나의 상상을 끝없이 부추긴다.
"찻잔에 어리는 추억을 보며 / 당신도 울고 있네요......”
가사를 음미하며, 먼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를 그들의 재회를 한번 상상해 본다. 나의 상상은 소설을 쓰며 날개를 단다.
- 어느 날, 길을 가다 두 사람이 마주친다. 너무나 뜻밖이라 말문마저 막힌다. 덥석 두 손 더우잡고 불리워야 할 이름들이 목젖 아래로 깔아 앉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찻집을 향했다. 남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욱하고 슬픔을 치밀어 올린다. ‘바보 같은 양반.’ 그녀의 눈시울이 더워 온다.
붉은 벽돌로 장식된 찻집의 벽난로는 따스했다. 장작불이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진항 커피향이 두 사람을 감싼다. 그러나 그들은 시선을 내리깐 채 오랫동안 말이 없다. 흐르는 침묵은 세월의 강만큼이나 넓고 깊었다.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때 그녀의 눈에 비친 남편의 눈물! 굳게 감은 두 눈을 비집고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는 눈물, 눈물, 눈물. 그의 눈물은 소리 없는 말이 되어 그녀에게 건네어진다.
‘여보, 미안하오. 용서해주구려.’
이십 년, 아니면 삼십 년 뒤에야 눈물로 용서를 청하는 이 한 마디. 이 한 마디가 그토록 어려워 지금도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가. 어느 새 그녀의 두 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미칠 듯한 밤이면 식칼을 들고 달려가, 새벽이 희부염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의 아파트 불빛을 보며 어둠 속에 떨었던 그녀. 후딱 정신을 차려보면, 손에 든 칼은 어느 새 휘어져 있고 몸은 흥건히 땀에 젖어 있었다. 한기에 떨고, 배신감에 떨며 이슬에 함뿍 젖어 돌아오던 그 숱한 나날도 이제는 눈물 속에 녹아내린다. -
깨진 사랑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이 세상에 있을까. 절규하듯 높아지는 음이 상상에 빠진 나를 깨웠다.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 당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 나 혼자 방황했었죠......”
방황이라면 그녀만큼 많이 한 여인이 또 있을까. 어둑한 방을 박차고 밤이면 밤마다 산타 모니카 바다로 달려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립다아 ......!”
파도는 그녀의 절규를 삼켰다 뱉었다 하며 말없이 철썩였다. 검은 밤바다를 비추고 있는 은빛 달빛도 그녀에겐 한줄기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성당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영성체조차 못하는 그녀에겐 영성체 후 묵상 시간이 오히려 고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 그 시간.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는 통증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 그녀는 감격스럽게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못 오면 내가 가마.” 그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사방 좌우를 훑어보아도 묵상에 잠긴 교우들의 모습뿐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똑 같은 음성이 들려오며, 가슴에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그 순간,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여태껏 원망만 했던 주님인데, 주님은 역시 그녀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날 이후, 그녀의 아픔은 딱지가 되어 떨어져 나가고 긴 방황도 끝이 났다. 하느님의 치유는 완전하셨다. 그녀에겐 그 날이 바로 부활의 날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봉사의 삶으로 채워가야만 했다. 그것만이 무상으로 받은 주님 은총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녀가 굳이 빈민가인 피코 길에다 실비집을 차리고 싶어 한 이유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꿈은 하나뿐이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주 대전에’ 나가 옛 남편과 함께 영성체를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용서와 회개의 완성이라는 생각에서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어 오듯이 그녀는 이 소망을 오랫동안 품어 오고 있다. ‘피코의 마마’가 되고 싶다던 첫 번째 꿈은 4.29 폭동으로 물거품이 되었지만, 두 번째 꿈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간과 주님의 은총 속에 맡길 수밖에 없으리라.
나의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도 깨진 사랑의 회복이다. 우리가 지상에서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그것뿐이란 생각이 든다. 비단 부부의 사랑뿐이랴. 자식과의 관계도 그렇고,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사람들, 긴 세월 '웬수‘ 목록에 올라 도저히 용서 못 할 것 같은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더 늦기 전에 손을 내밀어 지난날을 용서 받고 화해하는 복된 시간이 왔으면 싶다.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 당신도 울고 있네요.”
창밖엔 비가 오고 내 마음엔 더운 눈물이 흐른다. 안개 속과도 같이 뿌연 405 프리웨이 빗속을 달리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눈물은 성수’라고 말한 섹스피어의 말도 이제사 알 것만 같다. 정녕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 오늘 우리 모임을 위해 국을 끓이고 있을 ‘피코의 마마’를 보면 와락 끌어안고 울 것만 같다.
<후기>
이 글은 1998년에 최초로 쓴 작품으로 2000년 대희년 때 발표한 뒤 묵혀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다시 꺼내서 읽어 보게 되었다. 우연히 피코의 마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 내가 상상의 날개를 달고 두 사람이 만나 화해하는 장면을 넣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걸로 설정한 내 상상과는 달리, 전 남편이 집으로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35년만의 일이었다. 눈물로 용서를 청하는 그에게 피코의 마마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제 와서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마음의 짐을 훌훌 벗고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화해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에도 눈물이 괴어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혹시 용서 못하신 분 있으면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했으면 좋겠다. 깨진 사랑을 회복하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이 지상에는 없지 싶다. 전화를 끊기 전에 피코의 마마는 이렇게 말했다. "요안나! 이제 나는 마음의 부자야! 억만금을 줘도 안 바꾸는 마음의 부자!” 그녀의 들뜬 음성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지펴왔다
새벽 전람회
새소리에 잠을 깼다. 창으로 들어오는 여명의 빛살을 바라보며 침대에 나를 그대로 버려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많이 먹는다고 한들 나와는 잠시 먼 얘기가 된다. 적어도 이 해 뜰 무렵의 한 시간, 새벽 여섯 시부터 일곱 시 까지는 나만의 시간이다. 늘 바쁘게 사는 자신을 붙들어 이렇게 게으름 속에 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육체의 게으름을 마음껏 피우는 이 시간이 오히려 내겐 창작의 시간이 된다. 시인이 되고 철학가가 되어보는 것도 오직 이 시간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내 눈에 남쪽으로 난 큰 창이 들어온다. 사방 막힌 벽에 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주검같이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어도 창이 있음에 내 방은 무덤이 되지 않고 집이 되어준다. 집과 무덤의 차이는 창의 유무라던가. 창은 외부와의 차단을 막아주는 열림의 상징이다. 창이 있음으로서 내 마음은 열리고 사고는 확장된다. 그리고 관계가 성립된다. 창은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나는 내 마음의 내밀한 정원을 보여준다. 생물과 생물과의 관계도 아름답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교감도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창을 본다는 것은 결국 창밖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눈과 가슴으로 읽는 묵독이다. 조근조근, 나긋나긋 자연이 전해주는 말은 언제나 나직하다. 그러나 긴 여운이 있다. 창이 보여주는 세상은 지루한 산문이 아니라, 암시와 은유로 보여주는 경쾌한 시요, 음악이다. 아니,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풍경화라고나 할까. 나는 내 창을 통해 비발디를 듣고, 모네를 본다. 때로는 빛의 작가 램브란트를 통해 로고스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여미기도 한다. 나는 이 시와 음악이 흐르는 풍경화를 일러 ‘새벽 전람회’라 이름 지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오직 나만을 위해 열어주는 새벽 전람회. 이 전람회는 오직 나만을 위한 유일성도 유일성이지만, 그 표정과 모습이 매양 다르기에 더욱 흥미롭다.
마침, 오늘은 토요일 하고도 특별한 부활전야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드리는 자정미사는 경건하고 장엄하다. 사순시기를 지나고 슬픔과 고통의 강을 건너 드디어 맞게 된 부활전야. 서로에게 촛불을 붙여주며 함께 어두움을 밝혀가는 빛의 예식이 있는 날이다. 빛의 예식이 끝나면, 우리는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하고 환호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 사람들은 이미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밤 자정미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 특별한 날, 나의 창은 어떤 그림을 내어걸며 오늘의 메시지를 전해올까. 사뭇 기대가 된다.
아침 햇살이 서서히 부챗살로 퍼져오자, 새벽하늘도 가슴을 열어 즐거이 아침 태양의 배경이 되어준다. 가슴을 연다는 것은 상대방의 배경이 되어준다는 것, 그 아름다운 의미를 읽는다. 연회색 새벽하늘에 붉은 기운이 더해지니, 옅은 무채색으로 걸려있던 담채화 한 폭도 밝은 채색화로 바뀌어 간다. 그제서야 어둠 속에 지워졌던 형체와 색깔들이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4x6피트의 커다란 화폭에 비해서 구성이나 소재는 매우 단순하다. 네모난 창틀 왼쪽 귀퉁이에 반쯤 몸을 드러내고 있는 팜츄리와 시골 학교 종처럼 처마 밑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구리 풍경, 그 뒤에 너울대는 버드나무와 키 큰 잡목 한 그루. 그리고 풍경화의 단골손님인 구름 몇 점과 이 모든 소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연푸른 하늘. 단순한 소재에 구성 또한 늘 고정되어 있어 어찌 보면 매우 단조롭고 지루할 것 같은 풍경화다. 하지만, 이 단조로운 풍경화가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바람의 장난 때문이다. 거기에 새벽 새들의 군무가 곁들여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우리네 인생도 ‘생로병사’라는 간단한 문패 하나 달고 있을 뿐이다. 길게 풀어 써봤자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었다’라는 단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생’과 ‘노’라는 단 두 음절 사이에 끼어든 ‘사랑’이나 ‘운명’이란 단어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장편 소설을 쓰고 간다. 뿐인가. 책 열권을 써도 모자란다며 아예 말문을 닫고 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병’과 ‘사’ 사이에 끼어있는 긴 고통은 차라리 말없음표로 남겨두자. 하지만, 조약돌 없이 어찌 시냇물의 노래가 있겠는가. 마지막 불러야할 한 소절의 노래를 위하여, 우리는 조약돌에 미끄러져 무릎이 깨지더라도 나아가야만 한다. 걸림돌로만 생각되던 조약돌도 때로는 노래가 되는 것을 살면서 배워간다.
오늘 따라 멋진 풍경화를 보여주기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던 새들이 더욱 바빠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다시 왼쪽으로 사방팔방 무늬를 그리는 새떼들의 군무는 단조로운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꾸며준다. 저들의 전언은 무엇일까. 새벽 새떼들의 몸짓을 보며 그들의 암호를 풀어본다. 저 넓은 창공을 날고도 상처 하나 내지 않는 ‘무흔적’. 순간, 이 세상에 점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 안달하던 내 욕심에 실소했다. 그러면서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던 그 위선이라니. 그토록 부산하던 새들의 날갯짓은 이런 나를 깨우치기 위한 작은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래펄에 자꾸만 제 발자국을 새기지만, 파도는 몇 번이고 되돌아와 발자국을 지워준다. 겨울 눈발도 마찬가지다. 삐뚤삐뚤한 우리의 발자국을 말없이 지워준다. 어찌 보면, 자연은 걸레를 들고 따라다니는 어머니 같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풍경을 깨워 놓고 팜트리 잎 사이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풍경이 놀라 땡그랑거리자, 제 구도를 그리며 조용히 서 있던 팜트리도 후두둑 잎을 턴다. 아, 그때였다. 갈가리 찢기운 잎새 끝에서 수 천 수 만 조각의 햇살이 금빛 가루를 뿌리며 쏟아져 내렸다. 와아, 저 눈부신 빛의 난무. 찢겨서 더욱 아름다운 ‘성의’를 펄럭이며 잎새도 목청 높여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과 햇살과 팜트리의 잎새가 탄주하는 저 아름다운 빛의 삼중주. 숨이 멎도록 아름다웠다. 아니, 눈물겨웠다.
십 수 년 간 싱글엄마로 살아온 내 삶과 허전한 시장바구니 같던 그의 삶이 닮아 보인 탓일까. 팜트리에 대한 내 마음은 장미보다 늘 각별했다. 꽃도 열매도 자랑할 게 없던 나무. 게다가, 힘없이 축축 늘어지고 뾰족하기만 해 새마저 외면하던 나무가 아니던가. 외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하늘로 하늘로만 그 키를 높혀 갔을까. 버릴 것 다 버리고 잊을 것 다 잊으며 소소한 생각 몇 이고 살아가던 팜트리. 갈가리 찢겨져 힘없이 늘어져 있는 팜트리 잎새를 보면, ‘너도 아픔이 참 많았었구나’ 싶어 짠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저토록 아름다운 빛의 축제를 벌여 날 들뜨게 하는가. 그 가녀린 몸체에 얼마만한 소망이 숨어있었기에 저토록 많은 빛을 토해내나. 저도 오늘만은 부활의 기쁨을 소리쳐 노래하고 싶었나 보다. 아니, 상한 갈대는 꺾지 않으신다던 신의 선물이었을까. 아픔도 슬픔도 모두 버리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신도 애달팠을 테지. 울고 싶은 우리네 삶도, 때로는 바람 불어 금빛 햇살 쏟아지는 날도 있겠거니. 금빛가루를 뿌리며 너울너울 춤추는 팜트리가 오늘따라 눈부시게 아름답다.
어느새 밝아온 아침, 나만을 위한 ‘새벽 전람회’도 문을 닫아야할 시간이다. 팜트리 위에서 부서지던 금빛 햇살이 새벽 풍경화에 부제를 달고 있다.
‘지나온 삶은 모두가 은총이었네.’